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현질의 끝은.
13, 현질의 끝은.
아니다! 이 악마야.
너는 천상이 아니라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아귀 같은 존재였구나.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욕을 퍼부었을까.
시간의 흐름을 알리듯 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각혈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렇다면 드디어 ‘피를 토하는 심경’이 완성됐다.
봤냐? 내가 이렇게 화가 났다고!
“후우.”
남천휘는 오늘에야 깨달았다.
‘내가 욕을 이렇게 잘했구나.’
지혜가 상승했기 때문일까.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욕설이 그대로 구현됐다.
그러니까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욕을 했겠지.
하지만 이딴 기능은 집어치우고, 승급이나 시켜달란 말이다.
승급 생각하니까 또 머리에 피가 쏠렸다.
‘빌어먹을! 뭐? VIP 포인트?’
그딴 게 없으면 승급을 못한다니.
근래에 들어본 개소리 중에서 최고였다.
응! 그래, 너 최고. 네가 제일 쓰레기 같이 최고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좀 해봐!’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물론 변명은 아니었다.
◎ 부정한 언어사용으로 인해 성향이 중립으로······.
후훗, 처음부터 네게 사과는 기대하지 않았지.
그럼 이어서 화를 내볼까.
꽈드득!
남천휘는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코딱지만한 내공까지 담아서 외쳤다.
근처를 지나던 하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도망쳤을 만큼 우렁찬 일갈이었다.
‘전에 상태창 편집할 수 있다고 했지?’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상태창을 띄웠다.
그리고 ‘조건부 선’에서 ‘중립’으로 바뀐 성향란을 아예 지워버렸다.
지우는 것도 참 쉽다.
목표 위에 손가락을 대고 옆으로 그어버리면 쉭 하고 사라졌다.
‘아! 그래도 분이 안 풀리네.’
아무리 화가 났어도 등급과 호칭, 능력치를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만만한 조화를 골랐다.
상태창을 편집하는 것이 마치 곱게 단장한 재이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 조화 : 균형적(60)
응, 너도 사라져.
성향에 이어 조화까지 사라진 덕에 상태창은 훨씬 깔끔했다.
《남천휘(南天輝)》
- 소속 : 곡부남가(曲阜南家)
- 호칭 : 신사의 품격
- 별호 : 없음
- 등급 : 9
- VIP : 1등급(잔여 점수 :0)
근력(筋力) : 77. 민첩(敏捷) : 70.
체력(體力) : 80. 지혜(知慧) : 60.
내공(內功) : 64.
- 미 배분 능력치(+0)
아! 저 빌어먹을 VIP 점수.
오행군림보의 숙련도를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능력치를 올렸던가.
20일 남짓한 기간 동안 3할 이상을 끌어올렸다.
그만큼 오행군림보의 초심 단계를 마무리하고 싶은 열망이 강렬했다. 한데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잔여 점수 빵점이라는 한 줄의 문구가 전부였다.
‘이번만 봐준다. 알겠냐?’
사실 아쉬운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은근슬쩍 한 마디를 보탰다.
‘다 잘해보자는 의미에서 한 말이야. 그나저나 몇 점이나 있어야 기본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거야?’
◎ 기본 단계로의 승급은 100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퀘스트 100회를 완료하고 모은 것이 100점이었다.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아! 갑자기 허기가 진다. 소면이라도 먹어야 하나.’
남천휘는 심호흡을 하며 물었다.
‘그래서 점수는 어떻게 쌓아야 하는데?’
◎ VIP 포인트는 퀘스트의 중요도와 횟수로 적립됩니다. 포인트 적립을 통해 등급 상승이나, 퀘스트 진행이 가능합니다.
예상대로다.
결국 포인트를 모으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방법은 없어?’
한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 현물을 통해 VIP 포인트 적립이 가능합니다.
‘물물교환 같은 건가?’
남천휘는 강한 기대심을 드러내며 재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재이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남천휘는 환하게 미소 짓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물건을 소모해 가치에 따라 점수가 적립된다는 거지?’
◎ 그렇습니다.
남천휘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언제나 그렇듯 주전부리로 챙겨놓은 천품육포와 은 부스러기, 그리고 연서가 나타났다.
‘천품육포 한 장이 은자 한 냥이라고!’
그는 육포 조각을 쥔 채 VIP 포인트를 떠올렸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존재하던 육포가 사라졌다.
한순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진 것이다.
‘하아.’
이걸 저잣거리에서 선보인다면 중원 제일의 약장수도 꿈은 아닌 듯했다.
하나 신기함도 잠시였다.
중요한 건 포인트 적립이 아니던가.
남천휘는 황급히 상태창을 열었다.
하나 기대감 가득하던 표정은 금세 실의에 빠졌다.
‘안 올랐네?’
◎ 가치 부족으로 인해 환전되지 않습니다.
남천휘는 신경질적으로 육포를 씹었다.
분명히 맛은 있다.
하지만 적립이 되지 않는다면 무소용이 아닌가.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은자를 꺼냈다.
‘적립.’
