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이번 거는......인정
심해의 기사들까지 전장에 합류를 하자.
전황은 급변하였다.
거신과 악마 연합이 점점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비단 멀리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아를렘, 오르헬과 리치몬드 그리고 디아즈까지 내 곁으로 합류를 하자.
나를 비웃던 마로도로스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 아를렘......!"
마로도로스는 아를렘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렇겠지.
아를렘쯤 되는 존재라면, 상위 거신이 아니라 크로토스가 직접 나서야 할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정작 그에 대답을 한 것은 오르헬이었다.
"이야. 이거, 이쪽은 아예 본 척도 안 하네?"
그에 리치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괘씸하지 않습니까? 형님."
"내 말이 그 말 아니냐. 분명히 우리가 아를렘보다 먼저 착지했는데. 놀라는데도 순서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맞습니다! 저희를 보고 놀라는 게 먼저지요! 본때를 보여줘야겠습니다!"
"그래. 어이, 브라더. 좀 쉬고 있어. 알겠지? 리치몬드, 디아즈. 자, 가자고. 공포의 쓴맛을 한 번 보여 줘야지?"
"예."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리치몬드가 뛰어올랐다.
마로도로스의 얼굴 정면을 향하여.
"읏차아아아!"
이상한 기합과 함께 쏘아진 리치몬드에.
마로도로스는 손바닥을 뻗어 막아낸 후, 그를 쳐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퍼어어억!
그의 손바닥에 리치몬드가 부딪히자.
"......!"
마로도로스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아마 놈이 추측했던 충격량보다 더 강했으리라.
애초에 아를렘 외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그 행동만 보더라도, 마로도로스가 다른 존재들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를렘과 포세이튼의 혹독한 수련을 이미 경험했던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일곱 기사단의 기사들과는 달리, 오르헬과 리치몬드의 성장 기대치는 훨씬 높은 편이었다.
디아즈도 그러하고.
당연히 리치몬드가 크게 탈바꿈 했으라리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리치몬드 혼자서 상위 거신인 마로도로스의 완력을 돌파할 수는 없었다.
다만 자신을 무시했던 그의 몸을 휘청이게 할 정도는 되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디아즈가 눈밭을 엄청난 속도로 내달려.
타다다다닷, 촤아아악!
마로도로스의 아킬레스 건을 잘라버렸고.
"크아아아아아악!"
놈은 비명과 함께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사이 이미 오르헬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붉은 손톱을 길게 뽑아내어, 마로도로스의 정수리를 내리찍었으니.
푸우욱, 촤아아아악!
놈의 선혈이 하얀 눈 밭 위로 솟구쳤다.
* * *
앤드류 덕분에 목숨을 건진 리오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
"아! 애, 앤드류 경!"
"왜? 무슨 일인데, 신입?"
"로, 로한 경을 도와야 합니다! 로한 경은 지금 상위 거신 마로도로스라는 존재와 싸우는 중인데, 저 상위 거신이라는 게 굉장히 강한 존재라고 합니다! 크뢰이튼 경께서 말씀하시길 상위 거신은 하위 거신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합니다! 어서 합류를 해야 합니다!"
리오는 크뢰이튼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앤드류를 재촉했다.
앤드류 정도의 실력이라면, 분명 상위 거신을 상대함에 있어서도 모자람이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에이. 괜찮아. 저기는 신경 쓰지 말고. 너 아까 달려가던 거 보니, 로한 경이 다른 임무를 맡긴 거 아냐? 그거부터 처리하러 가자고."
앤드류는 코웃음을 치는 게 아닌가.
"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제단 쪽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경께서는 로한 경을 도와주십시오!"
리오는 답답했다.
앤드류가 강한 건 알겠다만, 지금 상황 파악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나 앤드류는 오히려 리오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반대로 그 말을 내뱉었다.
"상황 파악이 아직 좀 잘 안 되지? 괜찮아. 신입이면 그럴 수 있지. 그래도 계속 그러면 안 된다? 쑥쑥 커서 나중에는 전황도 좀 잘 보고 그래야지. 음."
리오는 속이 터질 거 같았다.
그는 로한이 있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키웠다.
"제가 만약 앤드류 경과 같은 힘이 있었다면 제가 갔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도움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하지만 앤드류는 이제 대답도 하지 않고.
리오와 마찬가지로 그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로한이 있는 곳을.
"그것 보십시오! 저기 저쪽에 지금......"
그러나 리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로한의 앞에 선 모로도로스의 몸이 거목 쓰러지듯 기우뚱거린 것이었다.
"이, 이게......"
"저쪽에 투입된 인원이 몇인데. 그것보다, 우리부터 걱정해야 하거든?"
"예, 예?"
앤드류가 살기를 내뿜자.
리오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검을 움켜쥐고는 꼭대기의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서는.
"우아아아아아아!"
"죽여라아아아아!"
"모조리 쓸어버려 주마!"
"이 하찮은 놈들!"
새로운 거신 측 지원 병력들이 또 달려오고 있었다.
세상 거신이 모두 이 카리앗 산에 모여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진짜 모여 있을지도.'
이곳에서 승리하는 진영이, 모든 승리를 차지할지니.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리오는 비로소 이 전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또 중요한지를 몸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앤드류는 한 마디로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포식자가 아니고, 저쪽이 포식자야. 잊지 마! 넋 놓지도 말고!"
"아, 알겠습니다!"
