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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만렙지존-12화 (12/305)

9, 미연시(美緣始).

9, 미연시(美緣始).

빌어먹을! 이거 걸리는 거였냐?

고수한테는 안 통하는 거였냐?

남천휘는 재이를 탓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감감무소식이다.

그 와중에 통통한 여인은 수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봉황곡의 여인 중 일부가 창틀을 잡고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어! 여기 이층이야.

하나 그녀들은 미끄러지듯 처마를 움켜쥐더니 지붕 위로 사라졌다.

‘그래도 조 대주보다는 느린 것 같은데.’

북풍대주인 조상의 레벨은 31이다.

그리고 그는 쾌검을 익혔기에 민첩 쪽에 특화됐을 터였다. 한데 저들의 몸놀림은 재빨랐지만, 조상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상보다 약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생각의 방향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통통한 여인은 수하들의 수신호를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선자, 지붕 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 백타선자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층에 올라왔을 때부터 기의 장막을 펼쳐놨다. 한데 우리가 대화할 때마다 기의 흐름이 불규칙하게 흔들렸어.”

고수면 그런 것도 느끼는 거냐?

하긴 100레벨 이상의 고수라면 그럴 법도 하다.

초절정의 고수만 해도 주먹으로 바위를 깨고, 칼로 철판을 자르지 않던가. 누군가는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남천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봉황곡의 탁자를 등진 채 읊조렸다.

‘100레벨 이상이면 얼마나 강한 걸까?’

◎ 대상자의 레벨에서는 검색이 불가능합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짜증이 솟구친다.

‘그래! 나 허접스럽다. 됐냐?’

그 와중에도 백타선자는 다루에 있는 객을 눈에 담았다. 무인으로 보이는 자가 서넛이고, 그 외에는 외유를 나온 선남선녀들로 가득했다.

통통한 여인이 싸늘한 눈빛을 쏟아내며 물었다.

“조사해볼까요?”

백타선자는 탁자에서 내려서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녀의 손은 여전히 허리춤의 검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봉황곡의 여인들이 움직였다.

그녀들은 흩어져서 탁자를 돌았다.

탁자에 앉은 이들에게 인사를 하거나,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봉황곡은 칠대금문에 속했으나, 무림맹에도 이름을 올려놓은 정사지간의 방파였다. 게다가 그들은 봉황곡에 모여 살 뿐 강호에 개입하기를 꺼려했다.

그러니 나쁜 소문에도 불구하고, 평판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사내들은 봉황곡의 여인들이 말을 걸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동석했던 여인들은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

“흥!”

하나 봉황곡의 여인들과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내공이 심후할수록 몸속의 노폐물을 체외로 빼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럴수록 얼굴은 아름다웠고, 피부는 매끈해지는 것이 순리였다.

“저는 이곳이 처음인데. 차향은 괜찮은가요?”

그녀들은 사내와 대화하면서 은근슬쩍 손을 놀렸다.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웃으며 다른 손으로는 팔뚝을 건드렸다.

“오호호! 공자가 그러셨다고요? 맙소사!”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끌면서 마지막에는 손목까지 슬쩍 매만지는 것이 아닌가.

‘저래도 돼?’

손목에 위치한 맥문(脈門)은 내공의 흐름과 양을 측정할 수 있는 요혈이다. 맥문을 잡힌다면 힘이 빠지는 건 물론이고, 죽을 수도 있었다.

한데 저들은 봉황곡의 여인들이 손목을 쓰다듬어도 헤죽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저거 단순히 예쁜 여자라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불현 듯 백타선자의 대화가 떠올랐다.

백봉이라는 목표를 잡기 위해 수십 명 분의 미혼약을 뿌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혼약을 쓴다면 미혼공도 익혔을 터였다.

봉황곡의 여인들에게 홀린 자는 양기를 빨려 죽어가면서도 웃는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으으, 진짜 납치해가나 본데?’

강호의 일에 잘못 개입하면 멸문할 수도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일어났다.

그냥 나갈까?

하지만 지금 자리에서 일어났다가는 오히려 저들의 시선을 끌 것이 분명했다.

‘이게 다 웅도 때문이야!’

웅도는 여인이 다가오지도 않았거늘 벌써부터 붉게 물든 얼굴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임마! 외모만 보면 네가 납치범이야.’

그 사이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다가왔다.

이층에 올라왔을 때부터 남천휘에게 손을 흔들던 소녀였다.

가까이서 본 소녀는 멀리서 봤을 때와 완전 달랐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의도적으로 눈웃음을 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뻤다.

하지만 저 여자는 독을 품은 과일이다.

보기도 좋고, 맛도 좋겠지.

하나 먹으면 죽는다.

‘또는 봉황곡으로 끌려가던가.’

한데 기분이 묘했다.

청초한 소녀의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맑은 눈동자에 담긴 순수함.

‘혹시 내가 너무 편협하게 생각하는 건가?’

사내대장부가 헛소문에 휘둘리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으리라.

그 순간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날카로운 재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부정한 기운이 스며듭니다.》

《대상자의 스탯이 일시적으로 하락합니다.》

그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나 소녀는 이미 남천휘의 맥문을 스치듯 매만진 후 등을 돌린 후였다. 심지어 그녀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부정한 기온이 해소됐습니다.》

《대상자의 스탯이 회복됩니다.》

황급히 상태창을 열었다.

