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4화 (24/305)

17, 동상이몽(同床異夢).

17, 동상이몽(同床異夢).

남천홍은 늦은 밤까지 집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곡부남가를 관리하고, 상단까지 운영해야 했다.

그렇기에 삼경이 가까워졌음에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보고서를 처리하고 있었다. 뛰어난 상재를 지녔다는 평처럼 빠르게 보고서가 처리됐다.

아그작.

물론 그의 손이 입으로 향할 때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과자의 양도 눈에 띄게 줄었다.

“쯧.”

신경질적인 한 마디와 함께 서류가 찢겼다.

그가 두툼한 보료에 기대는 순간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식 치고는 너무 많군.”

총관인 막대통이 술병을 흔들며 들어섰다.

남천홍은 피식 웃으며 술잔을 꺼냈다.

“주무실 때가 지났습니다만.”

“늙으면 원래 잠이 없다네.”

“겨우 반 시진 지났습니다.”

막대통은 혀를 차며 술을 비웠다.

“쯧쯧, 그냥 그렇다고 해. 한데 우리 소가주께서 어찌 이리 심기가 불편하실까?”

남천홍은 술잔을 꺾은 후 다시 보고서에 집중했다.

하나 막대통은 남천홍의 심기와 상관없이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중평산장과 북풍상단의 거래는 만금의 가치를 지녔다네. 현재 동해의 물산을 곡부까지 가져오려면 닷새가 걸려. 하나 중평산장의 영역을 통과하면 삼일이지. 그러니 중평산장과의 거래는 반드시 성사되어야 하네.”

“알고 있습니다.”

낮부터 회의하던 안건이니 모를 리 없다.

하나 남천홍의 눈매는 더욱 가늘어졌다.

가뜩이나 눈꺼풀이 내려앉을 만큼 비대한 체구가 아닌가. 그렇기에 아예 눈을 감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거래할 겁니다.”

막대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해야 해. 한데 거래를 하려면 저들의 조건을 들어줘야 하네.”

“······.”

남천홍은 표정을 굳혔다.

막대통은 남천홍을 달래듯 말을 이었다.

“이율을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무릎을 꿇으라는 것도 아니야. 그저 계약을 할 때 곡부남가의 직계가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들의 조건일세. 이것이 과한가?”

전혀 과하지 않다.

중평산장은 곡부남가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명망 높은 방파였다. 그렇기에 이번 계약을 통해 곡부남가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싶었으리라.

그걸 위해 직계의 참석을 요구한 것이다.

물론 저쪽에서도 직계를 참석시킬 터였다.

“제가 참석하면 되는 일입니다.”

남천홍의 말에 막대통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곡부남가와 북풍상단, 심지어 북풍표국까지 모두 자네의 손을 거쳐야 일처리가 된다네. 자네가 그리 만들었잖은가.”

“네, 제가 곡부남가의 핵심이니까요.”

“클클, 그런데 자네가 오가는 데에만 칠주야가 걸리는 곳에 가겠다고? 그럼 그 사이에 일은 누가 하나? 게다가 곧 연초야. 한 해의 사업목표를 정하고, 계획하려면 한 시가 부족한 시점이지. 그렇기에 자네가 이 늦은 시간까지 서류를 붙잡고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

막대통은 장난기를 지웠다.

“천홍아.”

남천홍은 한 숨을 내쉬었다.

북풍표국의 왕망은 의숙이지만, 수십 년을 함께한 막대통은 집안의 어른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노야.”

“천휘를 보내자.”

“안 됩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는 한 마디.

남천홍은 언제 피곤해했냐는 듯 눈을 부릅뜬 채 강렬한 안광을 발산했다.

“저는 천휘를 세가 밖으로 보낼 생각이 없습니다.”

막대통은 그 모습에 혀를 찼다.

“쯧쯧, 하여간 돼지처럼 뒤룩뒤룩 살만 쪄서 욕심은 더럽게 많아요. 천휘가 후계 구도에 끼어드는 것이 못 마땅하느냐?”

남천홍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한데 막대통은 날 선 질책을 쏟아 붓더니 이내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은 거지. 안 그런가?”

남천홍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막대통은 인상을 쓴 채 과자가 가득 담긴 접시를 내던졌다.

“다른 건 몰라도 네가 천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잘 알고 있지. 그리고 네가 이 달기만 한 과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남천홍은 화를 내는 대신 보고서만 바라봤다.

“너 혼자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을 먹는 게 식탐 때문이더냐? 아니면 권력욕 때문이더냐?”

