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잠시, 동맹
공간을 억지로 깨부수며, 이차원의 존재가 꿈틀꿈틀 넘어오는 장면.
그것은 매우 혐오스러운 느낌이 드는 장면이었다.
나와 안테이오스가 미처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이미 그놈은 문어와 같은 움직임으로 작은 차원의 틈을 통해 흘러 넘어왔으니.
공포에 질린 안테이오스의 떨림이, 나에게까지 넘어오고 있었다.
"와, 와버렸어.....! 방금 그 공격 때문에......내 기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놈이 눈치를 챈 거라고!"
안테이오스조차 겁을 먹게 만든 그 괴물은.
처음에는 육지에 던져진 문어처럼, 바닥에 척 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촉수들을 서로 꼬으고 뭉쳐가며 육체의 모양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어느새 완전히 하반신까지 완성해내어 무릎을 세우고 있었다.
키는 고작해야 드워프 정도.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괴물 놈에게서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그 흐느적거리는 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린지 똑바로 설명해."
"너희는 우리가 악으로 보이느냐? 그래. 어리석은 그 동태 눈깔은 그렇게 보이겠지. 하나 설사 우리가 악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몇 남지 않은 우리 상위 거신은 필요악이다! 우리가 없었더라면 어차피 이 세상은 저놈들에게 먹혔을 거라고!"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다."
나는 다시 검을 세워 들었다.
어차피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을 거라면, 살려 둘 필요도 없을 테니까.
"자, 잠깐! 지금은 우리들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 저놈을 처리하는 게 먼저라고!"
"글쎄? 네 도움이 필요할까?"
"아무것도 모르는군. 크로토스까지 봉인된 지금. 유일한 거신족인 나를 죽인다면, 끝도 없는 숫자의 놈들이 몰려올 것이다. 저들은 질서가 무너진 세상을 정리하는 자. 지금처럼 신격들이 제대로 지배하는 세상을 컨트롤하지 못하는......커헉!"
안테이오스는 그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였으니.
그 괴물 같은 존재의 촉수가.
안테이오스의 복부를 꿰뚫은 까닭이었다.
저렇게 유연해 보이는데, 바위 덩어리인 안테이오스의 복부를 꿰뚫다니......!
'그것도 단 한 번에!'
하나 보통의 생명체들과 달리.
안테이오스를 죽이기에는, 그걸로는 모자람이 있었으니.
안테이오스는 발을 들어 올려.
그 괴물 놈을 힘껏 짓밟았고.
콰아아아아앙!
땅이 움푹 패일 정도의 강한 충격에.
지축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촤르륵! 촤르륵!
놀랍게도 안테이오스의 발아래에서는 다시 촉수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며.
그의 다리를 휘감기 시작하였다.
뚜두둑! 뚜둑!
그 조여드는 힘도 보통이 넘어서는 듯.
안테이오스가 신음을 흘렸다.
이거 아무래도......안테이오스가 겁을 먹었던 게, 완전히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끄으으으으윽! 이, 일단 이 괴물부터 죽여야 한다! 지금 우리끼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그는 점점 조여들어 가는 다리를 움켜쥐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읍소하였다.
'저대로 놔둔다면 안테이오스를 처리할 필요는 없겠지만......'
저 촉수 괴물까지 혼자 상대해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에 나는 조금 더 안전한 방향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니.
"잠시, 동맹이다."
* * *
"일단 이놈 좀 떼 내어라! 당장!"
도움을 요청하는 와중에도 명령 어투라니.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때가 아니었다.
저 정체를 알 수조차 없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나마 저 괴물에 대해 알고 있는 안테이오스가 필요했으니까.
더불어, 아군이 된다면 안테이오스는 큰 힘이 될 것이었다.
나중에 버릴 땐 버리더라도.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안테이오스의 다리를 향해 쏘아져 내려갔다.
'일단은 생긴 건 문어 같이 생겼으니까......'
수중 생물에게 효과가 강력한.
검은 천둥을 일으키며.
우르르릉......콰과강!
그것을 내리꽂았으니.
쩌저저정!
엄청난 굉음과 함께.
안테이오스의 다리가 감전이 되고.
"끄으으으으윽!"
안테이오스의 고통 섞인 신음과 함께.
파앗!
괴물 역시 놈의 다리에서 떨어져 나와 거리를 벌렸다.
'효과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괴물 놈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놈의 몸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는 있었으나.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닌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머리통은 달려 있는데, 얼굴도 없고.
얼굴이 없으니 입도 없고.
입이 없으니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무슨 저런 괴상한 생물체가 다 있는 건지.
진짜 괴물이라는 말이 더할 나위 없이 딱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내가 녀석을 살피는 것을 본 안테이오스는.
다리를 쩔뚝거리며 나의 옆에 섰다.
"네놈......어째서 바이칼의 천둥을 쓸 수 있는 거지?"
"지금 그게 중요한가?"
"......"
안테이오스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지금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을 알려주었다.
"효과는 있을 것이다. 바이칼의 천둥은, 역사적으로도 언제나 놈들에게 치명타를 입혔었으니까."
역사 이야기까지 들먹이니.
안테이오스가 진정 오래된 존재이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는 저 괴물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니.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 나는 조금 더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저게 무엇이지?"
"이차원에 떠다니며, 차원들 잡아먹는 놈들이다.우리는 저들을......차원 포식자라고 불렀지."
"차원 포식자라......"
"태초에 크로토스가 혼돈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며, 이 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때 당시에도 놈들이 한 번 모습을 드러내었지. 우리는 크로토스의 지휘 아래, 놈들과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많은 피해를 입은 후 승리를 거머쥐었지.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승리를 뜻하는 건 아니었다. 크로토스가 말하였다. 저놈들은......무한하다고."
