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
32,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
남천휘는 바닥에 펼쳐진 표식을 헤아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다섯 개가 아홉 개로 늘었으니 확장이 맞기는 했다.
‘설마 이 아홉 개에서 무작위로 뜨는 건가?’
그 순간 아홉 개의 표식이 순차적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두 개씩 짝을 지워서 반짝이기도 했다.
‘아! 대답을 듣는 것보다 더 얄밉네.’
《오행군림보의 난해 모드가 실행됩니다.》
《해당 모드와 어울리는 음악을 검색합니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고 했다.
남천휘는 처음과 달리 느긋하게 음악 검색을 기다렸다. 시야 상단에 생긴 검은색 막대가 천천히 하얗게 물들었다.
‘왕 국주를 만나기 전에 끝나겠네.’
역시 경험자의 힘일까?
남천휘의 예상대로 이내 재이의 알림이 이어졌다.
《해당 모드와 어울리는 음악은 창해일성소입니다.》
《보법의 표식과 동조율은 98%입니다.》
《창해일성소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숙련도도 상승합니다.》
-> 창해일성소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 과정보다는 결말, 지금 당장 수련을 시작한다.
동조율은 2%가 상승했다.
그리고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라면 조금 전 확장판 무무혁명의 알림 이전에 들렸던 음악을 뜻하리라.
‘너무 생소한데?’
파진악은 그나마 어느 정도 알려진 연회곡이다.
남천휘는 지혜 수치를 증명하듯 파진악에 대한 연원과 구성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하나 창해일성소는 아니었다.
‘이거야말로 들어봐야겠네. 이게 뭐냐?’
◎ 정(正)의 ‘유’와 마(魔)의 ‘곡’은 칠현금과 퉁소의 합주를 통해 강호의 의리를 논하니 높고 낮음은 누구의 꿈이고, 빛과 그림자는 누구의 뜻이던가. 정마는 인간에게서 시작됐으니 인간으로 끝을 맺으리라. 오직 덧없는 협자의 마음만이 천년을 남아······.
남천휘는 걸음을 멈췄다.
재이의 알림이 이어질수록 마음 속 깊이 울림이 퍼져나가는 듯했다.
‘파도에 웃음을 싣는다.’
파도는 들어올 때 포말이 되어 흩어지고, 밀려날 때 바다에 섞일 터였다. 그런 파도에 웃음을 담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웃는다.
협행은 남지 않아도 협자의 마음은 남는단다.
‘소름이 끼칠 만큼 무모하면서 대단하구나.’
지금껏 재이의 도움을 받아 특급 강호인이 되려던 남천휘가 잠시나마 스스로를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멋있어. 새로워, 이거야말로 최고야!’
그는 여전히 귓가에 울리고 있는 전주를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칠현금과 퉁소만으로 풍부하게 퍼지는 음률에 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한데 그 순간 눈앞에 손모양이 생겨났다.
엄지를 접고 네 손가락을 편 모습이다.
‘응?’
손가락을 하나 접는다.
‘셋이라고?’
하나를 더 접었다.
‘뭐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손가락이 하나씩 접혔다.
‘기다렸다가 노래라도 불러야 할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이내 마지막 남은 검지가 접히는 순간.
눈앞에 표식이 반짝였다.
또한 박자가 빨라지며, 소리가 뾰족하게 치솟았다.
그리고 밤새도록 술을 마신 노인이 고성방가의 끝을 애창곡으로 마무리하는 듯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 타하항 하안샤아
찢어질 듯한 목소리는 듣기에 고역이다.
듣는 순간 마음에 쏙 들었던 파진악은 웅장하고, 화려했다 반면 창해일성소는 매순간 통통 튀듯 음의 고저가 심했고, 박자는 변화막측했다.
그래서였을까.
곡이 이어질수록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다.
흉중의 웅심을 어떻게 해서든 토해낼 때였다.
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함께 풍진강호를 논하고 싶었다.
“하아!”
남천휘는 그렇게 오행군림보의 난해(難解) 모드에 입문했다.
‘강호의 낭만을 내 품안에!’
하나 현실은 냉혹하다.
띠- 띠- 띠-
온 세상이 최악(最惡)이라는 두 글자로 도배됐을 만큼 난해 단계는 어려웠다.
잠시 후 남천휘는 성적표를 받았다.
◎ 성공률 : 14%. 정확도 : 7%
◎ 합계 등급은 ‘E’ 등급입니다.
