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그런 줄 알았지
안테이오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널브러진 차원 포식자를 쳐다보았다.
'진정......이만큼이나 바이칼의 천둥을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이건 하루 이틀의 경험으로는 불가한 것이로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로한이 보여주었던 그 검은 천둥으로 가득했다.
안테이오스가 알고 있는 검은 천둥은 단 하나였다.
검은 천둥을 다스리는 자.
혹은 먹구름을 피우는 바이칼.
그 거신 뿐이었다.
그 두 가지 이명을 가지고 있던, 검은 천둥의 신 바이칼은.
크로토스를 제외한다면 상위 거신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존재였다.
그 성격은 천둥보다도 훨씬 더 거칠었고.
덕분에 아를렘과의 전쟁에서도 가장 먼저 타겟이 되어, 가장 빠르게 죽었지만 말이다.
아를렘은 바이칼을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거신들의 입장에서는 기습을 당하며 시작을 했으니.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던 것이었다.
더불어 하필 가장 큰 전력 중 하나인 바이칼을 잃었으니......
결국 전쟁은 거신들의 패배로 끝이 났다.
그럴 정도로 바이칼의 위상은 거대했다.
혹여 바이칼이 살아있었더라면......이라는 가정이 생길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 무시무시한 힘이, 다름 아닌 로한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는 놈이다......'
분명 천둥의 거신 바이칼이 쓰던 그 힘과 결은 같았으나.
더 맹렬하며 거칠었다.
성격은 바이칼보다 조금 유한 것 같았지만.
그가 다루는 검은 천둥은 오히려 더 거세었다.
사나운 성정을 가졌던 바이칼의 천둥보다도 더.
지금처럼 아군일 때는 듬직했지만......
적이 될 것이라 생각해본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종국에 맞서야 될 놈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옳을 것이로다.'
안테이오스의 눈동자는 조용히 로한에게 돌아갔다.
공공의 적을 쓰러뜨린 놈이 방심을 한 지금.
이 순간만이 유일한 기회일 수도 있었다.
아를렘이 바이칼을 죽였듯이.
자신이 로한을 죽여,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승기를 가져올 유일한 기회가 눈앞에 떡하니 펼쳐진 것이었다!
한편 로한은 지금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저 차원 포식자의 시체에 집중을 하고 있었으니.
차원 포식자는 원래 이 차원에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스르르륵......
마치 얼음이 녹아 없어지듯, 시체마저도 남기지 않고 소멸하고 있었다.
로한은 그 시체를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기하겠지.
처음 보는 존재일 테니까.
그는 그대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어왔다.
"이게 차원을 집어삼킨다고? 믿기 어려운데."
"믿든 말든 사실이다. 아마 더 몰려올 테지."
"얼마나 많이 있는 것이지?"
"글쎄. 크로토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막을 방법은?"
"그 역시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오직 크로토스만이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있을지니. 그에게서만 옳은 답을 들을 수 있다."
"모른다는 소리를 길게 하는군."
"......"
대화를 하는 사이, 차원 포식자의 시체는 거의 다 사라졌다.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저 시체가 사라진다면, 로한의 시선도 자신에게로 돌아올 테니까.
그때가 된다면 기습은 어려울 터였다.
안테이오스는 조용히 손가락의 끝만을 날카롭게 다른 암석으로 변화시킨 후.
'지금이다......!'
완벽한 타이밍을 잡은 안테이오스는.
로한의 사각으로 들어간 후.
온 힘을 다해 팔을 뻗었다.
쐐애애애애애액!
* * *
나는 속으로 한숨을 지었다.
'이럴 거 같더라니.'
슬쩍슬쩍 내 뒤통수를 향해 안테이오스가 움직이는 그 순간부터.
나는 눈치를 챘다.
놈이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직전까지만 해도 저놈과 나의 사생결단이 이어지던 중 아니었던가.
차원 포식자라는 공공의 적이 끼어든 바람에 잠시 손을 잡기는 했다만.
그렇다고 해서 안테이오스가 더 이상 적이 아닌 아군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쐐애애애애애액!
결국 안테이오스는 나의 뒤에서 암습을 펼쳤다.
하나 나는 이미 제3의 눈을 이용해 그의 움직임을 전부 읽고 있었다.
저만큼이나 큰 덩치로 조용히 움직이는 게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조금만 조심한다면, 얼마든지 캐치할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차고 튀어 오르며, 뒤로 텀블링을 하듯 몸을 회전시켰다.
동시에 검을 휘둘렀으니.
서걱.
또 한 번 공간이 갈라지고.
안테이오스의 손목이 잘려나갔다.
"으아아아악......!"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지를 않는 건지."
"제, 젠장......!"
이제 양팔을 잃은 안테이오스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기습조차 실패했으니 이제 놈에게 남은 수단 따위는 없으리라.
"같이 싸운 공을 생각해서 잠시 살려줄까 생각도 했었건만. 제 발로 그걸 차버리는구나."
호시탐탐 뒤통수를 노리는 놈을 살려줄 정도로.
나는 자비심이 충만한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차원 포식자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것 같고.
더 이상은 얻을 게 없다 판단한 나는.
"이제 끝을 내주마."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안테이오스는 아직 포기를 한 것 같지 않았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가!"
그의 주변으로 폭풍과도 같은 모래바람이 거세게 일어났다.
* * *
콰아아아아아아!
거친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자.
안테이오스는 마치 모래 인간처럼 변해 있었다.
덕분에 잘린 팔도 전부 복구가 되어 있었으니.