"무한하다고? 쫓아내어도, 죽여도 다시 돌아온다는 말인가?"
"실제로 당시 전쟁에서도 크로토스의 손에 적지 않은 수의 차원 포식자들이 죽었다. 하지만 지금, 저놈이 또 이곳에 서 있지 않은가."
이야기를 듣던 나는.
뭔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자세히 들어보면......안테이오스도 정확히 저놈들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크로토스만은 잘 알고 있어.'
무한한지, 유한한데 숫자가 많은 것뿐인지.
대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하나 그것은 지금 안테이오스에게 물어도 알아낼 수 없을 터였다.
결국 비밀은......
'크로토스라는 놈이 쥐고 있다는 건가?'
의구심이 마음 한켠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 * *
그 역시 일단은 눈앞의 저 괴물부터 처리해야 확인할 수 있겠지.
일의 우선순위가 명확한 이상.
다음 할 일 역시 명확하였다.
나는 그 일을 해내기 위한 파훼법을, 안테이오스에게 물었다.
"그래도 본 건 있을 테니, 죽이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겠지?"
"크로토스는 바이칼의 그 검은 천둥을 잘 이용했다. 검은 천둥으로 놈들의 몸속에 수분까지 싹 날려버리고, 산산조각내는 방법을 썼지."
"확실한 거지?"
"그렇다. 네가 먼저 돌진을 해서 그 천둥을 한 방 먹이면, 내가 마무리를 하겠다. 방심하지 마라! 비록 저리 자그마하여 만만해 보일지라도, 가장 강한 개체이니까."
그는 나를 선봉으로 보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누구 마음대로?
어림도 없지.
굳이 검은 천둥은, 딱 달라붙지 않아도 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대로 선 채로 팔을 한 번 휘둘렀고.
쩌저저저정!
검은 천둥이 하늘에서 내려꽂혔으니.
고개를 뒤로 비틀어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말한 대로 한 방 먹였는데. 이제 네 차례 아닌가?"
"크으으윽......!"
"빨리 나서지 않으면, 저놈 회복할 거 같은데?"
"제, 젠장! 알겠다! 내가 나서지. 대신......예상치 못하게 놈이 회복하면 지원을 약속해라!"
"돕지 않을 생각이면 아까 다리가 묶였을 때 그냥 내버려 뒀겠지."
"말은 잘하는군!"
안테이오스는 결국 혀를 차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쿵! 쿵!
단 두 번의 발돋움 만에 거리를 줄인 거신 안테이오스는.
"죽어라아아아!"
동시에 안테이오스의 팔은, 흑요석처럼 날카롭게 변했으니.
촤라라락.
지금까지 보여주던 주먹과는 달리, 훨씬 날카롭고 위협적이었다.
아마 내게 쓰기 위해 숨겨둔 패들 중 하나이리라.
저건 확실히 나라고 해도, 한두 방 정도 맞아줄 순 없을 터였다.
'지독한 걸 감추고 있었네.'
그런 히든카드까지 꺼냈다는 건.
그만큼 저 차원 포식자라는 이름의 괴물이 위협적인 존재라는 의미였다.
'저래 봬도 만만한 놈은 아니라 이거지?'
그러는 사이 안테이오스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차원 포식자 역시 위험함을 느끼고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아직 검은 천둥의 여파가 남은 탓인지, 확실히 둔해져 있었고.
그 정도로는 안테이오스를 따돌릴 수 없었다.
저 거신은, 둔하게 생기긴 했어도 엄청나게 민첩했으니.
상대해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뒤를 붙잡힌 차원 포식자의 머리 위로.
안테이오스의 주먹 폭격이 쏟아졌다.
콰아아앙!
그것이 일격이 끝이 아니었다.
안테이오스는 고작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만 가지고도, 엄청난 속도로 연타를 내려찍기 시작했다.
그 한 방으로는 차원 포식자가 죽지 않다는 뜻이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살인적인 연타.
팔이 하나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지상에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어.
나는 살짝 공중으로 떠올라야 했다.
거의 주변의 지형 자체가 바뀔 때까지 한참을 내려친 안테이오스는.
"후욱......! 후욱......! 후욱......!"
거친 호흡과 함께 겨우 손을 멈추었다.
그는 박살이 난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해치운, 건가?......"
그때.
안테이오스는 뭔가 잘못됨을 느꼈는지 움찔거렸다.
"어엇!"
제3자의 위치에서 지켜보던 나는 알 수 있었다.
놈의 팔뚝에, 아직 살아남은 차원 포식자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몸이 갈가리 찢겨, 상체의 일부만 남았음에도.
괴물 같은 그놈은 죽지 않은 채였다.
"이, 이놈이!"
심지어 차원 포식자는, 흐물거리면서 안테이오스의 몸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하였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안테이오스가 팔을 휘저었다.
"떠, 떨어져라! 감히! 이놈이! 떨어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차원 포식자는 안테이오스의 안으로 점점 더 깊게 들어가고 있었으니.
"으, 으아아아아! 도, 도와줘......!"
안테이오스는 고통에 소리를 질렀고.
나는 빠르게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
안테이오스의 팔에 손을 대고.
파지지지지지직!
꽤나 큰 출력의 전력을 때려 부어 버리자.
"으그그그그그그......!"
안테이오스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철퍽.
바닥에 슬라임처럼 녹아버린 차원 포식자가 죽은 채로 떨어졌다.
나는 안테이오스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약속은 지켰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안테이오스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