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화 (1/305)

1, 자소서. / 2, 그럴 거면 왜?

1, 자소서.

『전략(前略).

남천휘의 삶을 돌이켜봤을 때 선으로 따지자면 직선이고, 술을 예로 들면 무색무취라 할 수 있겠다.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순탄한 삶을 살아온 덕분에 고난과 역경이란 낯선 단어에 불과했다.

하나 십 년 전 토비들에게 납치되었다가 구출된 이력이 있으니 마냥 순탄하다고만 할 수는 없으리라.

어쨌든 인생의 첫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어떻게 구조됐는지 알 수 없지만,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겠는가.

남천휘는 그 날 이후에도 납치되기 전과 다를 바 없는 매일을 보냈다. 하나 그는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한 가지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시야 상단에 기다란 막대가 보인다는 점이다.

눈을 떠도 보이고, 눈을 감아도 보였다.

십 년 전 투명했던 막대는 세월이 흐를수록 검게 물들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물들어가는 것은 마치 무언가가 진행되는 듯했다.

게다가 기다란 막대 위에는 낯선 글귀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막대 위에는 84라는 숫자와 함께 Install이라는······.』

남천휘는 꼬부랑 글씨를 쓰다가 붓을 집어던졌다.

“젠장! 이걸 누가 믿어?”

이대로 과제를 냈다가는 미친 놈 소리를 듣기밖에 더 하겠는가.

“누가 학관에 입관할 때 이런 걸 써?”

그가 입관하고자 하는 학관의 문사부는 불가(佛家) 계열의 수행자였다. 그렇기에 자아성찰이나 묵상을 통한 관조를 중시했다.

그 결과가 오늘의 과제였다.

자기 자신을 제 삼자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평가를 하란다. 즉 자기 자신을 남에게 소개하는 것이 과제의 핵심이다.

그래, 자기소개서라고 하면 되겠다.

“우리 집 부자라고. 내가 대과를 볼 것도 아니고,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학관을 가야 해?”

남천휘는 투덜거리면서도 집어던진 붓을 다시 주웠다. 어찌됐든 과제를 제출하지 않으면 입관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입관하지 못한 채 백수로 남으면 풍족한 삶도 안녕이었다.

‘하긴 성질이 그러니 파계를 하고 애들이나 가르치는 거지.’

애꿎은 문사부를 탓하며 종이를 새로 꺼냈다.

대충 거짓말을 섞어서 제출해야겠다.

붓끝이 백지 위에 닿았다.

하나 남천휘는 붓을 내려 긋지 못했다.

“어?”

어느새 84가 85로 바뀌었다.

한데 눈을 깜빡이는 순간 86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숫자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상승했다.

87, 88, 89, 90······.

“어어어!”

남천휘는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99까지 치솟은 숫자가 100으로 바뀌었고, 완전히 검게 물든 막대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기이한 울림이 들렸다.

《삐이이이이이이.》

《언어 해석 완료.》

《지도 작성 완료.》

《임무 생성 완료.》

《습득 가능 정보를 토대로 환경설정이 완료됐습니다.》

《기본 설정 상태로 임시 실행이 가능합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어우, 깜짝이야! 뭐야 너? 당장 내 머릿속에서 꺼져. 이 년아!”

2, 그럴 거면 왜?

소혜는 곡부남가(曲阜南家)의 시비다.

그리고 이 아이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착한 소녀였다. 한데 그런 소녀가 얼굴을 감싼 채 울먹이며 뛰쳐나갔다.

“흐아아앙.”

남천휘는 그 모습을 멀뚱히 쳐다볼 뿐이다.

“너한테 한 말은 아닌데······.’

그러나 그가 탄식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이상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띠. 띠. 띠. 띠. 띠.

《실행하시겠습니까?》

남천휘는 검지로 이마를 긁적였다.

매끈한 이마의 한쪽 부분만 거칠다.

고민이 생겼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다.

“이건 대체 뭐냐?”

일단 호흡을 가다듬었다.

평범한 사람이 이런 일을 겪었다면 발광을 하면서 날뛰었을 것이다.

하나 십 년 가까이 함께했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대견함으로 인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평소 꾸준하게 예의와 교양을 갈고 닦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만 욕을 퍼붓는 순간 소혜가 탕약을 들고 나타난 것이 실수라면 실수일 터였다.

소혜야, 미안해.

오라버니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잖니.

‘그러니 착한 네가 이해해주렴.’

남천휘는 뒷짐을 진 채 방안을 오갔다.

지금은 소혜를 달래는 것보다 머릿속에 있는 여인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이 더 급했다.

‘너 뭐야?’

대답 대신 실행을 하겠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리를 내서 물었다.

“너 뭐냐고?”

역시 같은 소리만 반복될 뿐이다.

일단 대화는 통하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고 아무 대책 없이 실행을 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남천휘는 입을 떼려다 괜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당장 가주에게 달려가 당신의 막내아들이 미쳤다고 고자질할 것이 뻔했다.

‘이걸 어쩐다?’

남천휘는 잠시 방안을 오가다가 밖으로 발길을 돌렸다. 혹시 다른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쉬이이잉-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서늘한 바람이 사방에서 들이쳤다.

하나 그는 곡부남가의 막내아들이 아니던가.

곡부남가는 산동성에서 으뜸가는 부호는 아니지만,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는 됐다. 그렇기에 값비싼 털옷으로 무장한 남천휘는 거침없이 산책을 이어갔다.

“삼공자.”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남천휘를 알아보고 목례를 했다. 곡부남가와 거래를 하려는 상인이나 무인일 터였다. 그런 사람들의 숫자가 물경 기십에 이르렀다.

