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확장판 무무혁명. (3)
“오랜만에 뵙습니다. 삼공자.”
표국의 총표두(總鏢頭)인 삼람도(森嵐刀) 호연척이 마중을 나왔다. 호탕한 성격으로 인해 표국주인 왕망의 판박이 소리를 듣는 자였다.
‘호 총표두가 이 정도의 고수일 줄이야.’
레벨 41이라면 남천휘가 현재 파악할 수 있는 레벨의 최대치였다. 아마 무공으로만 따지자면 곡부남가에 속한 무인 중 왕망에 이어 두 번째가 아닐까 싶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한 판 뜨고 싶다.’
호연척 역시 남천휘의 눈빛을 마주하고 무언가 느낀 듯했다.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찌릿함의 정체는 분명 투기(鬪氣)일 터였다.
‘호도라는 별호를 얻으셨다더니 기도가 달라졌어. 몇 달 전과 비교하면 마치 다른 사람 같으시군.’
하나 두 사람의 미묘한 대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공자님, 배고프시면 이거 드실래요?”
소혜가 불쑥 끼어들더니 배시시 웃으며 당과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참을 수 없다.
남천휘는 소혜의 양 볼을 있는 힘껏 당겼다.
“으이구, 이 눈치 없는 녀석아.”
웅얼거리는 녀석의 말을 해석했더니.
“입맛을 다시셨잖아요.”
쓸데없는 결과가 나왔다.
그 때 짜증 섞인 한 마디가 귓가에 꽂혀들었다.
“백수가 백주대낮에 흰옷을 입고 여기는 웬일이냐?”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흘렸다.
옛 말에 호부 밑에 견자 없다고 하더라.
한데 견자(犬子)는 존재했다.
저 놈이다.
남천휘는 왕망의 아들인 왕풍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너는 여전히 더럽게 재미없구나.”
왕풍은 태연한 척 웃음을 지었다.
하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으로 보아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이내 헛기침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총표두인 호연척을 향해 말했다.
“호 표두, 아버지는 급한 손님이 오셨답니다. 남천휘는 이각 후 만나겠다고 하셨어요. 그 동안 제가 데리고 있을 게요.”
남천휘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총표두를 무시하네. 개념이 없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면 산동제일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호연척이 왕망과 함께 한 세월만 해도 이십 년은 됐으리라. 그런 사람을 가리켜 총표두라는 직위도 아니고 표두라 칭하며 제 할 말만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이견이 없을 만큼 버릇없는 행동이다.
호연척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한 마디를 건넸다.
“삼공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로서는 귀한 손님을 앞에 두고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하나 왕풍은 호연척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겼다.
“이봐요! 호 표두, 내가 있겠다잖아요. 그냥 가서 볼 일 보세요. 월봉 값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놈, 어떤 면에서는 정말 대단하다.
천둥벌거숭이가 무슨 뜻인지 알고 싶은 사람에게 소개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호연척의 눈빛을 보라.
뒷골목에서 만난다면 난도질을 한 후 개 먹이로 줄지도 모르겠다.
남천휘는 남의 위기는 자신의 기회라는 명언을 실천했다.
“저 때문에 호! 총! 표! 두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지요. 여기 제 쓸모없는 시간을 보낼 상대가 있으니 걱정 마시고 가셔도 됩니다.”
호연척은 왕풍 모르게 옅은 미소를 보였다.
“집무실에 있을 테니 볼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개인적인 교분을 나누자는 뜻이다.
후훗,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 법이라고.
‘이 재미없고, 성질 더러운 놈아.’
왕풍은 호연척이 떠나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아씨! 아버지는 저런 자를 뭘 믿고 총표두 자리에 앉힌 거지.”
자식보다는 더 많이 믿을 듯.
한데 그는 못마땅한 마음을 남천휘에게 풀었다.
“야! 매번 미꾸라지처럼 도망쳤었지? 오늘은 그렇게 안 될 거다.”
남천휘는 헛웃음을 지었다.
‘제 멋대로 생각하는 건 여전하군.’
그가 북풍표국을 꺼려하는 이유가 바로 왕풍이다.