◎ 난해는 기본에 비해 난이도와 속도, 변수 생성이 세 배입니다. 신체의 균형을 유지한 채 성공률과 정확도를 올리세요.
남천휘는 두 손을 무릎에 댄 채 헉헉거렸다.
‘아씨! 왕풍 놈하고 싸울 때보다 더 힘들어.’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함께 노래하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듯했다.
*
소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천휘가 물에 빠진 사람처럼 흠뻑 젖은 채 돌아왔기 때문이다.
‘왕 소협이 그렇게 강했나?’
그녀는 아껴뒀던 전병을 말없이 내밀었다.
남천휘는 전병을 받고, 지나가는 개에게 던져줬다.
“이잉, 제가 아끼던 건데.”
“네 표정만 봐도 어떤 뜻으로 줬을지 뻔히 보여. 왕풍은 두들겨 팼으니까, 가서 물이나 가져와.”
소혜는 입술을 삐죽이며 물을 찾으러 나섰다
그 사이 시비가 찾아와 왕망의 호출을 알렸다.
‘아! 목마른데.’
하나 가장 시급한 일을 꼽자면 오행군림보의 수련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볼 일을 끝내고 한 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했다.
남천휘는 입맛을 다시며 시비를 따라 걸었다.
저 멀리 왕망의 집무관이 보였다.
북풍표국은 성세를 이뤘으나, 왕망의 처소만은 예전 그대로다.
‘왕 국주는 여전히 검소하시네.’
다시 한 번 생각해봐도 어떻게 왕망 같은 협자의 밑에서 왕풍 같은 패륜의 새싹이 자라났을지 의문이다.
‘응?’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때마침 왕망의 숙소를 떠나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방갓을 쓰고, 빛바랜 피풍의로 몸을 감싼 무인이다.
한데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레벨은 두 자리인데······.’
남천휘는 그간 조상과 벽추를 비롯해 여러 무인을 상대했다. 또한 대화동에서 혈랑회의 추적자들과도 싸웠다. 그러한 경험으로 인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라는 것이 생겼다.
같은 두 자리 수 레벨이라고 해도 실력은 천양지차인 경우가 존재했다.
저 사내가 그런 부류였다.
‘왕 국주보다 더 위일까?’
왕망의 추정 레벨은 50 이상이다.
그렇다면 저 볼품없는 외형의 사내는 그 이상이라는 말이 된다.
그 때 사내가 남천휘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고개가 슬쩍 돌아가는 듯하더니 이내 자리를 떴다.
‘······.’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시선을 마주친 것도 아닌데.
그저 그가 자신을 인식했다고 여겼을 뿐임에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초면이 분명한 사내가 살기(殺氣)를 보인 게다.
‘저 새끼, 왜 저래?’
남천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급한 손님이 오셨다고요?”
왕망은 손수 차를 따라주다가 멈칫 했다.
하나 이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의뢰 때문에 잠시 대화를 나눴지.”
“큰일인가 봅니다.”
남천휘의 말에 왕망은 귀찮은 기색도 없이 차를 홀짝였다.
“잘만 되면 돈뿐 아니라 명예도 얻을만한 일이지.”
“잘됐으면 좋겠네요.”
“하하하! 사람 일이 어찌 마음처럼 되더냐? 그저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이지. 그나저나 소가주가 서찰을 보냈다던데.”
왕망은 서찰을 확인하더니 남천휘를 보며 웃었다.
“해가 바뀌면 중평산장과의 거래를 다시 시도할 테니 조만간 자리를 만들어 회의를 하자는 내용이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어찌 서찰의 내용을 자신에게 알려준단 말인가.
하지만 왕망의 뒤이은 말에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소가주는 네게 제대로 일을 맡기려는 듯하구나. 그간 형제 사이에 격조한 듯하여 걱정이 많았는데 잘 됐구나.”
“제가 가문의 일에 나서도 될까 모르겠습니다.”
왕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 협명과 무위라면 곡부남가의 날개가 될 게야.”
남천휘도 마음 편히 미소 지었다.
왕망은 평소의 호탕한 성격처럼 후계 문제는 생각지도 않는 듯했다.
“이제 밥값을 할 수 있겠네요. 저 또한 가문의 일이라면 저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좋구나. 사내라면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지. 그나저나 오랜만에 만났으니 검이라도 섞어 볼 테냐? 얼마나 성장했을지 궁금하구나.”
남천휘는 손사래를 쳤다.
“이미 풍아와 겨뤄봤습니다.”
