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34화 (34/305)

24, 다 죽여 버리겠다! (2)

하나 지금 당장 몸을 뺄 여력이 없었다.

어찌됐든 그들은 중평산장과의 거래를 위해 태산을 가로질러야 했다.

‘방법이 없을까?’

그 때 북풍상단의 책임자로 참석한 오용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계약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가야합니다.”

홍춘이와 표두 소대성은 말을 아꼈다.

여전히 혈랑회에 걸렸기 때문이다.

오용은 강경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번 계약만 성사되면 동해와 곡부남가까지 길이 열립니다. 동부의 산물을 중간 유통 없이 가져올 수 있다면 수천금의 이득도 가능합니다. 내년만 생각해도 그 정도입니다. 몇 년이 지난다면 북풍상단은 눈부신 성장을 거듭할 겁니다. 장차 북

풍상단이 산동오대상단에 손꼽힐 장대한 계획이지요.”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오대상단?’

엄청난 자부심을 내비치기에 산동제일 쯤은 되는 줄 알았다. 어쨌든 그에게는 곡부남가와 중평산장의 거래보다 시급한 문제가 있지 않은가.

남천휘는 슬그머니 홍춘이의 소매를 당겼다.

“홍 조장.”

홍춘이는 슬쩍 시선을 맞췄다.

그는 대협의 기상과 영웅의 풍모를 보인 남천휘가 해법이라도 제시해주지 않을까 하는 표정이다.

하나 그의 기대감은 이내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뭐라고요?”

남천휘는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혈금채 위치가 어디냐고요.”

홍춘이는 잠시 실망한 표정을 보였다.

그러나 삼공자의 질문이었기에 성실하게 대꾸했다.

“아까 부채주를 잡은 곳 기억하십니까? 거기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눈에 띄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그 중턱이 산채입니다.”

“오호! 자세히 알고 계시는군요.”

“크흠, 아무리 통행료를 주고받는 사이지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일전에 수하를 풀어 몰래 뒤를 밟았지요.”

남천휘는 홍춘이의 주도면밀함을 칭찬한 후 다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멀지 않네. 하지만······.’

방향이 달랐다.

사절단은 태산을 지나 동쪽에 위치한 중평산장과 만나야 할 터였다. 반면 혈금채는 자신들이 지금껏 지나쳐온 길에 위치했다. 그렇다고 사절단에서 몸을 빼 홀로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혈랑회가 눈에 불을 켜고 사절단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보물이 욕심나도 아랫사람들을 버리고 개인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방법이 없을까?’

하나 지혜 수치가 높다고 해서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 이뤄질 리가 만무했다.

이게 다 혈랑회 때문이다!

‘그 새끼들은 왜 우리를 노려서······.’

한데 생각하다보니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했다.

혈랑회는 곡부남가에 대한 의뢰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어떤 개자식이 의뢰를 한 거지?’

지금껏 혈랑회의 등장에 눈이 멀었던 게다.

남천휘는 좌중을 살폈다.

상단 대표인 오용은 가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반면 표두인 소대성은 오늘 밤 머물기로 한 장평마방에서 무인을 충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 강건한 오용은 소극적인 소대성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크흠! 중평산장과 약속한 날짜가 빠듯합니다. 한가롭게 장평마방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실 겁니까? 혈랑회 따위에 등을 보이는 방파와 누가 계약을 맺겠습니까? 차라리 이번 기회에 혈랑회를 처리할 수 있다면 중평산장과의 거래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홍 조장.”

중간에 낀 홍춘이는 난색을 표했다

“그것이······.”

결국 남천휘가 나섰다.

“잠깐! 지금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시네. 혈랑회가 우리를 노리는 건 기정사실입니다. 그리고 오십 명이라면서요? 이길 수 있습니까?”

홍춘이가 쓴웃음을 흘렸다.

“북풍대는 목숨을 걸고 혈랑회와······.”

못 이긴다는 뜻이군.

“됐고. 소 표두. 그쪽은 어때요? 혈랑회랑 싸워서 표물도 지키고, 상인도 지키면서 이길 수 있습니까?”

소대성은 홍춘이보다 솔직했다.

“저들은 산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 끝이 좋지 못할 겁니다.”

좋아. 둘은 됐다.

남천휘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는 오용을 바라봤다.

“오 선생.”

“삼공자. 설마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엇! 걸렸다.