다른 능력치는 그대로였지만, 지혜 수치가 회복되고 있었다. 지혜(智慧)는 단순히 지식의 습득만을 나타내는 수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모골이 송연했다.

마치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었다가 빼낸 기분이었다.

‘잊고 있었다. 여기는 강호야.’

강자는 빼앗고, 약자는 빼앗기는 세상.

넋을 놓았다가는 영혼까지 털리는 세상.

그리고 7레벨의 남천휘가 살아가는 세상.

남천휘는 두 자리 레벨의 무인에게도 생사를 좌지우지당해야 하는 신세였다. 곡부남가라는 안전한 울타리가 없다면 그가 봐야 할 강호는 얼마나 비정하고, 가혹할까.

‘그래도 지금은 약해서 다행인 건가?’

재이는 수련을 놀이처럼 만들어줬다.

하나 그가 살아가야 할 강호는 놀이터가 아니었다.

‘뭐가 됐든 겁나 창피하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향긋하기만 하던 찻물이 더없이 씁쓸했다.

“눈여겨 볼만한 자는 없습니다.”

백타선자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도 봤다."

만약 고수가 숨어 있었다면 제자들이 손을 뻗었을 때 피하거나, 대응했을 터였다. 그러나 사내들은 하나 같이 헤벌쭉 웃으며 말을 섞으려 애쓸 뿐이다.

‘쯧, 쓰레기 같은 것들.’

그녀는 내력을 끌어올렸다.

오감이 증폭되면서 기를 감지하는 능력 또한 상승했다. 한데 여전히 그녀가 쳐놓은 기막은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수맥이라도 흐르는 건가?’

백타선자는 영문 모를 상황에 침음을 흘렸다.

그 사이 수하가 다가와 귀엣말을 했다.

“야운산 쪽에서 백봉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백타선자는 뜨거운 찻물을 한입에 들이켰다.

“그럴 줄 알았다! 가자.”

그녀를 필두로 봉황곡의 여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천향다루의 차향과 그녀들의 체취가 뒤섞인 채 묘한 냄새가 은은하게 번졌다.

잠시 후 곳곳에서 남녀 간의 실랑이가 일어났다.

화를 내는 여자와 사과하는 남자.

그 결말이 파국일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너랑 와서 다행이야.’

남천휘와 웅도는 의미 모를 웃음을 주고받은 후 몸을 일으켰다.

*

남천휘는 눈길을 걸었다.

그는 야산을 앞에 두고 웅도와 헤어졌다.

“괜찮겠어?”

웅도는 눈과 안개로 인해 자욱한 산세를 보며 근심을 숨기지 못했다.

“우리 집 가는 길을 모를까. 걱정 말고 가라.”

남천휘는 웅도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 지도를 폈다.

까맣게 물든 지도에는 곡부와 추성현을 잇는 한 줄기 선이 존재했다. 그가 추성현으로 오는 과정에서 밝혀놓은 길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눈 감고도 갈 수 있지.’

히죽 웃으며 산에 발을 들였다.

봉황곡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은 깨끗하게 잊었다.

‘백봉인지, 뭔지는 야운산에 있다니까.’

이곳과 야운산은 거리도 거리지만, 방향은 정반대였다. 당분간 수련에 열중할 생각에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부스럭-

한데 저 앞에 있던 수풀이 흔들렸고, 그로 인해 눈발이 날렸다.

남천휘는 흠칫 놀라며 멈춰 섰다.

‘이 산에 맹수는 없는데······.’

그 순간 한 여인이 숲을 헤치며 구르듯 튕겨 나왔다. 거칠게 숨을 몰아쉴 때마다 가냘픈 어깨가 들썩였다.

“후우. 후우. 후우.”

남천휘는 예기치 못한 만남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 여인은 남천휘의 기척을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허. 저 여자 뭐야?’

첫 인상은 예뻤다.

지금껏 본 적이 없을 만큼 수려한 용모와 굴곡 있는 몸매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나 그녀는 일견하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눈빛과 피죽도 얻어먹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한 안색을 보라.

여인은 남천휘를 보자마자 인상을 썼다.

“아! 저리 가. 가!”

누가 누구보고 가라는 거야?

한데 남천휘가 대꾸할 사이도 없이 여인의 안색이 변했다. 실핏줄이 드러날 만큼 창백하던 안색이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아아.”

여인은 달뜬 신음을 흘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남천휘를 향해 흐느적거리며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불현듯 천향다루의 일이 떠올랐다.

'설마 백봉인 거냐?'

《호감도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합니다.》

그 순간 시야 한구석에 검은 막대가 생겼다.

그것은 재이가 처음 나타날 때처럼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덩달아 막대 위에 적힌 숫자 또한 빠르게 치솟았다.

······97, 98, 99, 100.

《상위 0.0001%의 이성에게 호감도 100%를 달성했습니다.》

“아아, 당신이 그리웠어!”

뭐라는 거야?

재이도 저 여자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잠시 후 '특급 강호인 승급체계'가 처음 나타났을 때에나 들었던 기음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삐이이이이이이.》

《보조 설정에 대한 접속 권한을 부여합니다.》

《히든 모드 ‘미연시’가 해금됩니다.》

그 순간 여인의 몸 곳곳에 묘한 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아름다운 인연을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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