다시금 끔찍한 전투가 시작되려던 그 순간.
저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여라."
그것은 분명히 로한의 목소리였다.
그 거리만큼이나 멀리서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신기하게도 바로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이상한 감각에 잠시 멈칫해버린 리오.
앤드류는 얼른 리오의 목덜미를 붙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쭈우욱.
리오의 머리가 강제로 끌려 내려오자마자.
번쩍!
둘의 머리 위로 섬광이 한 번 이는가 싶더니.
후두두둑......
달려오던 거신들과 악마, 그리고 오크, 트롤, 오우거까지 모조리 상체가 날아가 버렸다.
엄청나게 거대한 공간이.
한 순간에 베여져 버린 것이었다.
그 광경에 리오는 또다시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앤드류가 중얼거렸다.
"이번 거는......넋 놓는 거 인정."
* * *
"끄워어어어......!"
"케엑. 케엑! 케엑......"
"쿨럭......"
바닥에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악마와 오크, 트롤, 오우거들이 나뒹굴었다.
거신들 역시 큰 데미지를 입었으나, 일단은 신격의 존재이기에 목숨은 떨어지지 않은 채였고.
그러나 그 누구도 이제 로한을 막을만한 자는 없었다.
앤드류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리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 봐. 저쪽은 걱정하는 거 아니라니까? 로한 경이 지면 어차피 다 죽는 거라서, 굳이 걱정해봤자 소용없어."
"......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리오는 앤드류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직접 두 눈으로 이 광경을 보고도 어찌 그 말을 믿지 않겠는가.
앤드류는 이런 비현실적인 광경이 익숙한지.
놀라는 것도 잠시, 금방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앤드류 경은......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신 거지?......'
그리고는 또 아직 죽지 않은 악마와 트롤, 오우거들의 목을 하나씩 베었다.
촤악! 촤악! 촤악!
이제는 그나마 살아있는 악마나 몬스터들도 숫자가 줄어드는 중이었다.
벌써 다른 일곱 기사들 역시도 움직이고 있었기에.
리오도 그들을 도와 움직이고자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는 사이.
이미 로한과, 빛을 타고 새로 나타난 존재들은 카리앗 산의 꼭대기를 향해 걷고 있었다.
이제는 이 패잔병들만 처리하고.
저 영웅들이 카리앗 산의 제단만 파괴한다면......
'......드디어 끝이구나.'
이 험난한 여정이, 끔찍한 전쟁이 끝날 것이었다.
마지막 고지가 코앞이라고 생각하니.
리오는 이제야 한숨이 돌려졌다.
그리고 나니, 온몸에 힘이 쫙 풀리는 것 같았다.
털썩.
그는 결국 일어서자마자 다시 바닥에 주저앉는 꼴이 되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크라우스가 다가왔다.
"하하하하! 녀석, 혼이 쏙 빠진 것 같은데?"
"어후. 예. 두 번은 못 할 거 같습니다."
"그래도, 리오 너. 많이 성장을 했어. 지금 당장은 체감되지 않겠지만......이번 여정에서 얻은 이 경험들은, 추후 앞으로 겪게 될 순간들에서도 큰 힘이 될 것이야."
"그렇습니까?"
"그럼! 장담하지."
크로토스는 미소와 함께 자신을 믿으라는 듯, 가슴을 퉁퉁 쳤다.
리오는 힘 빠진 웃음을 지으며.
"하, 하하......"
진짜 끝이 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그 순간.
"클클클클클."
저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로도로스였다.
놈은 이미 팔과 다리가 다 잘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태였건만.
이상하게도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에, 크라우스와 리오도.
그리고 위를 향해 올라가려던 영웅들도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마로도로스는 입을 떼었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나? 천만에."
패배자의 아집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웃음이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었다.
로한 역시 그러했는지.
어느샌가 아래쪽을 향해 몸을 돌린 채였다.
그런 로한을 향해, 마로도로스는 혀를 놀렸다.
"이 카리앗 산에 죽음이 가득하구나. 위로 올라가면 제단이 있을 거라고? 후후후후.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가 계속 말을 걸었지. 하지만 천만에. 그 위에도, 지하에도. 어디에도 제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답을 대신한 것은 아를렘이었다.
"헛소리를 길게 들어 줄 생각은 없다."
"헛소리인지 아닌지. 직접 보고 와도 상관없다. 이미 승패는 정해졌으니. 이 전투가 시작되던 그 순간부터 운명의 톱니바퀴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도다. 하나의 마지막을 향하여."
"마지막?"
"카리앗 산에서 내가 왜 전투를 일으켰을까? 생각해보았나? 하지 않았겠지. 후후후. 이 땅의 죽음은, 전부 크로토스의 부활을 위한 제물이 될지니. 네놈들이 죽어서 그 제물이 되면 좋았겠지만......이것도 나쁘진 않지! 하하하하하하!"
마로도로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옥과 연결되었던 구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콰아아아아아아!
모든 구덩이에서 그 불길한 불꽃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리고 그 지옥의 기운과, 죽은 오크, 트롤, 오우거의 영혼들이 하늘로 향하였다.
그런데.
그 하늘에서......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거대한 얼굴이.
몬스터들의 영혼과 지옥의 기운은, 단순히 하늘을 향한 게 아니라.
그 거대한 존재의 입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던 것이다!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런 우리를 향해.
마로도로스는 광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맞이하라! 종말을! 그리고......크로토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