32,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 (2)
“그 철없는 놈은 여전하군. 언제고 한 번 사고 칠 줄 알았지.”
“왕 국주의 마음이 편치 않겠군요. 삼일 후 만나기로 했으니 잘 얘기해봐야겠습니다. 아들의 팔을 부러트렸으니 속이 많이 상했을 겁니다.”
“그러시게. 곡부남가와 북풍표국은 한 배를 탄 운명이 아닌가. 이런 일로 벽이 생겨서는 안 되지. 아닌 말로 북풍표국이 내일부로 현판을 바꿔달겠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도의적인 책임을 묻는 것이 전부니까. 어찌됐든 곡부남가는 무가가 아니잖아.”
막 총관은 결론을 내린 후 슬그머니 남천홍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이쯤 됐으니 남천휘에게 칭찬 좀 해주라는 신호였다.
‘천휘야, 수고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남천홍은 자신 앞에서 표정을 굳힌 채 젓가락을 놀리고 있는 동생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데 사적인 대화가 너무 드물었던 탓일까.
쉬이 입을 떼기 어려웠다.
“천, 천, 천······.”
남천휘는 자신을 향해 더듬거리는 형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네?”
그러자 소가주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황급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천천히 먹어! 너 혼자 다 먹을 거냐?”
“아, 네.”
남천휘는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놨고, 소가주는 얼굴을 붉힌 채 침묵했다. 반면 막 총관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은 채 연방 술을 들이켰다.
‘그렇지. 형에게 먹을 건 중요하니까.’
남천휘는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나 눈을 둘 곳이 없었기에 서가를 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고 보니 형의 독서량은 여전하네.’
그가 알기에 소가주의 서재는 따로 존재했다.
한데 집무실에도 수백여 권의 서책이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서가에 꽂힌 서책들은 손을 댄 흔적이 역력했다.
그 중 책 한 권이 남천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응?’
다른 서책들이 쌓여 있는 것과 달리 한 권의 새 책이 제목이 보이도록 세워져있었다.
‘쌍익여일오?’
쌍익여일오(雙翼如一烏)라면 ‘한 마리의 까마귀처럼 두 날개를 펴다.’라는 뜻이다.
“저 책 좀 봐도 되요?”
남천홍은 마치 구사일생의 기회라도 얻은 사람처럼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봐.”
소가주가 흔쾌히 내어주는 것으로 보아 별 볼 일 없는 서책인 듯했다.
하나 남천휘는 빠르게 서책을 꺼냈다.
‘역시 직도야.’
서책의 표제 밑에 누군가 직도를 그려 놨다.
책을 펼치는 순간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 백파도 남추의 야담집을 발견했습니다.
《야담집》
- 백파도에 대한 사료가 존재합니다.(가치: 50)
- 소설의 형식으로 구성된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 곡부남가와의 관련도가 증가했습니다.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황급히 책의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진짜 소설이네.’
야담집은 백파도의 생존 당시의 기록을 모아서 소설의 형식으로 펼쳐낸 것이다. 하나 정확한 사료(史料)만 사용한 것이 아니기에 온갖 황당무계한 내용들이 가득했다.
‘얼씨구, 이것 봐라.’
야담집에 따르면 백파도 남추는 수많은 사람을 구하고, 산동성의 평화를 가져온 대영웅이라고 묘사됐을 정도였다.
‘크큭! 산적에서 신분이 수직 상승하셨네.’
남천휘는 고소를 머금었다.
하나 허황됐다고 해서 책을 내려놓지 않았다.
어찌됐든 가치 50의 물품이 아니던가.
50의 가치는 야담집의 내용이 전부 가짜가 아님을 나타내는 반증이리라.
‘이야기는 그런대로 재미있네.’
슬쩍 앞표지를 살피니 ‘금태현’이라는 유생이 만들었다고 적혀 있었다. 분명 큰돈을 받고 있는 말, 없는 말을 더해서 만들었겠지.
‘나중에 내 이야기도 하나 써달라고 할까?’
하나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재이의 존재 자체를 납득시키는 데에만 한세월이 걸리리라.
그러던 중 남천휘는 묘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백파도 남추가 싸움을 하는 장면이었다.
‘또 날개 얘기가 나오네.’
백파도 남추가 싸울 때마다 ‘검은 날개를 펼친 채 휘몰아치는 도풍에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다.’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과장된 표현이라 여겼다.
한데 계속해서 반복됐고, 심지어 표제에도 쌍익이라는 단어가 존재했다.
‘직도를 들고 뛰는 모습이 새처럼 보일 수가 있나?’
남천휘는 조금 더 집중해서 쌍익여일오를 읽었다.
