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모르면......처 맞던가
내 불의의 습격에, 피코가 드디어 풀려났다.
후웅! 후웅! 후웅!
거대한 그 날갯짓으로, 다시 날아오른 피코.
녀석은 전과 다르게,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많이 컸네, 피코."
그에 피코가 슬쩍 나를 바라다보며, 대답하였다.
"아직은 좀 모자란 것 같지만."
덩치가 커지니 말끝에 삐약 소리도 들어가지 않았다.
피코는 더 높이 날아올라.
크로토스와의 거리를 벌렸다.
하나 정작 크로토스는 피코에겐 관심이 없었다.
놈의 시선은 오로지 나를 향할 뿐이었다.
거의 반나절 동안 이어진 크로토스와의 대전투.
그 긴 시간 중 처음으로 크로토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크로토스 뿐만이 아니었다.
아를렘도 포세이튼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게, 생체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팔을 갑자기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의문이 들 수밖에.
나조차도 내 손에 새로운 권능이 자리 잡는 순간.
의문과 놀라움이 동시에 들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지금 내가 사용한 능력은, 파오갓에서조차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힘이었다.
[공간 베기 : 초월 능력 - 영혼 베기]
초월 스크롤의 힘을 이용해 공간 베기를 강화한 효과의 결과물은, 다름 아닌 이것이었다.
공간을 베는 것을 뛰어넘어 그 영혼을 베어버린다.
크로토스의 팔이 움직이지 않는 건, 내가 그의 영혼의 어깨를 베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간 베기 능력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감각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원래 원작에서도 초월 스크롤을 쓴다고 해서 베이스가 되는 권능까지 없어지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여전히 공간 베기는 놈에게 무효할 터였다.
크로토스의 몸에 공간 베기가 닿으면, 절대로 벨 수 없는 어떤 것에 닿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신검의 힘을 이용해 길어진 사거리 부분으로만 크로토스를 베었다.
그리고 결론은 눈앞에 나타난 것처럼 효과적이었다.
막히는 감각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한 크로토스는.
재차 나를 노려보았다.
"다시 묻겠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모르겠나?"
"......뭐?"
"모르면......"
나는 검을 틀어쥐며.
"처 맞던가."
적시에 날아온 페가수스의 등에 가뿐히 올라탔다.
* * *
휘이이이이잉!
페가수스의 날개가 한 번 공기를 가를 때마다, 속도는 계속해서 더 빨라졌다.
그 위에서 나는 다리로 페가수스의 몸통을 단단히 붙들고는 양손 모두 고삐를 놓았다.
그리고는 오른손에는 신검 모르테논을, 왼손에는.
우르르릉......콰광!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움켜쥐며, 검은 천둥의 창을 손에 넣었다.
나의 템포에 맞추어 포세이튼 역시 다시 삼지창을 소환하며 달려나왔고.
아를렘은 끊임없이 크로토스의 사각으로 날아들었다.
피코가 가장 높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지상의 군단은, 기꺼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일제히 크로토스를 향해 돌진하였으니.
"심해 기사의 명예를 걸고!"
"죽음에 맞서리라!"
"거신을 쓰러뜨림에, 우리의 책무를 다할지니!"
"한 발도 물러서지 마라아아아아아!"
그 기세가 가히 눈사태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분노한 크로토스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일갈하였다.
"고작 네놈들 가지고 운명의 기류를 바꿀 성 싶으냐!"
그때.
"저들이 끝이 아니라면!"
저 멀리서, 큰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으니.
그는 드래곤 위에서 자세를 낮게 낮춘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불의 정령왕, 마그마로스였다.
그를 알아본 크뢰이튼이 미소를 지었다.
"빨리도 오는군!"
"전부 데려오느라 조금 걸렸지! 하하하하!"
실제로 그의 주변에는, 여러 인물들이 보였다.
하인트 교구장과 몬테드, 더불어 다른 정령왕들과.......엘프 로드로 보이는 자도 있었다.
그들을 태우고 다가오는 드래곤 역시, 그 기운을 보아하니 드래곤 로드 바포레트인 것 같았다.
정말 도움이 될만한 병력을 있는 대로 전부 끌고 온 모양이었다.
"오랜만이네, 로한 경! 설마 나를 잊고 있지는 않았겠지?"
"......"
내가 대답이 없자.
"......"
마그마로스가 당황을 하였다.
'잊고......있었네.'