"크흐흐흐......이것이 바로 네놈과 내 신격의 차이로다."
안테이오스는 기세가 등등해진 채.
나를 내리깔아보고 있었다.
잘라낸 팔은 다 회복이 되어버렸고.
차원 포식자에게 꿰뚫렸던 복부의 구멍은 어느새 메꾸어져 있었다.
게다가 몸을 이루는 것도, 바위가 아니라 모래가 되어 베기도 힘들어 보였으니.
'하마터면 크게 당황할 뻔했네.'
아마 이런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나였더라도 꽤 놀랐으리라.
그러나 지금껏 아를렘, 포세이튼과 함께였던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미 안테이오스의 이런 능력에 대해 충분히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 파훼법 역시 진작에 준비를 해두었던 것이었다.
씨이익.
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자.
안테이오스는 웃음을 멈추었다.
"뭐가 우스운 것이냐?"
"정말이지, 어떻게 이 정도로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지를 않는 건지 놀라워서."
"뭐, 뭣이?"
"이쯤 되면 내 머릿속에 한 번 들어왔다 나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인데."
"헛소리를......!"
안테이오스는, 모래로 변한 그 이점을 이용해.
다시 생겨난 팔을 마치 창처럼 뾰족하게 변화시켜 내게 내질렀다.
그러나 나는 뒤로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놈의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그런 나를 본 안테이오스는, 다리를 들어 나를 밟으려 하였다.
"감히 거신에게 대항하는 어리석은 자여! 이제 그만 그 어리석음의 댓가를, 죽음을 맞이할 시간이로다!"
나는 정면으로 튀어 나가던 방향을 살짝 틀어.
안테이오스의 디딤발을 향해 움직이며.
동시에 검을 뒤집어 들고는 바닥에 꽂은 채, 질주를 이어나갔다.
그에 내가 지나간 바닥이 갈라졌으니.
안테이오스는 그 모습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내 생각을 읽어내지는 못했는지.
그대로 발을 내리찍었다.
그 순간.
내가 잘라버린 바닥에서.
지하수가 솟구쳤으니.
물의 정령왕이 가진 권능을 이용한 나는, 그 물줄기를 더 강하게 끌어올렸다.
콰아아아아아아!
삽시간에 솟아오른 물줄기는.
내 손짓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안테이오스에게 쏘아졌고.
"이, 이럴 수는......! 푸헉!"
모래 거인을 덮쳐버렸다.
* * *
"콜록! 콜록!"
한 차례 거대한 지하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이젠, 나올보다 작아진 안테이오스가 진흙 인간이 되어 철퍽거리며 물웅덩이 바깥으로 기어나오고 있었다.
"내 이런 굴욕을 맛보게 되다니......!"
태산과도 같아 보이던 안테이오스는 무릎을 꿇은 채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놈의 앞에 서서 코웃음을 쳤다.
"거신도 별거 없네."
으드득!
그러자 놈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인적으로 이 가는 소리를 그리 좋아하진 않기에.
나는 다리를 힘껏 휘둘러, 놈의 턱을 날려버렸다.
퍼억!
안테이오스의 진흙 머리가, 폭발하듯 흩날렸다.
다만 놈은 곧 다시 진흙으로 된 머리를 복구시켰다.
그래도 통증은 있는 모양이었다.
"커헉!"
"재밌네. 언제까지고 죽지는 않으면서, 고통만 느끼는 건가?"
나는 다시 한 번 안테이오스의 머리를 날렸고.
퍼어억!
다시금 놈의 머리는 회복되었으니.
"어어어억......!"
고통은 끝이 나지 않았다.
그런 안테이오스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빚을 갚아주기엔 충분하겠는데?"
피코를 비롯해 다른 이들에게 거친 대접을 한 것에 대한 빚.
내 말의 뜻을 한 번에 알아들은 안테이오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자, 잠깐! 내, 내게 이래서는 아니 된다! 나, 나를 이렇게 약화시켰다가는......더 많은 차원 포식자들이 이곳으로 찾아올 것이다!"
안된다는 소리를 무시하고 놈의 머리를 또 날려버리려던 찰나.
나는 다리를 주춤 멈춰 세웠다.
안테이오스의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놈의 팔이 잘리자마자, 바로 차원 포식자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으니까.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차원 포식자는 꽤나 까다로운 상대였다.
안테이오스보다도 더.
그런 놈들이 여럿 나타난다면......
상황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음이었다.
'차원 포식자라는 놈들에 대해 나도 아는 게 없으니, 함부로 뭘 할 수가 없겠군......'
그런데 그때.
한 목소리가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었으니.
"나 역시 그런 줄 알았지. 네놈들을 전부 죽여버린다면, 차원 포식자들이 이 땅을 침범할까 싶어서. 해서 전쟁에서 이기고 난 후에도, 네놈들을 끝까지 쫓지도 않았던 것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아를렘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아를렘은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
내가 딱 원하던 말을 꺼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더군. 네놈들의 생존과 차원 포식자의 침략은 전혀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크로토스 때문에 우리 차원이 공격받게 되었으니. 거신 안테이오스. 그대의 그 발언은 허상이로다."
나는 다시 안테이오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하였다.
"그렇다는데?"
안테이오스는, 분노하며 울부짖었다.
"아, 아니야! 그럴 순 없어! 그럴 리가 없단 말이다아아아! 그, 그 검 거두어라!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
촤악.
내 검은, 놈의 헛소리까지 전부 들어 줄 인내심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