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사기캐로 살아가는 법-181화 (181/194)

181화. 내가 부탁하는 걸로 보여?

"그, 그래......내가 잠시 잊고 있었구만......이걸."

크라우스는 로한을 어이없는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대련을 하던 당시 그 움직임만 하더라도 너무 압도적이었기에.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로한의 전력은 그 검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그가 천둥까지도 다룬다는 사실을.

'그때도 그랬지. 심연의 악마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던 당시에도.'

로한의 검은 천둥은, 그날 역시도 악을 쓸어버렸었다.

감히 악마들이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압도적으로.

이번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이 작은 항구 마을을 지옥으로 만들려던 군단은, 일순간 과반수가 소멸해버렸다.

지금은 그저 한 줌의 재와 다름이 없었다.

그나마 크라우스 자신은 이전에도 한 번 그의 힘을 보았기에 덜 놀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일곱 기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처, 천둥이 갑자기 왜......"

"설마. 저거 로한 경이한 건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

그들은 심지어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크라우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보고도 믿지 못하면 안 되지."

크라우스가 그리 한마디를 하니.

"......"

"......"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 기사들은.

찔리고 베인 통증마저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멍하니 다가오는 로한을 바라보았다.

로한은 그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일단 치료부터 하고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 서리 낀 목소리에.

기사들은 바짝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당장 혼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 * *

크라우스는 내 옆에 서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다 죽을 뻔했어."

나 역시 한숨이 나오는 건 매한가지였다.

"오합지졸도 아니고."

그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협동을 하면서 싸워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자들일세. 평시에는 각자 왕국에서 시간을 보내고. 각 왕국에서 문제가 생길 땐, 대부분 혼자 나섰을 걸세. 나 또한 그런 식이었고. 일곱 기사단이라 함은, 당연히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법이니.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한 경험들이 거의 없을 걸세."

"흠......"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 한 왕국의 최고 전력일 터였다.

못한 일이 없을 것이고, 진 적도 없을 것이었다.

애초에, 이런 험한 세상에서는.

패배는 곧 죽음이니.

특히 소방관처럼 험한 일만 도맡아서 하는 일곱 기사단의 특성상, 살아 있다는 것은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이래서는 안 되겠지."

"나도 알고 있고, 저들도 느꼈을 걸세. 한 번 당하기는 했지만, 또 그렇게 멍청한 자들은 아닐세."

실제로 부상당한 기사들을 포함해서.

그들은 이번 전투의 패인과 협동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는 있었다.

지금까지는 서로 견제를 한답시고 숨기고 있던 권능까지도 공유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전력을 숨기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란 걸 인정한 것 같았다.

"꽉 막힌 놈들은 아니라는 건가."

"처음에 급하게 나선 것도, 사방에 죽어가는 다른 마을 주민들 때문이었다고 했다더군. 빨리 켄타우로스 군단을 잡아내어야 그들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놈들이니, 너무 나쁘게만 보지는 말았으면 하네."

"......"

워낙 이상한 놈들을 많이 봐왔기에 나도 약간은 색안경을 끼고 본 모양이었다.

"패배는 죽음이라는 걸 아는 놈들이네. 그대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것도 명확히 알고 있을 거고. 운 좋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에 나도 더 이상은 추궁할 생각이 사라졌다.

나름 알아서 잘하는 것 같으니.

그런데 문득 궁금한 것들이 몇 가지 생겼다.

'리오의 권능은 뭐지?'

밤새 일방적으로 가르치기만 하다 보니, 들어 볼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나중에 물어나 봐야겠군. 전략적으로 알아둬서 손해 볼 건 없을 테니까.'

그리고 두 번째 궁금증은.

"하인트 교구장과 가우리엘, 아니, 가우론은 어디 있지?"

내 물음을 들은 크라우스는, 저 수풀이 우거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켄타우로스 놈들의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에, 저쪽으로 달려갔네. 이곳은 로한 경이 있으니 문제없을 거라고 하면서. 느낌상 뭘 쫓아가는 것 같았는데......뭔지는 모르겠군."

"쫓았......다고?"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크라우스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 * *

의문을 해소할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직접 가 보는 것.

그것뿐이었다.

해서 나는 크라우스에게 부상자들의 관리와 마을의 일을 맡겨두고.

북쪽의 숲으로 향했다.

분명히 그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마을을 내팽개치고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틀리지 않았다.

"이 미개한 놈들이! 감히 누굴 구속하려 드느냐!"

저 멀리서부터.

가래 끓는듯한 기분 나쁜 목청이 들려왔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한 거신이 크뢰이튼과 그렌델의 마법에 묶인 채로 바닥에 구속되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 몇 구의 트롤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다.

더불어 주변은 쑥대밭이 되어 전쟁터가 따로 없었으니.

이곳 역시 나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가우리엘이었다.

가우리엘은 나에게 다가와.

바닥에 엎어진 거신이 듣지 못하도록 작게 속삭였다.

"여기 온 걸 보니, 마을 쪽은 잘 수비를 된 것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가 없지는 않았지만......일단락 되긴 했다."

"후우. 이런 야밤에 기습이라니. 예상을 못 하였네. 내 불찰이야."

"저놈들이 작정하고 기습을 하는 걸 무슨 수로 대비를 한다는 건가."

나의 가벼운 위로에.

가우리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마음이......무거웠거든."

"그나저나. 저놈은 누구지?"

"창을 던지는 거신, 바루툼. 전쟁의 거신이라고도 불리우는 자이네."

"바루툼이라면......"

나는 고개를 돌려 놈을 쳐다보았다.

