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대련 한 번만 함세!
디오라지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한 항구 마을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오랜만이지요? 로한 경. 그리고......가우론 경."
하인트 교구장은, 가우리엘을 보며 가우론이라 칭하였다.
"오랜만에 뵙소. 하인트 교구장."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 이름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가우리엘의 가짜 이름이었다.
우리끼리 있을 땐 어차피 이미 다 아는 사이이기에, 그저 가우리엘이라 불렀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대천사라는 게 밝혀지면 곤란한 경우가 종종 있을 터였다.
사람들의 입에서 대천사가 여기로 갔다더라, 저기로 갔다더라 하는 식으로 소문이 퍼진다면.
악마들이나 거신들에게 타겟이 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해서 그는 가명을 썼던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일곱 기사단의 인원들은.
별 생각 없이 가우리엘을 향해 인사를 하였다.
그저 평범한 늙은 기사를 보듯.
"처음 뵙겠습니다. 경."
"잘 부탁드립니다."
이로써 나는 처음으로 모든 일곱 기사단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모르돈처럼 내가 죽여버려서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기사단의 인원도 있었지만.
그래도 익숙한 얼굴의 기사 역시 있었다.
안개를 다루는 크라우스가 바로 그였다.
"이야. 그새 더 늠름해진 거 같은데?"
오래간만에 만난 크라우스는.
여전히 동네 아저씨 같은 수더분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꽤나 빡세게 수련을 한 모양이군.'
그의 기세는, 이곳에 선 다른 일곱 기사단의 기사들보다도 압도적이었다.
실제로 다른 기사들 역시 은연중에 크라우스를 수장으로 두고 있는 듯하였고.
"이제는 예전보다는 쉽게 보기 힘들걸? 하하하하하!"
그런 그가, 내게 저런 소리를 내뱉으니.
기사들의 표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모양으로 변하였다.
나야 굳이 기세를 끌어올리지 않았기 때문일 터.
일정한 경지를 넘어서서 더 높은 경지로 가면 갈수록, 실제로는 기운을 더 갈무리하게 되니.
그곳까지 발을 들여보지 못한 저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붙어보지 않고 상대의 경지를 알아채는 것만 해도, 웬만한 자들은 감히 건드리지도 못할 영역일 터였다.
그런데 그 위의 영역?
아마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은 한은 믿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내가 크라우스보다 얼마만큼 더 강하니 마니 떠벌리기엔 귀찮았기에.
나는 그저 그들이 보내는 의심의 눈초리를 넘겨버렸다.
굳이 시비를 걸어오는 인원도 없고.
게다가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것에 신경을 쓸 틈도 없었다.
하인트 교구장이 가우리엘에게 하는 이야기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경께서 예측하신 대로 각지에서 이 종족들이 일어서, 총공세를 가하고 있습니다. 안테아 대륙의 다섯 왕국은, 위기감을 느끼고 우리 교단에 요청을 보내어 온 상황입니다. 전란이......매우 심각합니다."
"그런 와중에 일곱 기사단의 인원들을 전부 끌고 이 레시아 대륙까지 와버렸으니......불만이 적지는 않았겠군."
"설득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하하. 레시아 대륙에 넘어가서 이 사태의 근원을 쓰러뜨려야 모두 끝이 난다고 열심히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지 뭡니까. 덕분에, 이단 심문관들은 함께 데려오지 못하였습니다."
가우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안내했다.
"그래. 그쪽에서 수비 병력은 있어야지. 이야기가 길 터이니. 일단은 숙소부터 가세나. 기사들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짐이라도 풀고 마저 이야기함세."
"그리하지요."
* * *
디오라지는 주민 대부분이 어업으로 먹고사는.
작은 항구 마을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아직 전쟁의 여파가 닿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렇다 보니 큰 숙소는 없어, 우리는 단출한 여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곳이 지금 우리가 묵고 있는 곳이네. 마을 내에서는 가장 큰 곳이라 하더군."
여관을 둘러본 하인트 교구장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고즈넉하니, 나쁘지 않군요. 하하. 예전에 이단 심문관으로 활동하던 당시에는, 여러 마을을 돌다 보니. 이런 곳에도 익숙합니다."
가우리엘의 정체를 아는 하인트 교구장이야, 그에게 예절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걸 모르는 기사단원들은.
숙소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해내었다.
"이거야 원. 곧 쓰러지겠군."
"잠이나 잘 수 있을는지. 더 피로해지지 않으면 다행이겠어."
가우리엘은 애써 그 잡음을 못들은 채하며.
그들을 배려해주었다.
"그럼 일단은 여독도 풀 겸. 식사부터 하는 게 어떻겠소. 기사들 역시 먼 길 오느라 피로할 터인데. 배부터 채우면서 이야기합시다."
"알겠습니다. 그럼 짐만 풀고, 다시 내려오도록 하지요."
"그러시오."
그들이 잠시 짐을 풀기 위해 올라간 사이.
주방에서는 가우리엘의 요청에 의해 식사가 마련되고 있었다.
아쉽게도 식사 역시 그다지 훌륭한 편은 못되었다.
물론 입맛이 딱히 까탈스럽지 않은 나에게는 이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해산물을 좋아하기도 하고.
하나 모두 나와 같을 수는 없었으니.
짐을 풀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기사단원들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왕실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던 일곱 기사단의 기사들 몇몇에게는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식 꼬락서니가 영......"
"이런 걸 먹고, 누구랑 싸우란 건지. 쯧."
그들의 반찬 투정에.
크라우스가 나섰다.
