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산적은 좋은 영양분이지요.
23, 산적은 좋은 영양분이지요.
남천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후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혜의 부릅뜬 눈을 보고 있자니 저러다 눈알이 빠지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떨쳐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혜는 다시 산동성의 정보가 담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평산장에서 주의해야 할 사람은······.”
하나 남천휘는 소혜의 보고를 귓등으로 흘렸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무인들의 머리 위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십사, 십칠, 홍 조장은 이십일 레벨이군.’
특기에 등록된 신안(神眼)의 힘이다.
예전에는 5레벨이 한계였지만, 지금은 20레벨 차이까지는 확인이 가능했다.
‘예상외네.’
사절단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사람은 예상 외로 북풍상단에서 파견된 상인이다. 듣기로는 중평산장과의 거래에서 실무를 담당할 상인이란다.
막 총관의 제자로 알려진 상인의 레벨은 무려 35였다. 북풍산당에서 파견한 표두도, 낭인 중에서도 그보다 레벨이 높은 자는 없었다.
‘지혜 수치에 쏟아 부었겠군.’
그러고 보면 막 총관의 레벨도 두 자리이기는 했다.
곡부남가와 북풍상단은 물론이고, 다루와 객잔까지 관리하면서 술까지 마시는 것으로 보아 50은 그냥 넘기지 않을까 싶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소혜의 일침.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할게!”
내용은 모르겠고, 중요하다는 말만 기억했다.
소혜는 그것도 모르고 신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듣다 보니 소혜의 목소리가 의외로 좋구나.
개굴개굴.
남천휘는 소혜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안 돼. 이렇게 잠들 수는 없어.
첫 여행, 아니 첫 강호행이란 말이다!
남천휘는 창밖으로 고개를 빼고 홍춘이를 향해 외쳤다.
“홍 조장! 산적은 언제 나와요?”
*
산동성 중부에 위치한 태산(泰山).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넘긴 장년인이 태산의 초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치가 좋군.”
장년인의 등 뒤에는 오십 명의 무인들이 저마다 무리를 지어 대기했다.
하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날 선 기세를 양껏 뿜어내며 저들끼리 이빨을 드러낼 뿐이다. 피처럼 붉은 무복을 제외하면 어느 것 하나 어우러지지 못하는 자들이다.
잠시 후 장년인의 곁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회주, 의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장년인은 미간을 좁혔다.
“나는 변수가 싫다.”
칼날 위에 발을 올리고 칼춤을 추며 사는 자였기에 변수란 곧 죽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것이라 여겼다.
사내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며 말을 이었다.
“남천홍이 아니라 남천휘가 사절단에 동행했습니다.”
“남천휘?”
“가주 남운군의 셋째 아들입니다.”
장년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오십여 명의 무인들은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장년인을 응시했다.
“부회주.”
사내는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경청하겠습니다.”
“우리의 의뢰가 뭐였더냐?”
“사절단에 섞인 곡부남가의 직계를 죽여 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절단에 직계가 없어?”
사내는 잠시 머뭇거렸다.
의뢰자의 의도는 누가 봐도 남천홍을 처리해달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나 장년인은 고강한 무위와 달리 인내심이 부족했다. 자칫 밉보였다가는 당장 머리통이 쪼개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있습니다.”
“그럼 됐잖아.”
장년인은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듯 수하들을 바라봤다.
“우리가 누구냐?”
오십여 명이 일제히 외쳤다.
“혈랑회입니다.”
“그래, 우리는 돈을 받고, 피를 빠는 혈랑회다. 놈들의 목적이나 이권은 상관없어. 그저 돈을 받고, 돈값만 하면 되는 거야.”
“회주의 말이 옳습니다.”
“남천홍이든, 남천휘든 한 놈만 죽이면 된다. 그게 어려워?”
“아닙니다!”
혈랑회주가 살기를 드러냈다.
“중요한 건 이거 하나다.”
서늘한 한 마디가 이어졌다.
