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풍악을 울려라.
14, 풍악을 울려라.
‘추워.’
이불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 여겼는데.
텅 빈 방안은 마치 냉골처럼 싸늘했다.
‘침상이라도 남겨 놓을 걸 그랬나?’
굼벵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청했지만, 한 번 춥다고 생각한 이후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아우!”
남천휘는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났다.
추위도 추위지만, 저녁에 마주했던 소혜의 눈빛이 뇌리에 선연했다.
연민으로 가득했던 눈빛.
비에 젖은 강아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입단속은 해뒀으니 소문은 나지 않을 테고.
‘아니야.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주지시켜야겠어.’
가만히 있으니 더 춥다.
남천휘는 결국 소혜가 가져다놓은 새 옷을 걸쳤다.
그러던 중 자신도 모르게 엄지와 검지로 옷자락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화들짝 놀라야 했다.
‘맙소사!’
도박에 빠지면 기둥뿌리가 날아가는 것도 모른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다.
‘정신 차리자.’
남천휘는 자신의 뺨을 후려치며 결의를 다졌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더니 그냥 아프기만 했다.
대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게다가 더 이상 적립할 거리도 없지 않은가.
남천휘는 텅 빈 방안의 광경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남은 거라고는······.’
방 입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직도가 전부였다.
아! 하나가 더 있구나.
상태창을 펼쳤다.
무공에 등록된 오행군림보의 설명이 변경됐다.
《오행군림보》
- 공간을 선점하는 패도(覇道)적인 보법.
- 내공의 소모가 극심할수록 위력을 발휘함.
- 4급 성장형 (기본 단계 진행 중)
- 숙련도(0/100). (가치 : 200)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짓게 된다.
오행군림보의 추정 가치는 800이다.
그러니 산술적으로 봤을 때 100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한데 예상을 뛰어넘는 수치가 등록됐다.
‘이백이라니.’
이것이 소혜에게 수치스런 모습을 들켰음에도 웃을 수 있는 이유였다.
◎ 기본 모드로 수련이 가능합니다.
◎ 오행군림보를 수련하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벌써 삼경이 지났구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으니 한 시진의 수련 또한 가능할 터였다.
남천휘는 황량한 방안을 보며 히죽 웃었다.
‘개인 수련장같은 걸?’
애써 위로해봤지만, 여전히 방안은 썰렁했다.
이럴 때에는 수련이 제격이다.
‘수련이 제격이라니······. 내가 한 말이지만, 방금은 조금 멋졌어.’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방 한 구석에 나뒹굴고 있는 서책을 주웠다. 다섯 권의 책을 ※로 놓는 순간 누군가 신명나는 목소리로 무무혁명을 외쳤다.
지잉-
서책 위에 반투명한 표식이 내려앉았다.
이제 눈앞에 화살표처럼 생긴 표식이 나타나며 수련이 시작될 터였다.
《오행군림보의 기본 모드가 실행됩니다.》
《해당 모드와 어울리는 음악을 검색합니다.》
남천휘는 표식 대신 의미를 알 수 없는 알림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음악을 검색해?’
하나 시야 상단에 생긴 검은색 막대를 보아하니 이번에도 기다려야 할 듯했다.
다행히 긴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해당 모드와 어울리는 음악은 파진악입니다.》
《보법의 표식과 동조율은 96%입니다.》
《파진악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숙련도도 상승합니다.》
-> 파진악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 과정보다는 결말, 지금 당장 수련을 시작한다.
파진악(破陣樂)이라.
어디선가 들어봤던 기억이 있기는 했다.
생각 같아서야 당장 수련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숙련도에 영향을 끼친다는 어쩔 수 없다.
‘파진악이 뭔데?’
◎ 당 태종 이세민이 유무주를 격파한 전공을 내용으로 삼아 만들어진 당악(唐樂)의 한 부류로 웅장하고 화려한······.
‘외조부의 회갑연 때 악사들이 연주했던 곡이군.’
당시 어린 아이의 눈으로 봤을 때에도 수십 명의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백여 명의 무희들이 춤을 췄으니 웅장해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쩡-
대답 대신 징이 울렸다.
집채 만한 징을 두들긴 듯 엄청난 소리가 귀를 강타했다.
‘어떤 미친놈이 야밤에 징을 쳐?’
한데 재이의 무덤덤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 파진악이 연주됩니다.
‘연주?’
그 순간 수많은 사방에서 수십 개의 악기 소리가 뒤섞인 채 연주가 시작됐다.
‘이 야밤에?’
