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신분 상승.
25, 신분 상승.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
논어에 나오는 말로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스승으로 삼을만한 자가 있다는 뜻이다.
남천휘는 멀어져가는 마차와 수레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없던데?”
그가 혈랑회를 견제하기 위해 남겠다고 했을 때 세 사람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홍춘이는 걱정부터 했다.
혈랑회는 살인도 불사하는 자들이 아닌가.
하나 남천휘의 한 마디에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제가 가장 강합니다.”
그는 한 번 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하들의 목숨을 중히 여기고, 고난을 자처하는 모습에 다시 한 번 대협과 영웅을 떠올렸다.
반면 소대성의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그는 집에 돌아가는 것에 정신이 팔린 듯 고맙다고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물론 그로 인해 소혜의 눈 흘김을 독차지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왕 표국주가 소대성을 보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 수하였다면 이런 중요한 일은 절대 맡기지 않았을 거야.’
오용의 대응 또한 실망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혈랑회보다 스승의 질책이 더 걱정됐나 보다.
아무래도 책임 소재를 가리기 위해 함께 가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제가 결정했다고 하세요.”
남천휘의 호언장담을 듣고 나서야 웃는 오용이었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소혜였다.
“가시면 안 돼요.”
“이거 놔.”
소혜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다시피 했다.
누가 보면 바람난 서방 마음을 돌리는 건 줄 알겠다.
바지 벗겨져! 이것아.
“못 보내요. 제가 마님 얼굴을 어찌 봐요. 공자를 잘 보필하라고 마님께서 신신당부를 하셨다고요. 한데 공자께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마님 얼굴을 어찌 봐요.”
남천휘는 헛웃음을 흘렸다.
“얼씨구! 나도 몇 번 못 보는 우리 엄마 얼굴을 네가 왜 봐. 그냥 나만 보고 살아.”
“네?”
소혜가 잠시 넋을 놓은 사이 몸을 뺄 수 있었다.
남천휘는 이제 시야에서 사라진 행렬을 떠올리며 이마를 긁적였다.
‘뭔가 위험한 발언을 한 것 같기도 한데······.’
하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금은보화가 눈앞에 있거늘 소혜 따위가 문제랴.
“풍악을 울려라!”
호기로운 한 마디에 파진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산길 곳곳에 표식이 내려앉았다.
남천휘는 이제는 눈을 감고도 밟을 수 있는 표식을 하나씩 밟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따라란 따아 따다다다다!”
*
잠시 후 남천휘가 사라진 자리에 십여 명의 무인들이 도착했다.
혈랑회의 선발대인 그들은 표정을 굳혔다.
“마차 자국은 이쪽입니다.”
“발자국 하나가 저쪽으로 향했습니다.”
부회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보법을 익힌 자의 발자국이다.’
그렇다면 곡부남가의 셋째, 남천휘일 수도 있을 터였다.
목표가 행렬에서 이탈했다면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하나 그는 쉬이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왜?’
곡부남가는 혈랑회를 피해 돌아가는 중이다.
그러니 한데 뭉쳐서 이동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천휘가 홀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뭔가 냄새가 나는데······.’
혹자는 혈랑회를 가리켜 피를 갈구하는 늑대, 돈에 미친 전귀(錢鬼)라 평했다. 하지만 혈랑회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계획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움직였다.
한 마디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집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혈랑회의 가장 큰 비밀이기도 했다.
“부회주.”
명령을 기다리는 수하의 목소리.
부회주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결심을 내렸다.
두 사람을 가리켜 곡부남가를 쫓게 했다.
다시 두 사람에게 명하여 본대를 이끌고 오는 회주에게 보냈다.
“나머지는······.”
부회주는 품에서 두 개의 명적(鳴鏑)을 꺼냈다.
작은 화살의 촉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쏘아 올리면 소리가 나는 화살이다.
하나는 비명처럼 날카로운 소리, 다른 하나는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둔중한 소리를 낸다.
‘여차하면 본대를 부를 수 있으니······.’