혈랑회가 문제라면 혈랑회를 만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아니던가.

남천휘는 속내를 숨긴 채 말했다.

“오 선생은 혈랑회 쪽에 의뢰를 한 게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당연히 이번 거래로 손해를 보는 쪽이겠지요. 그게 누굽니까?”

오용은 지금까지와 달리 표정을 굳혔다.

“이번 거래는 중간 유통을 없애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니 동부의 상단이나 표국들이 손해를 보겠지요.”

그 때 홍춘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청도문!”

옳지. 홍춘이 잘한다.

산동삼대세력 중 청도문의 이름이 등장하는 순간 좌중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오용은 분위기를 쇄신하고 싶었는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청도문 정도의 거대방파가 이런 작은 일에 개입하다니요. 그들과 혈랑회는 덩치가 다릅니다.”

“한데 만약 그들이 혈랑회에 의뢰를 넣었다면?”

남천휘의 가설에 오용은 인상을 썼다.

“그건 아닐 겁니다.”

“한데 혈랑회가 애초부터 청도문의 하부조직이라면?”

“억측이십니다.”

“한데 혈랑회가 우리의 예상보다 강하다면?”

“크흠.”

“한데······.”

오용은 남천휘의 연타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손사래를 쳤다.

“공자, 공자. 되었습니다. 알았어요. 알았어.”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째 말을 듣는군.

이래서 공부한 사람들은 대하기 어렵다.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알림이 들려왔다.

◎ 지혜 +500 이상의 문사를 설득했습니다.

◎ 특기 ‘변설(辨說)’이 등록되었습니다.

◎ 타인을 설득할 때 언변과 신뢰가 소폭 상승합니다.

여섯 번째 특기였다.

변설이라면 남을 설득하는 재주일 것이다.

‘헛, 오 선생 때문에 하나 건졌네.’

오용 때문에 짜증났던 마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남천휘는 한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돌아갑시다.”

예상 외로 홍춘이가 대경실색했다.

“삼공자!”

“왜요? 혈랑회와 한판 붙으시게요?”

남천휘의 말에 홍춘이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 또한 그러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 이번 거래는 가주 대리인 소가주께서 총관에게 일임했고, 총관이 직접 수결하여 진행한 사안입니다.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귀가는 곧 계약의 파기였다.

하나 이미 혈금채에 마음을 빼앗긴 남천휘를 막을 명분은 되지 못했다.

“홍 조장. 소 표두. 오 선생.”

남천휘의 부리부리한 눈빛에 세 사람을 꿰뚫을 것처럼 번뜩였다.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곡부남가는 인심과 신뢰를 얻어 여기까지 왔다고요. 곡부남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돈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그리고 소가주는 금붙이의 노예가 아닙니다. 저는 제 형을 믿습니다.”

물론 남천휘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가주나 소가주는 일 년에 두세 차례 얼굴만 보는 사이였다.

그런데 알게 뭐야?

이대로 거래를 감행한다면 혈랑회와 부딪치는 건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을 텐가.

변론의 효과일까?

말에 무게가 있다.

홍춘이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아꼈다.

표두인 소대성은 은인을 만난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마치 십 수 년 간 전쟁터를 떠돌다가 이제야 집에 돌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것 참! 표국주는 저렇게 미덥지 못한 수하를 왜 내보낸 거야?’

한데 오용은 침묵했다.

지혜가 뛰어난 문사였기에 변설의 효과가 제대로 먹히지 않는 듯하다. 아니나다를까 오용은 미련이 남은 한 마디를 건넸다.

“이번 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인데······.”

저 중늙은이가 칼을 안 맞아봤구만.

물론 남천휘도 제대로 맞아본 기억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부채주를 보라.

가슴을 자상을 입고 얼마나 아파했던가.

그러니 남천휘는 오용의 미련을 단칼에 잘라주기로 했다. 지금은 아쉽고, 서운할지언정 진짜 칼에 맞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하나 속내와 달리 목소리는 은근했다.

“오 선생. 그대가 상인으로 삶의 끝을 보려 했다면 굳이 선생이라는 칭호에 얽매이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용은 침음을 흘렸다.

남천휘의 말이 옳다.

그는 한 때 대과를 준비했고, 합격할 자신도 있었다.

다만 쇠락한 집안을 건사하기 위해 꿈을 포기하고 상계에 투신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랫사람들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강요하지 않았던가.