"전장에서 그럼 진수성찬이라도 먹을 생각들이었어? 이곳에서 이겨서 돌아간다면, 이전보다도 더 훌륭한 밥상이 기다릴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결국 그들은 한숨을 내쉬며 스푼을 들고 꾸역꾸역 입에 음식을 집어넣었다.
보는 사람마저 식욕이 줄어들 정도로 억지로.
그렇게 불편한 식사 자리가 시작되었다.
* * *
식사 자리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갔다.
"아를렘 님을......마주하셨다고요? 이 중간계에서?"
일곱 기사단의 인원들은 하인트 교구장과 가우리엘의 대화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아를렘의 이름이 언급된 순간부터 다들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보였다.
가우리엘은 그들의 반응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며 대답을 하였다.
"안테이오스를 처치하신 후. 디아즈 경과 앤드류, 그리고 두 뱀파이어 로드들에게 가르침을 하사하시고자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네."
"허어......그 앤드류 녀석도 말입니까?"
게다가 같은 일곱 기사단의 일원인 앤드류의 이름까지 튀어나오자.
이제는 기사들의 포크, 나이프가......멈추었다.
"디아즈 경의 잠재력에 감탄하시어, 그녀에게 먼저 말씀을 꺼내셨네만. 앤드류 그 친구가 자신도 꼭 가고 싶다고 해서 말이네."
이야기를 듣던 크라우스는.
다른 기사들은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앤드류가 간다고 할 때, 자네도 따라가지 그랬나? 그 아를렘 님이라면......신격 중에서도 최상위 신일진대. 아까운 기회이잖아. 혹시 그땐 자리에 없었나?"
"함께 있었다."
"엥? 그런데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이 친구야 아무리 숫기가 없기로서니, 그런 기회를 놓치면......"
"이미 갔다 왔다, 나는."
"......?"
"다녀왔다고."
"지, 진짜로?"
끄덕.
나는 고개를 움직이는 것으로 마지막 대답을 대신했고.
크라우스는 그때부터 조르기 시작했다.
"대련 한 번만 함세!"
까먹고 있었네.
이 아저씨도 예전부터 대련 타령을 했었다는 걸.
* * *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대련 타령을 하는 크라우스에.
나는 결국 동의를 하였다.
한 번은 해야 끝날 것 같았기에.
그러면서도 동시에 스스로의 변화에 놀랍기도 했다.
'예전에는 혹여 대련을 하다가, 진짜 실력이 들통 날까 봐 두려워서 도망 다니기 바빴는데......'
지금은 솔직히, 대련을 한다고 해도 자신이 없었다.
패배할 자신이.
무조건 내가 이긴다는 확신이 온몸에 차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나는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변화를 겪었다.
당시의 나와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스름한 밤.
나와 크라우스의 진검 대련이 결정되자.
모든 이들이 구경을 나왔다.
가우리엘은, 나를 제외한 다른 일곱 기사단들의 전력을 파악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고.
하인트 교구장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은, 내 실력을 파악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한편.
가장 흥분을 한 채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크라우스였다.
"어디, 그럼. 소화나 시킬 겸 살살 한번 해 보자고. 선공은......"
"양보하겠다."
"하하. 이거, 천하의 크라우스도 로한 앞에서는 선공을 양보받는 입장이라 이거지? 약간은 자존심 상하는데? 혹시 모르잖나? 내가 그간 꽤나 큰 성장을 했을지도.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곤란하다고."
"나도 성장은 했으니까."
"후후. 좋아, 좋아. 그럼 그 양보, 거절하지 않겠네. 다만......쉽지는 않을 것이야!"
파앗!
그 말을 마지막으로.
크라우스는 발을 굴렀다.
그 움직임에, 다른 일곱 기사단의 인원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내뱉었다.
"눈으로 좇기도 힘든 움직임이다......!"
"역시 크라우스 경이로군."
"저런 속도가......가능하다니!"
하지만 가우리엘은 큰 감흥이 없어 보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이전보다는 빨라진 것 같기는 한데......
'이걸로는 모자라.'
거신을 상대하기에도.
나를 상대하기에도.
큰 모자람이 있어 보였다.
나는 가볍게 몸을 비틀며 첫수를 피해내었고.
부우웅!
크라우스의 검격은, 허공을 갈랐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어깨로 그의 가슴팍을 툭 쳐서 밀었다.
파파파팟.
크라우스의 걸음이 뒤로 밀리며.
다시금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그 광경에.
관전을 하던 기사단의 기사들이,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하였으니.
"바, 방금 어떻게 된 것이지?"
"크라우스 경이 일부러 거리를 벌린 것뿐인 거 같은데?"
대부분의 기사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였으나.
단 한 명의 기사만이 제대로 된 눈을 가진듯하였다.
"아니야......분명이 무언가 기술을 써서 강제로 크라우스 경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확실히 본 게 아니면 믿지 않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지금 역시 그러하였다.
"크라우스 경을 물러서게 만든다고?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라고 하는 건가?"
"그러게나 말일세. 잘못 본 거겠지."
모두 그 한 기사의 말을 무시할 때.
나는 진실을 보았던 그 기사의 얼굴을 살폈다.
'그래도 제대로 된 녀석이 하나는 섞여 있네.'
그 얼굴을 확인한 나는.
다시 크라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충분히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반격을 들어올 만한 타이밍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크라우스는 진격을 하지 않았다.
검을 세워 들고는.
눈을 부릅뜬 채,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그것은 힘의 격차를......체감한 자의 얼굴이었다.
그는 그 와중에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확실히 공포를 느끼고 있음에도, 전의를 잃지 않는 걸 보면.
저자 또한 인물은 인물이었다.
크라우스는, 떨리는 목소리를 조심히 내뱉었다.
"이거......선공을 넘긴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