아! 당연히 내 귀에만 들리겠군.
재이의 설명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연주였다.
시작부터 수많은 검이 부딪치며 만들어낸 기음이 꽂혀들었고, 군마가 내달리는 듯한 굉음이 혼백을 사로잡았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 명의 영웅이 전장을 돌파하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너무 산만하지 않나?’
이미 초심 단계부터 눈으로는 전방의 표식을 살펴야 했고, 발로는 바닥의 청석을 밟아야 했다.
거기에 당악(唐樂)까지 추가된 셈이다.
‘그나저나 연주는 엄청 잘하네. 천상의 선녀들이라도 동원한 거냐?’
대답 대신 전방에 시작 시기를 알리는 숫자가 표시됐다.
4, 3, 2, 1.
‘좋아! 전 재산을 투자해서 승급했다. 제대로 수련해주겠어!’
동시에 표식이 두둥실 떠올랐다.
“어?”
예전과 달리 두 개의 표식이 등장했다.
그리고 남천휘가 눈을 끔뻑이는 사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하늘로 흩어졌다. 보법의 실패를 알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연이었다.
“야!”
이번에는 좌우를 동시에 가리키는 화살표가 등장했다. 그것 또한 빠르게 시선을 사로잡았다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전 재산을 털어 넣은 기본 모드의 첫 수련이 끝났다.
◎ 성공률 : 0%. 정확도 : 0%
◎ 합계 등급은 ‘F’ 등급입니다.
◎ 기본은 초심에 비해 난이도와 속도가 두 배입니다. 속도에 유의하여 성공률과 정확도를 올리세요.
그러게. 올라가는 속도가 초심에 비해서 두 배네.
이번에도 선 조치, 후 보고로구나.
‘정보 수집은 그렇게 잘 하면서 습득은 못하냐?’
대답이 없다.
이건 저 불리할 때만 침묵하네.
◎ 파진악이 연주됩니다.
더 할 말도 없는데 수련이나 하자.
‘후우.’
남천휘는 두 개의 표식이 등장하는 순간 능숙하게 발을 놀렸다. 전후좌우 중 전좌(前左)에 놓인 두 권의 책을 동시에 밟았다.
따라랑!
좋아, 완벽(完璧)이다!
‘점수 좀 올랐겠는 걸?’
하나 표식은 기뻐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전후(前後), 좌후(左後), 우후(右後), 좌우(左右)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남천휘의 발은 꼬였고, 이내 책을 제대로 밟지도 못했다.
결국 어설프게 책을 밟고,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악!”
어제 부딪쳤던 꼬리뼈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머리끝까지 퍼져나갔다.
남천휘는 한손으로 입을 막고, 한 손으로 엉덩이를 잡은 채 부르르 떨었다.
‘야밤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그 때 방 밖에서 소혜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아마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찾아온 듯했다.
남천휘가 문을 열자, 소혜가 커다란 보자기를 내밀었다.
“오늘은 바람이 더 차요. 이불을 몇 겹 더 덮으셔야 할 것 같아서요.”
아! 이렇게 착한 아이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재이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느꼈던 자괴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소혜야. 미안해.”
소혜는 특유의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야심한 밤에 삼공자가 울상을 한 채 사과하는 광경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듯하다.
“뭐, 뭐가요?”
“아무리 장난이라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건데.”
남천휘의 진지한 한 마디에 소혜는 헤죽 웃었다.
“괜찮아요. 언니들도 저한테 개구리 닮았다고 하는 걸요.”
‘미안한 건 그게 아닌데.’
개구리 닮았다고 한 건 진심이야.
남천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내가 개구리라고 한 걸 어떻게 알아?”
“몇 번이나 혼잣말로 하시던 걸요. 개구리를 닮아 슬픈 소혜라고. 그 말 하실 때 표정이 엄청 웃겨요. 헤헤.”
그녀는 이부자리까지 살펴본 후에야 자리를 떴다.
남천휘는 이마를 긁적이며 한 숨을 흘렸다.
‘내가 언제부터 생각을 입 밖으로 얘기하고 다닌 거지. 그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일부러 미친놈 흉내를 내고 다닌 게 효과를 봤네.’
정상인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듯하여 살짝 슬펐다.
◎ 파진악이 연주됩니다.
‘아! 소혜가 갈 때까지 기다려준 거냐?’
아니다.
시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르고 있었다.
쩡-
*
며칠 후 남천휘는 보무도 당당하게 연무장에 섰다.
입꼬리를 올린 채 나직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박자 줘봐. 소리 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