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확장판 무무혁명. (2)
*
이 자식들은 나를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이 어찌 이처럼 매정하게 칼질을 해댈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아는 사이라서 더 이러는 걸까?
불현 듯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래도 꽤 괜찮은 관계였을 텐데.
지난번에 술과 고기도 사줬잖아.
그러고 보니 그날 얻어먹은 놈들은 안보였다.
그 순간 대원의 검이 사각에서 치솟았다.
‘쳇, 나만의 생각이었군.’
남천휘는 직도를 검지에 걸고 휘돌렸다.
겨드랑이 사이를 스쳐가는 도신이 매섭게 검을 튕겨냈다.
땅!
내력이 담긴 칼질에 검은 두 동강이 났다.
무인에게 있어서 검이란 영원한 동반자가 아니던가.
남천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다음에는 좋은 검을 사도록 해. 물론 네 돈으로 말이야.’
부러진 검을 들고 물러서는 대원을 쫓았다.
타탓!
규칙적으로 뜨는 표식이 한순간 사라졌다.
그것은 잠시나마 임의대로 움직여도 좋다는 신호와 같았다.
퍽!
남천휘는 대원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지금 사러 가도록 해. 외출 신청은 내가 해줄게.’
그 사이 세 자루의 검끝이 등을 노린다.
상체를 가볍게 뒤로 누이며 직도를 휘둘렀다.
타타탕!
확실히 레벨 낮은 상대의 검을 쳐내는 건 쉽다.
검을 쳐내는 것과 몸을 돌리는 행위가 동시에 이뤄졌다. 그가 방향을 바꾸는 순간 다시 연무장 바닥에 표식이 생성됐다.
‘밟고, 또 밟고!’
그리고 너도 밟고.
“으악!”
보지도 않고 내지른 뒷발에 걷어차인 누군가가 비명과 함께 진열을 이탈했다.
남천휘는 빈 공간을 점하며 숨을 골랐다.
여전히 열 명 넘는 대원이 사방에 가득했다.
이쯤 되면 조상의 열정을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가 준비한 수련은 예전과 달랐고, 예전보다 효율적이다.
이곳에 모인 북풍대원의 평균 레벨은 15 전후였다.
즉 일대 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나 머릿수의 위력은 대단했다.
사방에서 검이 꽂혀드니 제아무리 남천휘라고 해도 창졸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안과 민첩 수치, 그리고 조장들을 상대했던 경험이 빛을 발했다. 저들이 아무리 열심히 수련해도 똑같은 순간, 똑같은 위치로 검을 내지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신체 조건마저 다르니 선후(先後)가 반드시 존재했다.
쉭쉭쉭쉭쉭!
다섯 개의 검이 사방에서 꽂혀든다.
하나 두 명이 자세를 낮춘 채 두 번의 칼질을 섞으려 했다.
남천휘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다.
첫 째, 공격의 선후를 판단한다.
둘 째, 유효 공격에만 반응한다.
먼저 꽂혀드는 검이라고 해도 허초라면 과감하게 무시했다. 표식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거기에 두 조장을 상대하며 갈고 닦은 본능이 더해졌다.
그러니 시간문제일 뿐 북풍대원은 한 명씩 비명을 지르거나, 어딘가를 부여잡은 채 진형에서 밀려났다.
파팟!
남천휘의 직도가 북풍대원의 허벅지를 긁었다.
하나 그도, 대원도 개의치 않았다.
생사(生死)가 결정될 상황이라면 조상과 벽추가 개입하기로 약속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눈에 불을 켜고 비무를 지켜봤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 승리를 위해서!
채챙!
걷어내고, 휘두르고, 텅 빈 가슴팍에 한 방.
퍽!
자, 또 한 명 이탈하시고.
남천휘는 절반으로 줄어든 대원들을 상대하며 신나게 날뛰었다.
“이제 정말 제대로 삼공자와 붙어보고 싶군요.”
조상은 부대주인 벽추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하나 그의 표정만 봐도 같은 마음인 것을 쉬이 눈치 챌 수 있었다.
조상은 화제를 돌렸다.