지금 생각해보면, 아를렘의 손에 이끌려 포세이튼을 만나 심해 요새를 다녀온 후부터.
마그마로스가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자리를 비운 그 사이에 가우리엘이 마그마로스를 보낸 게 아닐까 싶었다.
'오르헬이나 리치몬드가 저런 걸 준비하라고 했을 리는 없고.'
주로 이런 상황에서 미리미리 움직여 준비를 해왔던 건 가우리엘이었으니.
그런데, 보이지 않아도 이렇게나 까먹을 줄이야.
약간은 섭섭한 표정의 마그마로스가.
다가오며 소리를 쳤다.
"전투 끝나고 나면, 한마디 해야겠군!"
그에, 크로토스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며 대화를 끊었다.
"그 누구도 이 카리앗 산을 벗어날 수는 없다! 너희들은 모두 이곳에 묻힐지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백골이 되리라!"
나는 마그마로스와 드래곤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던 크로토스를 향해.
검은 천둥의 창을 내던지며.
콰과과가가가가!
오른손의 검을 비틀어 쥐었다.
"어림없는 소리."
* * *
마치 세상의 마지막 전투와도 같은 그 전투가.
우리를 덮쳤다.
내 선공을 시작으로, 한쪽은 다 죽어야 끝이 나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터졌다.
크로토스의 얼굴을 향해 쏘아지던 나의 검은 천둥의 창을.
놈은 한 손으로 막아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포세이튼이 자신의 창을 투창하였고.
쏴아아아아아!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창을, 크로토스는 처음으로 막는 것을 포기하고 회피를 하였다.
그것은 큰 차이였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다 맞아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었기에.
크로토스의 대응이 달라지자, 기사들 역시 더 거칠게 달려들었고.
"와아아아아아아!"
"놈이 겁을 먹었다아아아!"
"밀어 붙여!"
그들이 한 치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자, 드래곤들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공중을 가르고 크로토스에게 덤벼들었다.
크로토스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이것으로, 자신에게 덤벼든다는 이 사실이.
죽음을 두려워 않는 저 어리석음이!
"하찮은 것들이 아무리 많이 모인다고 한들, 바뀌는 것은 없다아아!"
크로토스는 크게 주먹을 휘둘렀고.
퍼어억!
그 공격에 선두에서 접근하던 드래곤 하나가 직격으로 타격을 받았다.
"캬아아아아......!"
워낙 강력한 공격에, 드래곤들은 연쇄적으로 충돌을 하며 단 일격에 몇 마리나 바닥으로 추락하였다.
겨우겨우 회피를 한 바포레트가, 등 위에 올라탄 정령왕들을 향해 소리쳤다.
"가까이 접근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꽉 붙잡아라!"
바포레트는 급강하를 하며, 오히려 땅에 닿을 듯 낮게 비행을 하였다.
크로토스도 처음에는 바포레트를 노리려고 하였으나.
"이쪽도 신경 써야 할걸!"
피코가 저 위에서 화염을 다시 내뿜으니.
콰아아아아아아!
크로토스의 무릎이 처음으로.
쿠웅......
꿇렸다.
나는 페가수스를 타고 놈의 주위를 돌면서, 크로토스를 주의 깊게 살폈다.
'크로토스가 인지하고 있는 물리 공격은......전부 막히고 있다. 하지만 화염의 열기는 그대로 뚫고 지나가는군.'
놈에게 데미지를 주기 위해서는, 인지하지 못한 물리 공격.
즉, 기습을 하거나.
혹은 화염의 열기 같은, 간접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수단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전장에서 가장 큰 활약이 가능한 건......
바포레트와 피코, 그리고 마그마로스.
저들이었다.
저 셋이서 크로토스에게 데미지를 입히면, 크로토스도 집중력이 흐려질 것이고.
하면 그 이후 생긴 빈틈을 통해 물리 공격도 가할 수 있으리라.
상황을 파악한 나는.
페가수스를 이끌고, 가장 먼저 피코에게.
그리고 이어서 바포레트와 마그마로스에게로 움직였다.
"내 신호에 맞추어, 각자 다른 각도에서 동시에 화염을 퍼부어라."
"문제없다, 삐약!"
"알겠네, 로한 경!"
"그리하지."
나는 그 이후, 포세이튼과 아를렘 속에 섞여들어.
때를 기다렸다.
"히히히히힝!"
페가수스를 타고, 크로토스의 시야을 어지럽히며.