'안테아 대륙에 있던 당시에 갑자기 하늘에서 나를 향해 떨어졌던 창. 그때 분명 그게 바루툼의 창이라고 그랬는데. 저놈이었던가?'

한 방 먹을 뻔한 빚도 갚아줘야 했기에.

내가 직접 나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해서 나는 가우리엘에게 질문을 던졌다.

"생포한 걸 보니, 뭐라도 캐 볼 생각인 건가?"

"그렇다네. 크로토스의 부활은 아직 멀었을진대, 거신들은 물론이요. 몬스터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잖나.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일어나는 중인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일세."

"그래. 확실히 내가 봐도 이상하긴 하니까."

우리의 시선은 동시에 바루툼에게 향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더 의견을 물었다.

"내가 해 봐도 되나?"

"그대가?"

"나도 몰랐었는데. 그런 쪽에 재능이 좀 있더라고. 내가."

"그, 그런가?"

"음."

"그럼 그렇게 하세."

바루툼의 신병을 인계받은 나는.

휘파람을 크게 불었고.

휘이이익!

그 신호를 들은 페가수스가 저 멀리서 하늘로 솟아올랐다.

녀석은 공중에서 천천히 선회를 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로 직선으로 쏘아지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닌.

쿵, 쿵!

"나올, 지금 도착이다!"

나올에게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한편, 바루툼은 갑자기 나타난 나올을 보며 반색을 하였다.

"나올! 잘 됐구나! 당장 이 미개한 놈들을 쓸어버리고, 날 풀어라! 어서!"

하나 내 덕분에 눈까지 되찾은 나올은.

이미 이쪽으로 돌아선 지 오래였으니.

바루툼의 말에는 쳐다도 보지 않던 나올이.

내 한 마디에.

"나올. 시끄러우니까 일단 기절 좀 시켜라."

"알겠다! 형님!"

움직였고.

주먹을 꽈악 말아 쥔 나올이 다가오자.

바루툼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 나올! 지금 뭐하는 짓이냐! 바르나우가 알기라도 했다간 당장에 네게......"

"시끄럽다! 기절해라!"

나올의 주먹은 자비 없이 냅다 바루툼의 턱에 꽂혔다.

퍼어어억!

* * *

"끄으으으으......!"

정신을 차린 바루툼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암흑뿐.

그는 자연스럽게 몸 상태부터 살폈다.

팔과 다리를 슬쩍 움직여보려 했지만......

'역시나.'

몸은 꽁꽁 묶인 채였다.

무릎이 꿇린 자세로, 팔은 뒤로 구속이 되어 있었다.

그 상태로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다음으로 살핀 것은 주변 상황이었다.

눈동자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보았건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시야는 암흑.

'이것들이......날 어디다가 가둔 것이지?'

그때.

"여기가 어딘지 궁금해하는 것 같군."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알 수 있었다.

그 로한이라는 놈이리라.

하지만 바루툼은 이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방금 전 그 목소리로 한 가지 정보를 알아내었기 때문이었다.

'목소리가 울리는군. 이거......분명히 동굴이다!'

지하 동굴인지, 아니면 지상의 동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상관도 없었다.

이곳이 동굴이라면 분명 바위의 거신, 안테이오스가 알아챌 것이고.

그렇다면 분명히 안테이오스가 이곳을 덮칠 것이었으니까.

거인족에서 거신이 된 자신과 달리, 태생부터 거신이었던 안테이오스는.

덩치도 훨씬 크고, 능력도 압도적이었다.

저놈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안테이오스의 상대가 될 수는 없을 터였다.

'나를 살려두었다는 건, 듣고 싶은 정보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는 이것을 오히려 역이용할 생각이었다.

'약간의 정보를 흘리면서 시간만 잘 끈다면......이곳은 곧 피바다로 변모할 것이로다! 크흐흐흐.'

그런 속내를 숨기며.

바루툼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때마침 로한이 말을 걸어왔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놈들이. 왜 지금에 와서 악마들까지 엮어가지고 날뛰는 것이지?"

"네놈들은 모르겠지. 원래 이 땅의 주인은 우리 거신족이었다. 그리고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도 우리들 거신족의 것이고. 자신의 물건을 되찾는 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지?"

"물건? 모든 생명들도 다 네놈들 물건인가?"

"당연하지.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린다. 지금 이 순간, 인간들이 죽어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거신을 숭배하지 않는 필요 없는 물건이기에. 그래서 폐기처분하는 것이로다."

"흥미롭네."

그에 로한은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바루툼은 혼란스러웠다.

'뭐지......흥분하게 만들 생각이었건만. 오히려 즐거워 보인다니. 도대체 정체가 무엇......!'

다음 순간.

로한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그러자 과거의 한 기억이, 바루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건 분명히......악신 그룬트의 그것이었다!

'미, 미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저 인간 나부랭이의 눈에서 그룬트의 기운이 느껴진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룬트가 부활하는 것은.

바루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고.

로한은 거침없이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마음에 들어. 음.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다면 필요가 없는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네놈들의 왕이 될 생각이다. 크로토스를 포기하고 나에게 붙는 게 어떤가? 과거 내 실력은 이미 잘 보았을 터. 영원히 부활하지 못할 크로토스보다야, 내가 낫지. 안 그래?"

"회, 회유하는 것이냐?"

"회유? 푸훕!"

로한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소름 돋는 말을 내뱉었다.

"악신은 협상 따윈 하지 않아."

그는 다시 미소를 지우고는.

"내가 부탁하는 걸로 보여?"

붉은 눈동자를 살벌하게 번뜩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