“우리가 남천휘를 죽인다.”
오십여 명의 무인들은 회주처럼 살기를 드러냈다.
혈랑회주는 그제야 만족한 듯 혈소를 지었다.
“부회주, 미끼를 풀어라. 간을 본다.”
부회주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존명! 혈금채를 내보겠습니다.”
*
마차가 섰다.
남천휘는 도망치려는 수마(睡魔)를 부여잡은 채 중얼거렸다.
“아! 뭐야?”
소혜는 주인을 따라 꾸벅꾸벅 졸다가 창밖을 바라봤다. 흉흉한 외모의 사내들이 사절단을 막아선 것이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내민 것보다 빠르게 마차 안으로 구르듯 들어섰다.
“산적, 산적, 산적!”
남천휘는 졸음을 걷어찼다.
그리고 황급히 창밖을 살폈다.
사절단을 막아선 자들은 짐승의 가죽을 두르고, 싸구려 박도를 겨눴다. 그리고 머리에는 피에 절었는지 때에 절었는지 원래의 색을 알 수 없는 천까지 뒤집어썼다.
남천휘는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왔구나!”
*
산적이다.
산동성에서 보기 힘든 산적을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칠, 구, 십일, 십삼, 육, 십.’
저(低) 레벨로 다양하게 모였다.
잘하면 레벨 별로 한 명씩 쓰러트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못생긴 순으로 서른한 명을 골라 먹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아! 물론 경험치를 먹는다는 뜻이다.
하나 남천휘의 앞길을 홍춘이가 막아섰다.
“삼공자, 진정하세요.”
그는 산적이 나타났음에도 여유로웠다.
“혈금채는 적당한 통행료만 받고 알아서 비킬 겁니다.”
남천휘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흥이 식었다.
산동성이 다른 곳보다 평화롭다고 해도 강자와 약자의 논리가 존재했다.
강자는 가졌고, 약자는 빼앗겼다.
결국 약자는 터전에서 밀려나 산으로 강으로 옮겨가야 했다. 그들은 산적이 됐고, 수적이 되어 약탈을 일삼았다.
애초에 양민이었던 자들이다.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는가.
중소방파 몇 곳만 모여도 산적이나 수적을 섬멸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나 그들은 산적과 수적을 못 본 척했다.
어차피 공을 들여 섬멸해봤자, 며칠 지나면 다른 놈들이 산채를 꾸릴 것이 뻔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적당한 통행료를 주고받으며 공생하는 편이 나았다.
아마 혈금채(血金寨)도 북풍상단이나 북풍표국과 몇 번이나 거래를 한 듯했다.
‘산채 이름만 겁나 살벌하네.’
홍춘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협의의 중요성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강호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부조리하고, 위선적으로 보여도 어느 정도는 감안해야 하지요. 거 뭐냐? 필요악이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편히 갈 수 있다면 나쁠 건 없지요. 대신 산채 이름은 좀 어울리게 바꿨으면 좋겠네요.”
홍춘이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이것 또한 경험이니 한 번 보시겠습니까?”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경험이라는 말에 불현 듯 막 총관과의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아무래도 홍춘이의 언행에는 막 총관의 입김이 어렸을 것이다.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듣게 하라는 막 총관의 말에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하나 나쁠 건 없다.
‘공짜 수업이라고 치자.’
특급 강호인이 되려면 뭐든 겪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북풍표국에서 나온 표사가 산적의 대표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냥 돈만 건네주는 것보다 잠깐의 대화로 친분을 다지는 듯했다.
한 푼이라도 깎겠다는 대원의 의지에 박수를.
“오늘은 채주가 아니라 부채주가 나섰군요. 그럼 급이 맞는 사람이 나서줘야지요.”
홍춘이는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크흠, 제가 가서 몇 마디 하면 바로 물러설 겁니다.”
이게 뭐라고 거들먹거리시나.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고성이 오갔고, 칼을 뽑는다.
“어?”
그 순간 혈금채의 부채주라는 자가 대뜸 박도를 쳐올렸다.