“······.”

“사실은 책이나 읽으면서 뒹굴 거리고 싶은 게 네 진심이잖아.”

진실이 화살비처럼 쏟아진다.

남천홍은 고슴도치가 됐음에도 고개를 숙인 채 가쁜 숨만 이어갔다. 막대통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씩씩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어리석은 놈! 십 년 전의 기억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게냐?

“······.”

“천휘가 납치당한 건 네 탓이 아니야. 그냥 운이 없었던 거다. 놈들이 원한 건 곡부남가의 돈이었고, 때마침 천휘가 보였을 뿐이라고. 한데 언제까지 동생이 납치당한 걸 네 탓으로 돌릴 셈이냐?”

남천홍은 십 년 전의 일을 떠올리자 인상을 썼다.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렸다.

“제 탓이 맞습니다. 그 날 녀석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도 저였고, 심부름 시킨 것을 잊고 놀러다닌 것도 저였습니다. 그러니 천휘는 저 때문에 죽을 뻔한 겁니다.”

막대통은 헛웃음을 지었다.

남천홍은 기이한 열망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러니 천휘는 이제 제가 지킵니다. 곡부남가에 있는 한 누구도 천휘를 못 건드려요. 누군가 곡부남가를 노린다면 저를 노리겠지요. 그러니 제가 버티고 있는 한 천휘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막대통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남천홍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대뜸 뒤통수를 후려쳤다.

빡!

“아악, 뭐하시는 겁니까?”

남천홍은 머리를 움켜쥔 채 앓는 소리를 냈다.

“정신 차려라. 멍청한 놈아! 네 동생이 무슨 집에서 키우는 개냐? 뭘 지켜? 장성해서 혼처를 알아봐야 할 나이거늘 아직도 애 취급인 거냐?”

막대통의 질책에 남천홍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노야도 아시잖습니까?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데요. 곡부 주변이야 평화롭다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산적에 수적에, 해적에, 사파에, 마교에,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단 말입니다. 천휘가 행여 곡부 밖으로 나갔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제가 과잉보호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만! 나도 그리 여겼기에 네 되도 않는 기행을 그냥 뒀다. 한데 그 아이는 이제 너보다 강해. 어쩌면 조상의 말처럼 진짜 천재일 수도 있지.”

남천홍은 그제야 제 나이에 보일법한 불만 섞인 표정을 보였다.

“쳇! 제가 좋은 스승을 구해주면 됩니다. 연무장도 넓혀줄 겁니다. 영약도 살 수 있어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단다. 방구석에서 견문을 어찌 넓히고, 어찌 호연지기를 기르겠느냐. 네 동생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 거야?”

“그럴 리 있겠습니까. 나중에 기회를 봐서······.”

쾅!

막대통이 탁자를 후려쳤다.

“지금이 그 때야! 현재 중평산장에 보내기로 한 사람들이 몇이더냐?”

“수레 열 대 분량의 상품을 관리할 상인 다섯 명과 물건을 지킬 쟁자수 스무 명에 표사 열 명, 거기에 북풍표국의 표두가 책임자로 따라갈 겁니다. 그리고 북풍대에서도 홍 조장과 조원들이 합류하겠지요.”

“벌써 오십 명이다. 그리고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낭인까지 열 명이나 고용하지 않았더냐. 그럼 육십이군. 천휘는 가서 얼굴만 비치고 오면 돼.”

남천홍은 여전히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막대통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보내줘. 네가 정녕 권력욕에 찌들어 동생의 앞길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남천홍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버릇처럼 먹어대던 음식마저 끊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가쁜 호흡이 안정적으로 변했을 무렵 조금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막대통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남천홍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생각했다.”

“그런데 제가 명색이 소가주인데 뒤통수를 막 때리고 그려서도 되는 겁니까?”

장난기 섞인 물음.

답 또한 정상적이지는 않았다.

“네 아버지도 한 번 맞은 적이 있단다. 네 어머니가 너무 과분하다며 물러서려 할 때였지. 그 때 노부가 엉덩이를 차버렸지.”

남천홍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노야의 말을 들어야 행복해지는군요.”

막대통은 거드름을 피웠다.

“아무렴!”

남천홍은 담담한 어조로 감사를 표했다.

“제 아집을 깨주셔서 감사합니다.”

“클클, 형제끼리는 다 그렇게 싸우면서 크는 거야.”

하나 소가주를 등진 채 떠나는 막대통의 표정은 목석처럼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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