잠시 후 책을 덮을 때 절로 한 숨이 흘러나왔다.
‘흐음, 쌍익. 쌍익이라······.’
눈을 감고 자신이 수련할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행군림보를 밟으며 중양칠도의 일곱 초식을 펼치는 모습을 그려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만약에 왼손에도 직도를 들었다면? 애초에 직도를 두 자루를 들면 날개처럼 보이기는 할 텐데.’
머릿속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에 도 한 자루를 더 만들어줬다.
‘지혜 수치가 올라가서 그런가? 상상이 잘된다.’
횡으로 그을 때 반대편 직도가 교차하듯 반대편을 휩쓸었다. 일도격부터 칠도격까지 모든 동작에 한 자루의 직도를 더했다.
압권은 칠도격에서 나타났다.
‘오른손에 쥔 직도를 놓고······.’
허공에 뜬 직도를 낚아채는 건 왼손 검지다.
그 상태로 내리그을 때 본래 왼손에 쥐고 있던 직도가 자연스럽게 역수로 쥐어졌다. 즉 왼손에 쥐고 있던 직도는 검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파지했다.
‘남은 검지로 오른손에서 던진 직도를 잡으면 쌍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야. 어! 잠깐.’
이대로 끝났다면 예전의 칠도격과 다를 것이 없다.
한데 칠도격의 투로를 끝낼 때 역수로 쥐고 있는 왼손의 직도를 휘둘렀다. 그 순간 가상의 적이 공격할 수 있는 투로가 절로 막혔다.
이것이야 말로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가능해지는 공방일체(攻防一體)의 묘리가 아니던가.
남천휘는 눈을 끔뻑이며 읊조렸다.
‘어, 쌍도가 더 좋네.’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중양칠도의 진체(眞體)에 접근했습니다.
◎ 중양칠도에 관한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 중양칠도의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남천휘는 중양칠도에 관한 알림을 들으며 침음을 흘렸다. 세 번이나 이어진 알림은 경중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특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함을 따진다면 첫 번째 알림이리라.
하나 남천휘는 두 번째 알림을 듣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뜬금없네.’
대화동에 다녀온 이후 지금껏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나 중양칠도의 숙련도는 97에서 멈춘 지 오래였다.
‘갑자기 숙련도가 왜 올라?’
다른 건 몰라도 중양칠도는 곡부남가의 그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했다. 그리고 그 성취 역시 모두의 인정을 받지 않았던가. 심지어 북풍대주인 조상은 숙련도 60일 때 대성했다며 축하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재이가 생각하는 대성과 가솔들이 생각하는 대성이 다른 것이라 추측했다.
열심히 하면 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 끝끝내 97의 벽을 넘지 못했다.
‘도대체 왜?’
재이의 설명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늘 푸른 소나무처럼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복잡한 심경으로 무공창을 열었다.
촤라락-
남천휘는 두루마리가 펼쳐지며 나타난 무공 열람을 보고 침음을 흘렸다.
‘아.’
삼황내문과 섬영검, 오행군림보는 여전했다.
한데 중양칠도는 마치 발광체처럼 하얗게 번뜩였다.
축복받은 확인서를 바르라는 뜻이다.
‘중양칠도. 확인.’
그 순간 축복받은 확인서 중 한 장이 빛에 휘감긴 채 증발됐다. 동시에 중양칠도에 관한 내용이 새롭게 써졌다.
《반쪽짜리 중양칠도.》
- 곡부남가의 가전무공으로 직도를 사용하는 패도(覇刀)적인 도법.
- 숙련도(98/100). (가치 :20)
기가 차고, 코가 막힐 일이다.
진체에 접근과 명칭의 변경은 일맥상통했다.
반쪽짜리라는 표현만 봐도 뻔하지 않은가.
‘반쪽짜리만 전해졌구나.’
예상대로였다.
중양칠도를 수련할 때마다 어딘가 비어있는 듯한 아쉬움이 가득했다. 또한 백파도 남추의 과거사를 접할 때마다 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가치 20의 도법으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뒷골목 왈패나, 삼류 산적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곡부남가와 같은 일문을 세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 설마?’
불현 듯 한 가지 가설이 뇌리를 스쳤다.
지혜 수치를 올릴수록 궁리할 때 재기가 번뜩이는 경우가 잦았다.
‘단순히 중양칠도를 수련하는 걸로 그치지 않고······.’
중양칠도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야 숙련도가 오르는 것은 아닐까.
이미 숙련도 100을 찍은 삼황내문과 오행군림보를 떠올렸다.