촤악!
피륙이 갈리는 불쾌한 소음.
동시에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슨했던 분위기가 한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다.
홍춘이는 부채주가 칼을 뽑는 순간 이미 달리고 있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한 것이다.
쇄애애액!
한데 그 순간 누군가 홍춘이를 스쳐갔다.
‘삼공자?’
남천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달렸기에 느릿했다. 하나 상체와 달리 하체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미그러지듯 쭉쭉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빨라!’
역시 부대주를 이긴 고수답다.
그 때 남천휘의 일갈이 들려왔다.
“야! 이 혈금채 새끼들아.”
순순히 경험치가 되어라!
그 말은 입안을 맴돌았다.
‘왠지 너무 속물 같잖아.’
하나 북풍대원들은 마치 냉수를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을 번쩍 차렸다. 갑작스런 칼부림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씻겨내러가는 듯했다.
불문의 사자후라는 것이 저런 것일까?
협객, 또는 영웅의 신념이 담긴 듯한 일갈은 홍춘이조차 평정심을 되찾게 만들었다.
“방진을 펼쳐라! 상인과 수레를 지켜!”
뒤늦게 북풍표국의 표사들과 낭인들이 수레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홍춘이는 그것을 확인하고 남천휘의 뒤를 쫓았다.
“삼공자! 위험합니다!”
하나 남천휘는 속도를 더욱 올렸다.
육포는 나눠먹어도 경험치는 나눠 먹을 수 없지.
때마침 두 명의 산적이 앞을 막았다.
레벨은 각기 7과 11.
초식도 필요 없다.
“꺼져라!”
남천휘는 쇄도하는 박도를 향해 오히려 상체를 들이댔다. 하나 박도는 어정쩡한 공간을 스쳐갔고, 그 빈 곳을 직도가 차지했다.
도갑에서 뽑지도 않은 채 올려쳤다.
콰직!
7 레벨의 턱이 아작 났다.
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뒤로 쓰러졌다.
그 사이 남천휘의 두 다리는 방향을 바꿨고, 직도는 그대로 11레벨의 아랫배를 후려쳤다.
콰드득!
너는 갈비뼈로구나.
그 때 기분 좋은 알림이 들려왔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그렇지! 이제 16레벨이다.
겨우 두 명을 쓰러트리고 레벨 업이라니.
역시 실전이 최고다!
강호만만세다.
남천휘는 그 사이 쓰러진 북풍대원을 힐끔 확인했다. 다행히 정면으로 베인 것이 아니라 어깨 쪽을 베였다.
으으, 그래도 아프겠다.
자신도 모르게 한순간 몸을 움츠렸다.
한데 그 때 예기치 못한 알림이 들려왔다.
◎ 특기 ‘불굴(不屈)’이 발동됩니다.
- 평정심과 투쟁심이 소폭 상승합니다.
이건 또 뭐야?
특기는 비활성 능력이기에 그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발동된다고 했다.
한데 ‘불굴’만은 달랐다.
‘좋은 거야? 나쁜 거야?’
피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좋은 쪽인 듯했다.
에라, 모르겠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답은 레벨 업이다.
남천휘는 길을 막는 산적들을 모조리 두들겨 팼다.
퍽! 빠각! 퍽! 퍽!
오행군림보는 참으로 대단한 보법이로구나.
바짝 붙은 두 놈 사이로 파고드는 것이 가능했고, 자세로 인해 어떤 공격에도 대응할 수 있었다.
스릉-
남천휘는 직도가 도갑에서 빠지려하자 황급히 넣어버렸다. 굳이 직도를 뽑아서 싸울 필요가 없었고, 내구도도 걱정됐기 때문이다.
‘내구도! 확인!’
《벽추가 선물한 직도》
- 진짜 도, 베이면 피가 난다.(가치:7)
- 부가기능 : 벽추의 호감도 +10.
- 내구도 (10/20)
있으나마나한 부가기능은 신경 쓰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