왕망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크하하! 풍아가 큰 손해를 봤겠구나.”
일곱 번 굴렀고, 마지막에는 갈비뼈도 나갔지요.
남천휘는 이쯤 해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한데 풍아가 익힌 검법에 관해서 아십니까?”
왕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천휘는 깔끔하게 거짓 없이 사심을 담아 사실만 고자질했다.
쨍그랑.
왕망은 진조문과 열왕대전검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값비싼 찻잔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밖을 향해 대갈일성을 내질렀다.
“왕풍! 이 놈! 어디 있어? 당장 불러오너라!”
그리고 일각 후 왕망은 남천휘의 눈앞에서 왕풍의 팔을 부러트렸다.
콰직!
*
북풍상단과 북풍표국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상단(商團)은 오롯이 곡부남가의 것이다.
남가의 자본과 의지, 인맥에 상재를 더하여 일궜다.
그렇기에 소가주가 단주를, 총관이 부단주를 맡아 운영했다. 사고파는 물건과 판매처를 비롯한 모든 과정이 곡부남가로 인해 정해졌다.
하나 표국(鏢局)은 다르다.
남운군과 왕망은 형제의 연(緣)을 맺었다.
당시 곡부남가는 상단을 호위할 표국을 필요로 했고, 왕망의 표국은 쇠락하여 멸문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상부상조.
복잡하게 말하면 계약서 없는 계약 관계였다.
그렇게 곡부남가는 자금을 대고, 왕망의 표국은 상단의 호위를 도맡았다.
왕망은 그 후 남가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다고 한다. 하나 그는 의형의 곁에서 여생을 바치고자 했고, 그 증거로 표국의 이름에 북풍을 붙였다.
- 왕망은 내 동생이다. 그러니 숙부라 칭하여라.
이것이 아비인 남운군이 삼형제를 앉혀놓고 내린 가르침이었다. 제아무리 북풍을 붙였다고 해도 남가와 표국은 주종관계가 아니라 형제였다.
남운군도 삼형제도 그것을 잊지 않았다.
한데 그것을 잊은 건 세상이었다.
저간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호사가들은 자연스럽게 북풍표국을 곡부남가의 속가라 여겼다.
왕망은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웃어 넘겼다고 한다.
- 어차피 남가와 왕가는 형제가 아닌가?
*
약은 의원에게, 레벨 업은 재이에게.
그러니 가문의 일은 소가주에게 떠넘기는 것이 정석이다.
‘이건 고자질이 아니야!’
사람에게는 저마다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소가주는 곡부남가를 운영하고, 자신은 레벨 업을 하면 되는 것이다.
남천휘는 귀가하자마자 소가주를 찾아갔다.
한데 뜻밖의 광경을 마주했다.
소가주인 남천홍과 막 총관이 잔칫상을 두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차림이라는 표현만큼 요리가 가득했다.
어! 그러고 보니 정말 부러질지도?
하나 걱정하지 않아도 될듯했다.
소가주는 팔비관음보살의 현신이라도 되는 듯 빠르게 양 손을 놀렸다. 그 때마다 접시 위에 놓였던 요리가 사라졌고, 막 총관은 빈 접시를 옆으로 뺐다.
벌써 열 접시는 먹은 듯.
“누구 생일인가요?”
소가주의 손이 멈췄다.
“크흠. 왔느냐?”
그는 슬쩍 육편을 내려놓은 후 보료에 몸을 기댔다.
며칠 사이에 체구가 더욱 비대해진 듯한 건 착각이겠지.
조만간 신발 없이 다녀도 될듯하다.
굴러다니면 될 테니까.
데구르르르르.
남천휘는 말똥구리처럼 굴러다닐 형의 모습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막총관은 남천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리 앉아. 네가 가문의 일을 도운 첫 날이 아니더냐. 해서 우리끼리 축하라도 할까 했지. 흐음, 아직까지 축하할 정도의 음식은 남아 있군.”
남천휘는 소가주의 맞은편을 차지했다.
그러고 보니 형과 함께 무언가를 먹는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묘한 감흥이 느껴졌다.
한데 소가주인 남천홍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남천휘는 그 모습에 쓴웃음을 흘렸다.
‘막 총관이 억지로 자리를 만든 건가?’
싫지는 않았으나, 불편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형 또한 그러한 듯했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고자질을. 아!“
남천휘는 헛기침을 하며 고자질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보고했다.
한데 두 사람의 분위기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한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