녀석은 어린 시절부터 기이한 열등감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곡부남가와 북풍표국의 주종관계를 마뜩찮아 했으리라. 또는 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한 걸 남천휘의 탓으로 돌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알게 뭐야.’
이쪽은 소가주의 기백에 눌려서 평생 백수로 허송세월을 보냈단 말이다. 기껏 꿈이라고는 다루를 상속받아서 자릿세 받는 것이 전부였다. 아마 재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한량으로 세월을 축내고 있었으리라.
“나랑 좀 가자.”
왕풍은 오만한 표정으로 지은 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누가 봐도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간 후 주머니라도 털 기세가 아닌가. 평소였다면 왕풍에게 단 한순간도 허락하지 않았을 터였다.
남천휘에게 있어서 왕풍은 소혜가 먹던 전병만큼이나 무가치했다. 하나 그는 속없는 사람처럼 환하게 웃으며 왕풍을 따라 움직였다.
“응! 어디든지 가자.”
눈앞에 떠있는 퀘스트 창을 보고 있자니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재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칠종칠금(七縱七擒)》
- 왕풍의 개념 없는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북풍표국에서 일하는 수백 하인을 대신하여 왕풍을 능욕하라.
- 달성 조건.
->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풀어준다.
-> 왕풍을 쓰러트린 후 파진악의 세 번째 박자를 타면서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를 외칩니다.
※ 춤까지 추면 추가 보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천휘는 연무장을 코앞에 두고 키득거렸다.
‘이거라면 스무 번도 더 할 수 있는데. 아! 물론 춤은 안 출거야.’
◎ 지나친 능욕은 대상자의 정신 건강까지 해칠 우려가 있습니다.
*
왕풍은 흙투성이가 된 채 씩씩거렸다.
이미 일곱 번이나 연무장을 굴렀으니 다시 일어나는 게 용할 정도였다.
“아우! 아파, 빌어먹을! 이 새끼, 너 진짜! 아우!”
그는 잔뜩 흥분한 채 검을 들었다.
남천휘는 그 모습에 미간을 찡그렸다.
“야! 적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럼 하지 마!”
무시했다. 애초에 배려할 상대도 아니지 않은가.
“국주의 표풍십이검은 일절이라 불려. 한데 너는 왜 다른 검법을 익힌 거지?”
왕풍은 코웃음을 쳤다.
“표풍십이검이 일절이라고? 진짜 제대로 된 검법이었다면 결코 남의 아래 있지는 않으셨겠지.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다!”
얼씨구, 이 놈 말하는 것 좀 보소.
열등감을 아예 호신강기처럼 둘렀구나.
‘때론 열등감이 성장의 기폭제로 활용된다는데······.’
놈은 성장의 기폭제가 아니라 패륜의 기폭제로 삼은 듯했다.
왕풍은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닦으며 외쳤다.
“해서 나는 진조문의 열왕대전검을 익혔다. 너도 진조문이 어딘지는 알지?”
남천휘는 진조문이라는 방파명에 눈을 가늘게 떴다.
‘진조문?’
진조문(秦朝門)이라면 신공부의 공문십철 중 한곳이 아닌가. 그러니 진조문의 검법은 분명 표풍십이검보다 한 수 위일 터였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왕풍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북풍표국은 곡부남가 계열이 아니던가. 그리고 곡부남가는 신공부의 공문십철 중 노국장과 혈연으로 이어졌다.
즉 왕풍은 자신의 계보가 아닌 다른 방파의 검법을 익혀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도의적인 책임은 피할 수 없으리라.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냐?”
“흥! 강해질 수 있다면 못할 것이 없지!”
남천휘는 헛웃음을 흘렸다.
“북풍표국주가 어째서 네 방종을 용납하셨는지 모르겠구나.”
왕풍은 지금까지 얻어맞은 것을 잊은 듯 으스댔다.
“아버지는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신다고! 너처럼 떨거지로 밀려난 삼남과 달라! 나중에 내가 대성해서 보여드리면 오히려 기뻐하실 걸?”
이 새끼가 퀘스트와 별개로 울컥하게 만드네.
“어! 그래, 떨거지한테 더 맞아봐라!”
남천휘는 현재 수련용 직도를 지녔다.