완벽한 빈틈이 생기는 그때를.
마침내!
그 순간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고.
"지금이다!"
내 신호가 떨어지자.
그들이 동시에 화염을 내뿜기 시작하였으니.
콰아아아아아아아!
화르르륵!
퍼어어어어엉!
각자 다른 형태의 화염이 크로토스를 덮쳤고.
아군들조차 그 열기에, 물러서고 있었다.
하나 나는 그들과는 반대로 그 열기를 향해 더 깊이 들어갔다.
페가수스의 몸통도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기회는 지금뿐.
나는 마지막 일격을 위해 이를 악물었다.
어렴풋이 크로토스의 목이 보이던 그 순간.
"크흐흐흐흐! 네놈이 이럴 줄 알았지!"
갑자기 크로토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에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하였다.
* * *
섬뜩!
그 목소리에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크로토스는 내가 이렇게 움직이라는 것도 예측을 한 모양이었다.
녀석은 내가 접근하기를 기다렸다가.
퍼어어어어엉!
엄청난 압력으로 모든 것을 밀어내고 있었다.
크로토스의 주변으로 공간들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그 결과, 불길은 크로토스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전에 그 일그러진 공간에 부딪히며 사라졌고.
당연하게도 화염의 열기조차 크로토스에게 닿지 못하였으니.
크로토스는 이제 선명하게 접근하고 있던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공간을 지배하는 거신이 바로 나, 크로토스이거늘! 설마 내 공간 방어 능력이 그렇게나 협소하리라 생각했는가! 하하하하하하!"
"......!"
실책이었다.
설마 저 공간 방어 범위가 늘어날 수도 있다고는 생각도 못 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크로토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로토스는 화염을 몰아내고는 고의로 다시 공간 방어 범위를 좁혔으니.
그것 역시 나를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짠 판이 아닌, 놈이 짠 판으로 뛰어들어가는 꼴이었다.
'필멸조가 없었다면 말이지.'
하나 크로토스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저 하늘 위.
고고도에서 조용히 접근하고 있는 한 존재.
필멸조가 있다는 것이었다.
크로토스는, 내가 자신이 짠 판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겠지만.
이것까지도 아직 내 손아귀 안이었다.
공간 방어를 넓힐 수 있다는 변수가 튀어나와 당황하기는 했지만......
결국 나를 죽이겠답시고, 제 손으로 다시 공간 방어를 좁혀주었으니.
나는 나를 미끼로 쓰며.
놈에게 돌진하였고.
"흐아아아아아압!"
기합을 지르며, 필멸조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필멸조는 급강하를 하여 크로토스의 뒤통수에 도착하였고.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크로토스가 당황을 하였다.
"필멸조? 이것들이 지금 무슨 작당을......!"
그 순간.
필멸조는 그 길죽한 부리로, 크로토스의 목덜미를 콱 무는가 싶더니.
날개를 퍼덕이며 그대로 크로토스를 잡아 끌어냈다.
그런데, 끌려오는 것은 크로토스의 몸통이 아니라.
녀석의 영혼이었다!
반쯤 영혼이 뜯겨 나온 상황에서도 크로토스는 놀랍게도,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당장 놓지 못할까!"
녀석은 다시금 필멸조를 날려버리기 위해, 공간 방어 범위를 키워나갔다.
저게 넓어진다면 필멸조도 크로토스의 영혼을 놓치고 튕겨 날아가 버리리라.
나는 페가수스를 재촉하였고.
"히히히히히힝!"
그것으로도 모자라, 페가수스를 박차고 튀어 나가 더 속도를 보태었다.
아슬아슬하게 공간 방어의 속도와 내가 날아가는 속도가 겹쳤다.
"더 당겨!"
나의 외침에, 필멸조가 응답하였다.
"빨리! 더는 못 버틴다아아!"
"당장 놓으라고, 이 하찮은......!"
촤악!
날개를 펼치며 쏘아진 나는.
크로토스의 영혼을 베어버렸다!
그러자.
목의 영혼만 남은 크로토스의 눈동자가 점점 흐려지더니.
"이럴 수는......없는 것인데......"
이내 그 영혼이 소멸해버렸고.
영혼을 잃은 크로토스의 몸통은.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세상을 집어 삼킬듯한 폭발과 함께 터져버렸다.
나는 다급히 양팔을 교차하여 그것을 막아보았으나.
"크으으으윽!"
너무나 가까웠던 탓에, 결국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