그는 결심을 한 듯 명을 내렸다.
“나와 함께 발자국을 쫓는다.”
“존명!”
*
“찾았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산 중턱에 위치한 산채의 입구는 교묘하게 감쳐줘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아예 찾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지는 않았다.
가시나무가 얽힌 곳을 지나는 순간 널따란 분지가 그를 반겼다. 서너 채의 전각과 십여 채의 초옥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존재했다.
한데 묘하게 탄 내와 피 냄새가 났다.
혈랑회가 쓸고 지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부채주가 진실을 말한 것도 있군.’
부채주는 혈랑회가 채주와 산적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책임을 미뤘다.
“아무도 없는 건가?”
남천휘는 바위 뒤에 숨어서 한참동안 주변을 살펴봤다.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책 없이 산채를 수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발소리를 감춘 채 조심스럽게 주변을 수색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건물을 살핀 후에야 입꼬리를 올렸다.
산채는 텅 비었다.
남천휘는 손바닥을 비벼대며 히죽거렸다.
“자! 이제 추수의 계절입니다.”
애초에 코딱지만 한 산채였기에 숨길 곳은 제한적이다.
남천휘는 채주가 머물렀던 석조건물로 향했다.
건물의 뒤로 돌아가자 수령(樹齡)을 파악하기 힘들만큼 오래된 나무가 보였다.
‘이게 성황목이군.’
비밀창고는 건물과 성황목(聖荒木) 사이에 있는 가산(假山) 뒤에 위치했다.
남천휘는 가산 뒤로 돌아가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넝쿨로 가려져 있지만, 쇠고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철컹 철컹!
당연히 잠가놨군.
직도를 꺼냈다.
18레벨의 능력치와 특기 ‘도수(刀手)’를 지닌 자의 일격이다.
한낱 쇠붙이가 어찌 버텨내랴.
깡!
보물 창고라 그런지 튼튼한 놈을 썼구나.
죽은 채주의 주도면밀함에 찬사를.
깡! 깡! 깡!
그 순간 경쾌한 파열음이 뇌리를 스쳤다.
◎ 직도의 내구도가 1 하락했습니다.
‘빌어먹을! 채주 새끼!’
남천휘는 직도의 날을 살피다가 울상을 지었다.
깨졌네. 깨졌어.
하나 몇 번의 칼질로 효과를 봤다.
자물쇠의 연결고리가 반쯤 깨져 있었다.
남천휘는 직도를 패용하고 양 손을 쥐락펴락했다.
그리고 쇠사슬을 잡고 잡아당겼다.
‘끄아아아!’
근력 115와 체력 119의 위력이 폭발했다.
쩡!
예상 외로 강한 상대였다.
최소한 부채주를 상대할 때보다 힘을 더 쓴 기분이다.
끼이익!
철문을 여는 순간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 나타났다.
하나 남천휘의 얼굴은 정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찾았다!’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운 금빛과 은빛.
금원보는 십여 개에 불과했지만, 은자는 일견하기에도 족히 수천 냥은 될 듯했다.
남천휘는 금원보를 손에 쥐고 읊조렸다.
‘인벤.’
그 순간 금원보가 사라지며, 인벤토리에 등록했다.
그렇게 금은을 넣은 결과 총 자산이 인벤토리 아래 나타났다.
- 은자 3200 냥.
남천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쓰흡, 이것이 부자가 맡는 세상의 냄새로구나.’
작은 상자를 열었다.
전표(錢票) 수십 장을 찾았다.
‘산적 주제에 전표도 쓰네.’
아마 누군가에게 빼앗았겠지.
어쨌든 황보전장의 직인이 찍혔으니 산동성 어디에서나 은자로 환전이 가능했다.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읊조렸다.
이내 전표 또한 인벤토리에 등록됐다.
- 전표 2000 냥.
- 은자 3200 냥.
어머니, 저는 특급 강호인보다 부자가 먼저 되어버렸어요.
노후는 제가 책임질게요.
‘그러니 건강하세요.’
효도도 했겠다.
