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재미가 쏠쏠하다니까?
터덜, 터덜.
가우리엘을 필두로 한 일행들의 움직임은 패잔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테이오스가 미친 듯 날뛰는 탓에 옷은 넝마가 되었고.
누구 할 것 없이 군데군데 긁히거나 찢어진 상처도 아직 남아 있었다.
더불어 섬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로한, 트레이톤.
두 명의 인원이 결손된 상태였다.
그 둘의 공백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돌덩이처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 다들 서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 뻔히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 침묵이 더더욱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있긴 했다.
그에 먼저 말문을 연 것은 가우리엘이었다.
"이 근처가 아닌가?"
그 물음에.
오르헬이 억지로 입을 떼었다.
"어어. 여기 근처 어디 동굴 같은 게 있었던 거 같은데."
그들은 나무가 빼곡한 숲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이유는 하나.
일단 나올부터 찾고자 함이었다.
시력을 잃은 나올을 인솔해 숨겨두었던 것은 오르헬이었기에.
오르헬과 가우리엘이 최선두에 서서 길을 뚫는 중이었다.
둘은 로한이라는 리더를 잃은 이 상황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하나 막상 로한의 위치에 서 보니.
이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타인의 통솔을 받들 이들이 아니었다.
그만큼 강자들이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그만큼 자존심도 강한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통솔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한 힘을 가진 로한이 적임자이긴 했다.
물론 가우리엘이 그 정도의 자격도 없진 않았다.
오르헬도 그러하고.
다만......이미 신격에 도달한 로한의 빈자리를, 가우리엘이 완전히 채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더불어 로한은 오래도록 저들을 이끌기도 하였고.
로한에 비해서 가우리엘은, 최근에야 합류한 인원이었으니.
오르헬은 가우리엘과 달리, 시간적으로는 함께한 기간이 짧지 않았으나.
그가 가진 힘을 나누어준 것이 로한 아니던가.
가우리엘의 능력과 오르헬의 시간을 합쳐야만이 겨우 로한에 어느 정도 가까워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걸 가우리엘과 오르헬 둘 역시 잘 알고 있기에 함께 선두에 선 것이었고.
다른 누구도 아닌, 가우리엘과 오르헬이기에 그나마 저들도 따르는 것이리라.
지금껏 로한이 짊어져 왔던 자리의 무게감을 느끼며.
그들은 나올이 몸을 숨긴 동굴을 찾아내었다.
오르헬은 그 동굴을 가리켰다.
"가우리엘. 저기다."
"음. 가지."
"어어."
그렇게 그곳에 발을 들이자.
후웅!
검날 하나가 느닷없이 날아들었다.
가우리엘조차 짧게 감탄을 할 정도의 날카로운 일격.
비록 체력이 빠진 상태이기는 하나, 그 공격 자체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가우리엘은 빠르게 고개를 뒤로 빼, 첫 공격을 피하고.
반격을 준비하였다.
분명 이 정도 상대라면 곧이어 다음 수도 날아올 것이기에.
그것까지 감안을 해야 했다.
그런데.
"가우리엘......님?"
다음 공격은 날아오지 않았고.
가우리엘은 그제서야 어둠 속의 상대를 알아보았다.
"디아즈 경......"
하지만 적을 만난 것보다 가우리엘의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그녀에게, 로한의 소식을 전해야 했기에.
* * *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내뱉는 로한을 쳐다보며, 포세이튼이 팔짱을 낀 채 소리를 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아를렘 역시 그에 고개를 끄덕였고.
이렇게 하루를 끝내는 마지막 대련이 끝났다.
로한은 바닥에 널브러졌고.
그런 그를 본 포세이튼은, 뒤를 돌아 자신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를렘 역시 그를 따라 걸었고.
포세이튼은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를렘에게 물었다.
"성장이......너무 빠른 것 아닌가?"
"나도 놀라는 중이다."