북풍표국은 곡부남가와 긴밀한 관계였기에 십여 자루 정도의 직도를 구비했다. 그렇기에 남천휘는 날이 없는 직도를 한 차례 떨친 후 보법을 펼쳤다.
왕풍은 검을 비스듬히 겨눈 채 눈을 부릅떴다.
거리가 한순간에 좁혀졌기 때문이다.
이미 몇 번이나 거리를 허락하며 얻어맞았기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또 당할 것 같으냐!”
응. 넌 안 돼.
예상대로 성격은 반편이에, 하는 짓은 패륜이며, 레벨은 21밖에 되지 않는 녀석의 검격 따위는 우스웠다.
남천휘는 가볍게 검을 튕겨냈다.
열왕대전검법(列王大戰劍法)이 제아무리 훌륭해도 익히 놈이 반편이라면 두려울 까닭이 없다. 녀석은 제대로 검로를 펼치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댔다.
애초에 삐뚤어진 목표를 지닌 놈이 올곧게 수련했을 리 만무했다.
‘삐뚤어진 걸 바로잡는 건 귀찮으니.’
그냥 부러트리는 게 낫겠다.
쇄애애애액!
남천휘의 직도가 일도양단의 기세로 내리꽂혔다.
벌써 일곱 번을 놔줬으니 마무리할 시간이다.
“으아아악!”
왕풍은 전력을 다해 검을 비스듬히 올려쳤다.
한데 그 순간 허공에서 내리꽂히던 직도가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다.
허초다. 속았지!
‘너 따위를 상대하는데 두 번의 칼질은 필요치 않아!’
남천휘는 날아오는 돌을 몽둥이로 맞받아치듯 허리를 비틀었다. 더불어 직도의 궤적은 유려한 호선을 그리며 왕풍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빠각!
느낌이 제대로 왔다.
세 번 째, 네 번 째 갈비뼈에 금이 갔구나.
집까지 굴러가라!
아쉽게도 왕풍은 처소까지 구르지 못했다.
그저 활 모양으로 튕겨나가며 연무자을 청소 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놈이 지나간 자리가 아주 깨끗했다.
새로운 직업을 추천해주고 싶었다.
“아흐흐흐흑! 너, 내가 가만 안 둬.”
남천휘는 왕풍의 원독한 눈빛을 가볍게 흘렸다.
그리고 파진악의 세 번째 박자를 떠올리며 목을 풀었다.
“아아! 아흐흠!”
주어진 대사는 간단했다.
남천휘는 쓰러진 왕풍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것이! 너와 나의······.”
목소리를 가다듬은 보람이 있구나.
멋들어진 목소리는 스스로 반할 정도였다.
한 박자 쉬고 명령어를 끝내려 했다.
한데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연이었다.
◎ 오행군림보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 오행군림보의 숙련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 기본 단계에서 난해 단계로 승급이 가능합니다.
◎ ‘난해’의 난이도가 상승하는 만큼 보법의 가치도 상승합니다.
《난해 단계로 승급하시겠습니까?》
“느흔높이다. 아! 젠장.”
갑작스럽게 숙련도 100을 달성한 기쁨에 음이탈이 나버렸다.
“뭐, 뭐라는 거야?”
남천휘는 눈을 끔뻑이는 왕풍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닥쳐!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앞으로 겸양과 배려로 사람들을 대하도록 해! 그렇지 않았다가는 언제고 큰 코 다칠 거다.”
물론 하루아침에 변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사람이 변하는 데에는 계기가 필요했다.
‘나처럼 재이를 얻든가.’
하나 재이도 상식이 있다면 저런 패륜반편이에게 들러붙지는 않으리라.
그 순간 퀘스트 성공 알림이 떴다.
남천휘는 망설임 없이 돌아서서 연무장을 떠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수락했다.
‘승급한다!’
그 순간 칠현금과 퉁소의 합주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파진악과 달리 고작 두 개의 악기가 어우러졌을 뿐임에도 온 세상을 가득 채울 듯한 울림이 연이었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동서남북과 중앙에서 등장하던 표식이 아홉 개로 늘어나 있었다.
‘이건 뭐야?’
◎ 확장판 무무혁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