그 때 남천휘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군자는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했습니다. 오 선생께서는 한낱 금붙이를 탐하기 위해 무고한 수하들을 사지로 밀어 넣을 생각입니까?”

오용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장고에 빠졌다.

‘군자는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옳은 말이야. 나 또한 군자를 꿈꿨거늘······.’

우습게도 아쉬움이 깊어질수록 미련은 잦아들었다.

“삼공자.”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자식뻘인 남천휘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며 공수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학사 오용은 오늘 삼공자로 인해 혼미했던 정신이 맑아지는 듯합니다. 잠시 금붙이를 늘리는 것에 취해 본분을 잊었으니 하늘 아래 부끄러움을 피할 길이 없소이다. 하나 다행히 귀인을 만나······.”

남천휘는 어색하게 웃었다.

길다. 길어.

누구 제자 아니랄까봐 고맙다는 한 마디로 끝날 감사를 질리도록 하는구나.

막 총관, 축하해요.

당신 제자는 참 당신을 닮았구려.

누가 보면 부자지간으로 알겠네.

한데 오용의 표정이 묘했다.

눈빛은 맑고, 깊다.

고집스런 입매는 부드럽게 풀려 호선을 그렸다.

한 순간 인상이 변한 듯했다.

마치 아주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말이다.

‘허허, 지혜 수치가 100은 오른 사람 같네.’

이것은 남천휘만의 느낌은 아니었나 보다.

홍춘이와 소대성은 양손을 맞잡고 흔들며 오용의 깨달음을 축하했다. 그리고 오용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이것들이 나만 빼놓고 뭐하는 짓이야?

변설을 얻고 좋았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빌어먹을! 나도 깨닫고 싶다.’

*

혈랑회주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태산의 산세를 즐겼다.

“회주. 준비가 끝났습니다.”

수하는 함정의 위치가 그려진 두루마리를 회주에게 건넸다. 혈랑회는 장평마방부터 태산의 중심부까지 함정을 수십 개나 설치했다. 덫과 딱따기를 비롯해 곡부남가의 사절단을 괴롭히기에 충분할 터였다.

“클클, 하루라도 버티면 용하겠군.”

그는 두루마리를 챙긴 채 부회주를 향해 손짓했다.

“곡부남가는?”

“혈랑회의 존재를 알렸으니 지금쯤 회의를 하느라 여념이 없을 겁니다.”

두 사람은 조소를 흘렸다.

어떤 회의를 하더라도 곡부남가는 태산으로 향할 것이다. 강호인이라는 족속이 원래 그렇다. 함정인 줄 알면서도 의협과 이권, 명예처럼 덧없는 것에 홀려 달려들지 않던가. 지금껏 수많은 의뢰를 수행하면서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다.

“가장 중요한 건 목숨이야. 그걸 모르는 놈들은 단명하는 법이지.”

회주의 만족스런 웃음에 부회주도 호응했다.

“미끼를 물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중평산장과의 거래는 오랫동안 준비했으니까요.”

“쥐새끼가 궁지에 몰리는 꼴을 구경이나 해볼까.”

그는 언덕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곳에 첫 함정이 설치됐다.

놈들 중 두엇이 함정에 빠진 채 허우적댈 것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 때 혈랑회의 수하가 구르다시피하며 달려왔다.

“저 새끼는 뭐하냐? 얼씨구. 넘어지네.”

잠시 후 흙투성이가 된 수하가 부복했다.

“회, 회주. 큰일! 큰일입니다.”

부회주는 회주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수하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이 새끼야! 똑바로 얘기해.”

한데 수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발악을 하듯 외쳤다.

“곡부남가 새끼들이 돌아갑니다.”

부회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 돌아가? 왜!”

“모르겠습니다. 짐을 꾸리더니 곡부남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부회주는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사람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말도 안 돼. 수만금이 걸린 일이거늘. 혈랑회의 이름만 듣고 도망쳤다고? 배포도 없는 겁쟁이 새끼들!”

평소였다면 명성을 높였다며 기뻐했으리라.

하나 부회주는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회주는 더더욱 원하지 않았을 터였다.

“뭣이 중한지도 모르는 놈들은 매가 약이다!”

부회주는 당장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기다릴 때가 아니라 쫓을 때였다.

“다 죽여 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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