"교만 떨까 봐 티는 내지 않았는데. 마신과 그룬트의 에너지를 한 번에 받아들이고. 그 체력으로 또 우리 둘과 동시에 대련까지......심지어 우리들의 움직임에 적응해나가는 속도도 장난이 아니었다."
포세이튼은 자신의 뺨을 엄지로 스윽 훔쳤다.
엄지손가락 끝에는, 미약한 핏자국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물론 이미 뺨의 상처는 회복된 지 오래였다.
말그대로 스치기만 한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를렘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그 아이도 우리와 같은 신격이니까. 아니, 제대로 모든 힘을 다룰 수만 있다면 우리 둘을 뛰어넘는 신격이 될 수도 있겠지."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포세이튼은 알아보았다.
지금의 아를렘도 꽤나 놀란 상태라는 걸.
아주 미세한 차이가 목소리에 묻어나고 있었다.
다만 그 정도 놀라는 걸로는, 포세이튼의 성에 차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고작 몇 시간 만에......신격의 경지를 끌어올리다니. 이런 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네."
"우리로서는 운이 좋았다고 봐야겠지. 크로토스가 부활하기 전에, 안테이오스부터 각개격파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애초에 믿을 만한 자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네가 직접 저 육신에 들어가려 했던 것 아닌가."
"믿을만한 자이다."
의외의 확답에, 포세이튼이 갸웃거렸다.
"네 눈은 믿지 않는다면서?"
"나를 믿지는 않지. 다만 가우리엘은 믿는다."
"가우리엘이라면......그 대천사?"
아를렘은 긍정하였다.
"그렇다. 가우리엘은 나에게서 다정함을 가장 많이 가져간 아이이지. 그 아이가, 로한을 믿더군."
"다정함과 믿을 수 있느냐, 아니냐는 별개가 아니던가."
"그 아이가 다정한 만큼, 다른 이의 다정함과 위선을 쉽게 구별할 수 있어."
"흠.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이로구만?"
아를렘의 말에, 포세이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참......그 전투 센스는 정말이지, 황당할 정도더군. 심지어는 이렇게나 압력이 강한 해저에서 말이야. 저 친구가 원래 살던 이차원은, 사방에 괴물이 깔리고, 검투사가 널린 세계인가?"
"모르긴 몰라도 확실히 전투에 익숙한 것 같기는 하더군. 조금만 더 키운다면......크로토스조차 쉬이 맞서지 못할지도."
"크흐흐. 그거 진짜 상상만 해도 통쾌하겠어. 역시, 재능 충만한 것들은 성장시키는 재미가 쏠쏠하다니까?"
포세이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복도를 거닐었다.
* * *
나는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막상 고위 신들과 직접 맞서보니, 내 수준을 직면할 수 있었다.
나름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래서야 안테이오스 같은 놈 또 만나면, 또 털리겠는데.'
아직도 내 스스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운 채로, 방금 전의 훈련을 복기해보았다.
마치 바둑을 되짚어보듯.
한 수, 한 수.
천천히.
'거기서 분명히 포세이튼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단 말이지......'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눈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상대방의 움직임.
그것이 해결된다고 해도, 몸이 쫓아가는 게 두 번째 문제겠지만.......
일단은 눈으로 좇는 것부터 먼저 할 수 있어야, 다음 스텝이 가능할 터였다.
'제3의 눈에는 아슬아슬하게 잡힐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그 능력 덕분에, 포세이튼에게 유효 반격 한 번 정도는 날렸던 것이다.
그말인 즉, 동체 시력을 제3의 눈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만 있다면.
제3의 눈과 진짜 눈의 갭을 줄일 수만 있다면!
'가능성이 보일 것 같은데.'
해결책을 강구한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묵직한 무게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신성력이 빠져서 그런가. 체력이 많이 줄었어.'
신성력이 빠진 부분을, 마신 오르쿠스의 힘과 악신 오르헬의 힘으로 대신 채워야 했다.