“나는 삼공자의 재능보다 평정심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싶네. 보통 한 사람을 둘러싸기 위해서는 서너 명만 있어도 충분해. 여덟이면 앞이 보이지 않고, 열여섯이면 온 세상에 사람이 가득한 것 같지. 실력 차를 떠나서 움츠려드는 것이 사람이야. 한데 삼공자는 벌써 그 단계를 지났군. 본능적으로 최소 인원을 앞에 두고 상대하는 법을 깨우치셨어.”
벽추는 쓴웃음을 지었다.
“열흘짜리 수련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제가 보기에는 오늘만 해도 충분할 듯하군요.”
“삼공자한테 패배한 자네에게 듣고 싶지는 않군.”
조상은 그답지 않게 농을 했다
그만큼 기분이 좋다는 반증이리라.
“크흠! 어쨌든 처음에는 삼공자를 가르친다고 생각했어. 최근에만 해도 상부상조라 여겼지. 하나 이제는 북풍대 전체가 삼공자의 도움을 받고 있네.”
“저 또한 깨우치는 바가 많습니다. 특히 보법을 보여주실 때마다 엎드려서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뿐 아니라 대원들도 볼 수 있게 늘 같은 방식으로 투로를 행합니다. 이미 북풍대 내에서는 삼공자에서 대한 칭송이 자자합니다.”
벽추는 친인을 보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조상은 그 모습을 보다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한 마디를 건넸다.
“삼공자는 가주가 되고 싶을까?”
벽추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그냥 그런 생각이 드네. 본래 소가주와 삼공자의 능력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어. 하나 이제는 차이가 있을까 싶더군. 오히려 더 나은 면도 많고. 혹 삼공자가······.”
조상은 말끝을 흐렸다.
벽추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후계 문제에 침묵했다.
결국 그는 원론적인 답을 내놓았다.
“북풍대는 곡부남가를 지킵니다. 그 외의 문제는 가주께서 결정하시겠지요.”
“그랬으면 좋겠군.”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다행히 잠시 후 남천휘가 정적을 깼다.
마지막 대원을 쓰러트리는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렸기 때문이다.
◎ 오행군림보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됐어! 이제 하나 남았어!”
남천휘의 외침에 벽추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하나 남았다니 이제 제 차례군요.”
조상이 벽추의 앞길을 막았다.
“아니지. 우리 둘 중 한 명이라면 응당 대주인 내가 아닐까?”
남천휘는 검을 뽑은 채 엎치락뒤치락하는 두 사람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설마?”
야! 이 빌어먹을 무공광들아.
‘내 의지는 처음부터 없는 거야?’
잠시 후 그는 두 사람과 한 번씩 비무를 해야 했다.
어쨌든 보상으로 ‘C급 무작위 보급 상자’와 ‘특기 1회 승급권’, 그리고 이빨 한 개를 받았다.
“아악! 내 이빨.”
*
비무를 끝낸 후 목욕을 해야 했다.
한겨울에도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나니 노곤했던 육체가 활력을 되찾았다.
역시 부잣집이다.
하지만 표정은 어두웠다.
목욕재계는 남천홍의 호출로 인함이다.
친형이지만 마주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대였다.
어쩌면 술주정뱅이인 막 총관이 오히려 가족처럼 가까웠다.
실제로 신경을 써주는 것도 같고.
오랜만에 마주한 소가주는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저 서찰 한 통을 내어주며 군산행을 명했을 뿐이다.
군산은 사수를 끼고 있기에 많은 양의 물품을 적재하기에 좋은 위치였다. 실제로 북풍상단에서 매매하는 미곡의 창고가 있기도 했다.
그렇기에 남천휘는 마차를 타고 소혜와 함께 남가미곡창고(南家米穀倉庫)로 향하는 중이다.
“바람이 시원해요!”
맞은편에 앉은 소혜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당과를 쪽쪽 빨며 헤벌쭉했다.
시원하기는 개뿔, 이빨 시리다.
소혜는 그런 남천휘의 눈치를 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내비쳤다.
“공자님과 오랜만의 외출이라 이것저것 싸왔는데······.”