이번에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육포보다 멋있게 날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포인트 적립이 이뤄졌다.
◎ VIP 점수가 +1 상승합니다.
응? 네가 화폐 구조를 잘 모르나보네.
방금 날린 은 부스러기면 열 명이 밥을 먹고도 거스름돈을 받아야 한단다.
남천휘는 금전 감각이 떨어지는 재이를 탓하며 재차 은 부스러기를 꺼냈다.
‘적립.’
한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 가치는 주인과의 애착에 따라 결정됩니다.
◎ 화폐 특성상 애착 관계 형성이 불가능합니다.
◎ 반복 적립이 불가능한 물품입니다.
포인트는 오르지 않았다.
‘야! 그럼 날리기 전에 말했어야지.’
이건 아까 것보다 더 컸다고!
‘선 조치 후 보고, 아주 거슬려.’
하나 재이는 이번에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이다.
남천휘는 연무장 한쪽에 놓인 선반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도검창을 비롯해 수련에 필요한 장비가 진열되어 있었다. 이 연무장의 주인은 그였고, 병장기들은 한두 번씩 사용했던 것들이다.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장검을 뽑아들었다.
‘적립.’
한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립, 적립, 적립, 적립! 가루가 되라고!’
◎ 대상자의 물건이 아닙니다.
남천휘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거 다 내 거야.’
◎ 정확히는 곡부남가의 소유물입니다.
여기서도 장남만 우대해주는 거냐?
남천휘는 신경질적으로 팔목에 두르고 있던 가죽을 뜯어냈다. 오래 전 거금을 들여 직접 구입한 팔목보호대였다.
헤지고, 낡았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이건 되냐? 적립!’
그 순간 보호대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동시에 경악할만한 일이 일어났다.
◎ VIP 점수가 +3 상승합니다.
거저 줘도 안 가져갈 보호대가 3점이라니.
남천휘는 그 순간 애착이 곧 애장품을 뜻하는 것임을 눈치 챘다.
‘이것도!’
각반을 풀어서 날렸고, 신발도 벗었다.
그 결과 VIP 점수는 8점이 됐다.
남천휘는 히죽 웃다가 자신이 쥐고 있는 직도를 내려다봤다.
‘흐음.’
아! 그래도 이건 아니지.
무인에게 있어서 병장기란 영혼의 동반자가 아닌가.
대신 상의를 탈의했다.
구릿빛 피부와 울퉁불퉁한 근육은 없지만, 냉기저항으로 인해 그리 춥지 않았다.
‘적립!’
10점이 됐다.
남천휘는 바지춤을 잡은 채 주변을 살폈다.
몇 번이나 입맛을 다셨으나, 결국 바지를 내리지 못했다.
하나 바지보다 좋은 것이 금세 떠올랐다.
*
소혜는 하루 종일 남천휘를 걱정하느라 몇 번이나 실수를 저질렀다. 그렇기에 혼쭐도 많이 나고, 벌도 한참동안 서야 했다. 하나 남천휘의 처소로 향하는 그녀의 볼은 발갛게 물들었다.
바로 양 손에 쥔 쟁반 덕이다.
‘삼공자께서 좋아하는 토끼 탕을 얻었어.’
지금도 연무장에서 넘어질 때마다 히죽거리던 주인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
‘마음속에 무슨 화가 그리 많으시기에······.’
아무래도 부잣집 셋째 아들로 사는 건 그리 행복하지 않은가 보다.
그녀는 남천휘의 처소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마침 계셨네.’
그녀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하나 처소의 문을 열자마자 그대로 멈췄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아.”
소혜는 속옷만 걸친 채 펄쩍펄쩍 뛰고 있는 남천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망나니도 아니면서 홀딱 벗고 도를 휘두르는 이유가 뭘까.
‘방이 왠지 낯설어.’
평소보다 더 넓게 느껴졌다.
그 이유를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침상하고, 탁자랑 의자가 없네. 선반, 수납장, 족자, 화병에 서책까지 다 어디 간 거지?’
소혜는 텅 빈 방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
그 때 남천휘가 빙글빙글 돌며 외쳤다.
“하하하! 아슬아슬하게 백 점 채웠어.”
아, 냉기저항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속옷만 입고 있어도 하나도 춥지 않았다.
“자! 그럼 다음 단계로······.”
남천휘는 서서히 말끝을 흐렸다.
그는 눈을 끔뻑이다가 직도로 슬쩍 하체를 가렸다.
“왜?”
소혜는 기계적으로 쟁반을 내밀었다.
“식사하시라고요.”
“다 봤구나.”
“······.”
남천휘는 시선을 슬쩍 피하더니 읊조렸다.
‘흠흠, 혹시 사람도 적립 되냐?’
◎ 소혜의 애착도는 가주를 향한 상태입니다.
알아! 안다고.
창피해서 그냥 해본 소리야. 내가 미쳤냐?
결국 남천휘는 헛기침을 연발하며 한 마디를 건넸다.
“거기, 거기 그냥······. 쩝, 놓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