‘예전보다 늘어난 것 같은데?’

그만큼 곡부남가의 재정은 호황이라는 뜻이리라.

그래서였을까.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여전히 울리고 있음에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나 남천휘는 외원의 출구로 향하던 중 다리를 앞두고 멈췄다. 다리 아래서 빨래를 하던 시비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

“삼공자께서 소혜한테 꺼지라고 하셨나봐.”

“맙소사! 그게 진짜야?”

소혜의 훌쩍거림이 이어졌다.

“네.”

시비들은 빨래의 지루함을 달래려는 듯 벌떼처럼 달려들어 소혜를 둘러쌌다.

“그럴 분이 아닌데?”

“소혜야, 네가 실수한 건 아니고?”

“그냥 평소처럼 탕약을 가져갔을 뿐인데요.”

소혜가 억울함을 토로 했지만, 시비들에게 중요한 건 지루함을 달랠 화젯거리일 뿐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삼공자께서 그러셨다니까 왠지 박력 있다.”

“이 년이 미쳤나? 욕먹어야 흥분하는 취향이냐?”

시비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잘생기셨잖아. 마냥 부드러운 것보다는 가끔 사내다운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나저나 가주님 젊으셨을 때 모습을 쏙 빼닮으셨다고 그러더라. 나중이 더 기대되는 분이셔.”

남천휘는 자신의 편을 드는 시비의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남자 보는 눈이 제법이야.’

하나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야! 얼굴 뜯어먹고 살 거냐? 얼굴은 삼 년만 지나면 질린다고 했어. 가주님의 외모보다는 성품을 닮은 쪽이 낫지. 예를 들면 대공자처럼 말이야.”

남천휘는 입술을 삐죽였다.

‘삼 년이라도 즐거운 쪽이 낫다는 걸 모르네.’

누군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래도 대공자는 인덕이 너무······. 풍채만 보면 가주님보다 윗줄이신 걸.”

그도 그렇다.

큰형인 남천홍(南天弘)은 인품이 넉넉해도 너무 넉넉했다. 아주 하늘의 축복을 받아서 몸뚱이에 덕(德)이 덕지덕지 붙어 있을 정도였다.

‘한 마디로 돼지지.’

남천휘의 속내가 시비 중 누군가와 통했나 보다.

“나는 그래서 이공자 멋있더라. 병약해 보이는 외무에 그런 무재(武才)를 지녔을지 누가 알았겠어? 아마 영웅담에 나오는 미소년이 있다면 이공자처럼 생겼을 거야.”

남천휘는 헛웃음을 지었다.

키도 작은 것이 성질만 더러운 둘째 형과 미소년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남천익(南天益)에게 시달린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릴 지경이다.

‘평생 수련만 해라. 다시는 돌아오지 마. 그래, 신년 인사 서찰 정도는 보내줄게.’

남천휘는 섬서성 어딘가에서 수련하고 있을 남천익을 떠올리며 간절히 기원했다.

한데 시비의 우두머리가 혀를 찼다.

“쯧쯧, 사내라고는 겪어보지를 못했으니 아주 쉰 내나는 말만 하는구나.”

남자 얘기에 시비들의 눈이 반짝였다.

“잘 들어봐. 삼공자가 소혜한테 그냥 꺼지라고 했니? 아니잖아. 머릿속에서 꺼지라고 했잖아.”

“그게 뭐요?”

“어이쿠! 이 어리석은 것들을 어찌 인도하나. 삼공자가 소혜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으면 머릿속에서 나가라고 했겠니? 중요한 건 꺼지라는 말이 아니라 머릿속이라는 단어라고. 책도 좀 보고 살아. 이것들아! 평생 혼자 살 거야?”

시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남천휘 역시 어처구니없는 말에 넋을 놓았다.

‘아줌마, 나한테 왜 그래요?’

어떤 미친놈이 그런 책을 썼단 말인가.

하나 시비들은 뭐에 홀린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어차피 저들에게 진실은 중요치 않으리라. 그저 빨래를 하는 동안 수다를 떨 화젯거리만 있으면 족한 거겠지.

“삼공자께서 소혜를 좋아한다고요?”

“후훗, 내가 예견하건데 거의 확정적이야.”

아줌마, 으스대지 마!

절대 그렇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 책 반품해. 아니면 불태우던가.

그런 허황된 책에 의지했다가는 평생 혼자 살게 될 거야.

하나 그 사이에도 시비들은 먹이를 마주한 아기 새처럼 꺅꺅거렸다.

남천휘는 시비들이 유난을 떠는 모습에 황급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대로 저들을 보냈다가는 어처구니없는 소문이 곡부남가를 강타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이내 평화로운 곡부 전체로 퍼져나가겠지.

‘그건 싫어!’

하지만 그보다 소혜가 빨랐다.

“으아아앙! 그건 싫어요.”

남천휘는 품안의 보석을 빼앗긴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소혜와 알고 지낸 세월만 오 년이다.

시비였지만 무시한 적도 없고, 괴롭힌 기억도 없다. 때로는 오라비가 되어주고, 때로는 친구처럼 지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배신감은 배가됐다.

애초에 돈 많은 집 셋째 아들이 싫은 이유가 뭔데?

“저는 가주님 쪽이 더······.”

남천휘는 소혜가 수줍은 듯 말끝을 흐리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부잣집 아들보다는 그냥 부자인 거냐?’

이쯤 되면 더 듣는 것이 고역이다.

남천휘는 헛기침과 함께 앞으로 나서려 했다.

갑자기 머릿속에 울린 여인의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선택시간 종료로 인해 자동실행 됩니다.》

‘아니, 그럴 거면 왜 물어봤냐?’

대답 대신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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