하나 아직은 그 힘들을 다루는 데에 어려움이 느껴졌다.
포세이튼와 아를렘의 말대로라면.
오늘 훈련처럼, 경험을 쌓다 보면 자연스레 될 것이라 하기는 했는데......
언제까지 걸릴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다만,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성력이 빠져나가니, 그만큼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기는 했던 것이다.
이전과는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아를렘의 말이 옳았던 모양이었다.
가우리엘의 힘은, 방해만 된다던 그 말이.
'하지만 일단은 이 힘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약한 것 같단 말이지.'
나는 손바닥을 들어, 그 위에 얼음 가시를 창조해냈다.
물 속에서도 충분히 이 정도는 가능했다.
그것을 앞으로 내던진 나는.
이 지하 시설의 외곽을 따라 둥글게 날아가도록 그것을 컨트롤 하였다.
계속해서, 스스로 움직이도록.
조금씩 속도를 더 붙여가면서.
쐐액! 쐐액! 쐐액!
한 바퀴 돌 때마다.
귓가에 살벌한 소음이 들려왔다.
이윽고 그 작은 얼음 가시는 엄청난 속도로 바닷물을 가르며 회전을 하였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정도면......포세이튼과 비슷한 속도겠는데?'
적응 훈련을 하는데 적합한 영역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 * *
"로한 님께서......행방불명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가우리엘에게서 로한의 소식을 들은 디아즈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런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그 충격은 몇 배로 다가왔다.
그런 그녀를 향해.
가우리엘이 어깨를 토닥였다.
"일단은 아를렘 님과 함께 사라졌으니, 생명에 큰 지장은 없지 않겠느냐."
"하면 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정곡을 찌르는 디아즈의 물음에.
가우리엘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옆에서 지켜보던 오르헬이 한 마디 보태었다.
"부상 정도는 입었을 수도 있지. 회복을 한 후 시기를 봐서 합류하지 않겠어? 브라더가 그렇게 약한 녀석은 아닌 거, 자네도 알잖아. 지금은 그리 생각을 하자고."
"......예."
다른 이들 역시 무슨 기분일지 생각을 한 디아즈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헬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일단 브라더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좀 정리해야겠어."
디아즈는 자신의 품에서, 로한이 맡겼던 것을 꺼내었다.
"로한 님께서 부탁하셨던 겁니다."
그 둥근 실루엣을 보고, 오르헬은 바로 눈치를 챘다.
"이게, 나올의 새로운 눈인가?"
"뭐? 오르헬 형님 그게 진짜야? 나올, 이제 다시 앞을 볼 수 있는 거야?"
"그래. 브라더가 준비해줬어."
"로한 형님......"
오르헬은 나올에게 그것을 건넸다.
"원래의 세 번째 눈처럼 그냥 착용하면 될 거라더군. 자, 받아."
"아, 알겠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나올을 향했고.
나올이 의안을 착용하자.
"아, 안 보여......"
실망스러운 대답이 나올의 입에서 나왔다.
그에 오르헬이.
"에휴. 어두우니까 안 보이지. 크뢰이튼, 불 좀."
"알겠네."
크뢰이튼이 작은 불꽃을 손바닥 위에 피우자.
"오! 보, 보인다! 진짜 보인다!"
나올은 신이 잔뜩 난 목소리를 내었다.
"로한 형님 최고! 로한 형님이 최고다!"
그러나 그 밝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쿠구구구구.......
불길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올라온 까닭이었다.
모두들 직감을 했다.
이건, 자연적으로 일어난 지진 따위가 아니라.
"안테이오스......!"
그 거신의 짓이라는 걸.
가우리엘이 그 이름을 읊조리자마자.
콰과가아아아앙!
동굴의 윗부분이 한순간에 뜯겨 날아가며.
안테이오스의 눈동자가 보였다.
"바위 안에는 숨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로다. 후후후후!"
"제, 젠장......!"
오르헬의 뺨으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