삼황내문은 제반사정이라 할 만한 것 자체가 없었다. 이미 도가에서 흘러나온 심법으로 세간이 익히 알려졌기 때문이다.
오행군림보에 대한 지식도 상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이는 모드가 승급할 때마다 음악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았던가.
‘어라? 그렇다면.’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만약 자신이 파진악이나 창해일성소에 관한 설명을 듣지 않겠다고 했다면 어찌 됐을까.
‘야! 지금도 나는 헤매고 있었겠지? 대답해라. 이번에는 안 참아!’
◎ 활로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야! 이것아.
살 길이 있으면 죽을 길도 있다는 거잖아.
하마터면 아직까지 오행군림보의 기본 모드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뻔했다.
어쨌든 자신의 가설이 옳다면 활로가 열린다.
이미 중양칠도의 수련 자체는 극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제는 중양칠도가 어떤 도법인지를 알아야 할 때로구나.’
남천휘는 서가에 꽂힌 서책을 눈으로 훑었다.
하나 백파도 남추나 중양칠도에 관한 서책은 찾지 못했다.
“형님.”
소가주는 멈칫하더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바라보는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린다.
‘안 되려나?’
하나 히든 퀘스트가 걸린 일이다.
남천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형님 서재를 구경해도 될까요?
소가주는 잔뜩 볼을 부풀렸다.
어찌 보면 화가 난 듯했다.
그는 물끄러미 남천휘를 바라보더니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뭐라는 거야?
다행히 막 총관이 기이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하라는군. 어서 가보렴.”
남천휘는 두 사람에 꾸벅 인사를 한 후 집무실을 나섰다.
쾅.
소가주는 문이 닫히는 순간 입술을 오물거렸다.
부풀었던 볼은 한순간에 가라앉았고, 이내 잔기침이 연이었다.
“이거라도 마시게.”
막 총관은 병을 건넸다.
소가주는 헐레벌떡 병을 기울였다가 누런 물을 분수처럼 쏟았다.
“푸흡! 이거 술이잖아요?”
“클클, 내게는 그게 물이야.”
막 총관의 너스레에 소가주는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하필 입안에 먹을 걸 두고 있을 때 말을 걸다니.”
“뱉고 얘기하면 되잖아.”
소가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더럽다고 여기면 어쩝니까?”
하긴 고기 몇 조각을 뱉는 것과 음식 두어 접시를 토해내는 건 비교가 되지 않으리라.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눈을 빛냈다.
“안되겠습니다. 살을 빼야겠어요.”
막 총관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말이 그리 진중한 표정으로 해야 할 말인가?”
“천휘와 다시 친해지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중요하지요.”
“클클, 그리 하시게. 식비가 줄어들 테니 총관인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지.”
소가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비가 왜 줄어듭니까?”
“살을 뺀다며.”
“네, 살을 뺀다고 했지요. 먹을 걸 줄인다고는 안 했습니다. 아시잖아요. 저 원래 살이 안찌는 체질입니다. 조그만 관리하면 금방 빠져요.”
막 총관은 인상을 썼다.
“왠지 모르게 밉상이로군. 허황된 얘기는 나중에 하고, 급한 불부터 끄세나.”
소가주는 자세를 바로 했다.
“허황된 얘기는 아니지만, 지금은 북풍표국의 일을 논해 볼까요?”
두 사람은 조금 전과 달리 표정을 굳혔다.
남천휘가 있는 자리에서 논할 화제가 아니었기에 말을 아꼈던 것이다.
“왕풍의 독단적 행동일까요?”
“모르지. 하나 작다면 작은 일이고, 크다면 큰일이야. 부디 이 일로 인해 감정의 골이 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가주에게 서찰을 보내던가, 가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소가주는 나직이 한 숨을 내쉬었다.
“서찰을 보내는 걸로 결정하겠습니다. 요즘 강호의 정세는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어요.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된 듯하나, 찝찝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막 총관은 그 좋아하는 술잔까지 내려놓은 채 탄식했다.
“그러게 말이야. 요즘 산동 곳곳에서 자잘한 혈사가 줄을 잇고 있네. 혈랑회와 같은 놈들이 서너 조직은 되는 듯해. 어째서 인지 파락호나 왈패들도 늘어난 듯하고.”
“양민들 중에서 사라지는 이들이 많다던데요?”
“중원에 사람이 발붙이고 살만한 장소가 얼마나 될까? 제아무리 곡부가 평화롭다고 해도 양민들의 삶은 달라. 화전민이 되어 산으로 올라갔을 수도 있고, 유민이 되어 다른 성으로 넘어갔을 수도 있지. 아니면 어딘가로 끌려가서 비명횡사 했던가.”
소가주는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