남천휘는 마음껏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은자 오천 냥이라면 꽤 넓은 장원을 구매할 정도의 거금이 아닌가.
남천휘는 뿌듯한 표정으로 창고를 살폈다.
돈과 전표를 제외해도 꽤 많은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채주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참 열심히 살았구나. 자식, 애도를 표한다.’
애도와 별개로 모조리 적립했다.
이로서 VIP 포인트는 74점이다.
무기나 영약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하나 혈금채 주제에 어불성설이다.
고수만 보여도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도망치는 게 산적의 현실이었다.
“이제 없나?”
남천휘는 혹시 비밀 공간이 있을까 싶어 벽까지 신중하게 살폈다.
하나 역시 혈금채 주제에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 배부르다.”
남천휘는 포식을 한 사람처럼 배를 두드리며 창고를 나섰다.
보물을 찾았기 때문일까.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성황목이다.
“진짜 오래된 나무네.”
그러고 보니 성황목 앞에는 작은 제단이 존재했다.
산적들이 산채를 나서기 전 산신에게 안위라도 빌었나 보다.
한데 제단 앞에 서는 순간 묘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으으으으.”
마치 귀신이 들러붙은 것처럼 서늘했다.
뭐야 이거?
냉기 저항 수치가 62면 뭘 하나.
이렇게 추운데.
‘도대체 언제쯤 한서불침의 경지에······.’
남천휘는 말끝을 흐렸다.
발아래 예(乂)자 문양이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듯 반짝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울렸다.
◎ X를 밟고 경의(敬意)를 표하십시오.
남천휘는 성황목과 문양을 번갈아봤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한 시도 지루할 틈이 없구만.’
절을 하는 순간 성황목에서 백광이 번뜩였다.
《E 등급 공백지를 발견했습니다.》
《성소를 차지하는 순간 공백지의 주인이 됩니다.》
《새로운 주인으로 등록하시겠습니까?》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백지(空白地)는 텅 빈 산채를 의미했고, 성소(聖所)는 누가 봐도 성황목을 가리켰다.
‘주인이 된다고?’
어차피 산채는 비어 있다.
아무나 터를 잡으면 주인이 될 터였다.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주인과 의미가 다르다.’
그는 본능적으로 성황목에 손을 댔다.
《성소의 동조화 작업이 시작됩니다.》
그 순간 시야 상단에 검은 막대가 생성됐다.
반각 정도 손을 대고 있었을까.
······98, 99, 100.
막대가 완전히 하얗게 변하는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동조화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공백지의 이름을 정해주시겠습니까?》
얼씨구. 갑자기 웬 존댓말?
남천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탄성을 내뱉었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주인 없는 동굴을 지났다.
그곳의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대화동.”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음이 연이었다.
◎ 공백지의 명칭이 대화동으로 등록되었습니다.
◎ E 등급의 영역을 차지했습니다.
◎ 특기 ‘유지(有志)’가 생성되었습니다.
◎ 대화동의 영역에서만 조건부로 발동됩니다.
◎ 대화동의 모든 권한을 이양 받고, 정보와 시야를 공유합니다.
새로운 특기를 활성화됐다.
남천휘는 유지의 공능을 확인하는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야(視野)가 끝 모르게 확장되는 것이 아닌가.
마치 하늘에서 대화동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대화동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에 흰 선이 생성됐다.
그것이 대화동의 경계일 터였다.
“하아. 넓네. 넓어!”
부자가 되고 일각이 지났을 뿐이다.
한데 이제는 땅 부자가 되었다.
'어머니! 저는 지역 유지가 되었어요!'
남천휘는 한참동안 박장대소를 하다가 시야 하단을 살폈다.
처음 보는 목록이 존재했다.
(건축물)(구성원)(물품류)
대화동의 정보와 시야를 공유한다는 의미를 몸소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남천휘는 실소를 흘렸다.
한계를 모르는 재이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늘이시여!’
이리저리 구경을 하는 도중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남 공자.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군사인 제가 설명을 드려도 되겠사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