그녀는 사인가족이 이틀 내내 먹어도 남아돌 만큼 주전부리를 싸왔다. 당과와 육포를 비롯해 전병과 만두까지 아주 없는 것이 없다.
“너나 먹어.”
“헤헤, 그럼 어쩔 수 없이 제가 먹을 게요.”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저거 아무리 봐도 내가 이빨 깨진 거 알고 준비한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당과와 전병은 소혜가 가장 좋아하는 주전부리가 아닌가. 아니나다를까 당과와 전병이 빠르게 사라졌다.
마치 소가주의 고기 흡입을 보는 듯했다.
소혜는 양 볼이 불룩해질 때까지 우겨넣더니 우물거렸다. 전생에 개구리였던 사람처럼 저장 용량이 상상을 초월했다.
‘쯧, 잘하면 오늘 밤 개구리로 환생하시겠어.’
남천휘는 창밖을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런 군산행이라······.’
그 때 소혜가 눈치도 없이 말을 건넸다.
“아! 그거 아세요? 초대 가주셨던 백파도께서 양곡을 매매하셨대요. 그렇게 쌓은 부가 지금의 곡부남가를 만든 거지요. 그처럼 대단한 곳을 구경할 수 있다니 벌써부터 두근거려요.”
아니야. 조상님은 산적이셨단다.
확률을 따지자면 내 보법 숙련도와 비슷할 걸?
아마도 양곡을 사고팔았다기보다 양곡선을 탈취하셨겠지.
‘하지만 소혜의 말이 틀린 건 아니야.’
그만큼 미곡창고는 중요한 장소였다.
소가주의 명은 간단했다.
서찰을 전하고, 창고의 장부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이런 임무는 막 총관이나, 상단의 상인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맡겼다면 다른 의도가 섞였을 터였다.
‘장부를 보면 집안의 재정 상태를 알 수 있지. 이런 중요한 일을 갑자기 왜 맡겼을까?’
소가주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지금껏 집안의 모든 재화를 독차지했던 큰형이 아닌가. 단 한 번도 가문의 재산을 욕심내 본 적이 없기에 작금의 상황이 불편하기만 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이빨이 부러졌어도 연무장이 좋았다.
“공자님! 군산, 군산이예요!”
소혜는 창밖으로 보이는 산을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으이구, 좋단다.
남천휘는 불현 듯 소혜의 불룩한 볼을 잡아당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나 지금 진지해! 필체로 따지자면 해서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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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주께서 연통을 주셨습니다.”
미곡창고는 하나의 장원을 형성할 만큼 거대했다.
한데 그곳을 책임지는 자는 남천휘와 동년배로 보일만큼 젊은 청년이다.
“창고지기인 도준이라 합니다.”
남천휘는 스스로를 창고지기라 낮추는 청년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머리 위의 레벨이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레벨이 40을 훌쩍 넘긴다는 뜻이다.
‘막 총관의 진짜 제자는 여기 있었구만.’
그러니 젊은 나이에 만금의 가치를 지닌 미곡창고를 책임지고 있으리라.
“반갑습니다. 남천휘라고 합니다. 장부는 준비됐나요?”
도준이라는 청년의 일처리는 훌륭했다.
본래 반나절은 걸려야 할 장부 확인을 한 시진 만에 끝낼 수 있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남천휘는 식사를 하자는 도준의 청을 거절하고 미곡창고를 떠났다. 곡부남가의 뿌리임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머무르기가 불편했다.
‘문제는 이건데?’
남천휘는 소가주가 건넨 서찰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서찰의 겉봉에는 북풍표국주인 왕망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왕 국주는 좋은데······.’
북풍표국이 꺼림칙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표국에 있을 놈이 귀찮았다.
“휴, 가자.”
북풍표국은 창고 근처에 위치했다.
정오 무렵임에도 표국의 입구는 드나드는 수레와 마차가 끊이지 않았다. 표국은 곡부남가에 속했으나, 상단과 달리 부지와 건축물이 웅장했다.
남천휘는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미간을 좁혔다.
‘41 레벨, 고수다.’
무인은 언월도를 늘어트린 채 거침없이 남천휘를 향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