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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사기캐로 살아가는 법-168화 (168/194)

168화. 한 번에 가자고

포세이튼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심해 요새에서도 가장 깊은 곳과 이어지는 유일한 계단이었다.

좁고 어둡고 가파른 계단.

물론 이곳이라고 해서, 바닷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지나쳤던 모든 곳에 바닷물은 있었다.

내가 물의 정령왕이기 때문에 제한을 받지 않았을 뿐.

다만......그렇다고 해서 수압과 물속에서 느껴지는 저항력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밑으로 더 내려가니......조금 답답하긴 하네.'

이미 어디까지 내려왔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의 깊이였다.

그런데 여기서 또 내려가다 보니.

슬슬 제법 튼튼한 육신을 가진 나라고 해도, 압박감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움직임이 불편할 정도로.

하지만 아를렘과 포세이튼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과 딱 봐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나는 모래주머니를 온몸에 둘둘 두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더 내려간 후에야 포세이튼이 발을 멈추었고.

나 역시 계단의 끝에 내려서자.

넓게 펼쳐진 공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깊고 깊은 지하실.

그 광대한 곳에는......아무것도 없었다.

포세이튼은 그곳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비상시 백성 전부를 안전하게 수용하기 위해 피난처로 만들어 둔 곳이다. 거신족과의 전쟁을 염두해두고 만들었기에, 내 직접 창안한 강력한 감지 방해 마법까지 걸려 있지."

나 역시 계단을 내려오는 중간즈음에서 한 번 느꼈던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감각이 흐트러지는 순간을.

아마 그때가 감지 방해 마법의 영역을 통과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리라.

"위의 요새에서도 물론 방비가 되어 있긴 하지만......이곳에 비한다면 세 발의 피 수준이지. 이곳에서는 웬만큼 날뛰어서는 거신족 놈들도 감지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군."

딱 봐도 그럴 것 같아 보였다.

이만큼 지하를 넘어서서, 심해의 지하까지 내려온 걸로도 모자라.

거기다가 포세이튼이 직접 감지 방해 마법까지 설치해 두었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기감을 감지하겠는가.

중간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만한 공간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까지 깊게 내려오니 살짝 걱정도 되었다.

'여기까지 날 데려와서는......대체 뭘 하려고......'

일단 호기롭게 따라 내려오기는 왔는데.

쉽지 않을 거라던 포세이튼의 그 말이, 귓가를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약간의 긴장감이 올라오던 그때.

그 의문에 관해 먼저 입술을 뗀 것은, 포세이튼이 아니라 아를렘이었다.

"일단은, 그룬트의 잔재부터 완전히 소멸시켜야겠다."

그에 포세이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룬트라니? 갑자기 그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 것이지?"

"저 아이가, 그룬트의 정신체를 삼켰거든."

포세이튼은 나를 홱 돌아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터트림과 동시에 아를렘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이거, 보기보다 겁이 없는 친구로군. 그 육신이 우리가 만든 것이란 걸 모른 채로, 그룬트의 정신체를 삼키는 그런 대담한 모험을 했다고? 이거......보통내기가 아닌걸?"

뭐야? 하면......안되는 거였나?

그런 건 좀 빨리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아를렘은 내게 따라오라는 눈빛을 보냈다.

"이리로."

그렇게 이 지하 공간의 한가운데에 선 우리들.

아를렘은, 나를 돌아다보며 입을 떼었다.

"시작하도록 하지."

꿀꺽.

나는, 나도 모르게 조용히 마른 침을 삼키게 되었다.

* * *

드디어 뭔가 시작되는 것인가?

강하게 해준다는 걸 보니, 전투 훈련이라도 해준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아를렘이 나를 향해 말을 하였다.

"가우리엘의 날개를 펼쳐라."

역시 대련을 해보는 것인듯하였다.

무릇 훈련이라 함은, 실전 경험을 쌓는 게 가장 좋기는 하니까.

나는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펄럭!

내가 가진 모든 가우리엘의 날개가 좌우로 넓게 펼쳐지고.

이 지하의 공간이 조금 더 훤해졌다.

그 광경을 포세이튼은 팔짱을 낀 채로 보고 있었다.

"두 쌍이나 가지고 있다고? 이거,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저게 저렇게 되는 것이지?"

나는 아를렘에게 눈을 고정한 채 짧게 답했다.

"말하자면 복잡하다."

지금은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무리 연습이라고는 한들, 상대가 그 아를렘이지 않나.

'그래, 아를렘쯤 되는 존재와 치고받고 하다 보면 분명히 실력이 늘......'

그런데 이어서 나온 아를렘의 말은.

약간 맥이 풀리게 하였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있으라고?"

"그렇다. 그룬트의 정신체를 없애기엔, 육체의 힘을 빼놓을 필요가 있다. 더불어 어차피 그 육신에 맞지 않는 힘이라면 결국 없는 게 나을 것이다. 더 큰 성장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생각하면 정확할 것이다."

"내게 맞지 않는 힘이라고?"

"그 육신은 대천사들이 사용하는 신성력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아니하다. 크로토스가 신성력에 대응을 할 수 있기에, 그와 맞서려면 신성력이 아닌 힘을 쓸 필요가 있었으니까."

이해는 되었다.

크로토스를 상대하기에 그렇다는 말인데......

그건 그거고, 나는 지금까지 꽤나 잘 써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맞지 않는 힘이라니.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아쉬운가?"

"글쎄.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전보다 오히려 더 가뿐해질 것이다."

"그래도 날개는 없어지는 것 아닌가?"

"날개?"

"가우리엘의 날개가 있어서, 공중전에도 대응이 가능했으니까. 그런 부분에서는 손해일 수 있겠다 싶어서."

그 말에 아를렘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 육신을 만들 때 그 정도 준비도 해놓지 않았을까. 너는 이미 스스로 날개를 가지고 있다. 가우리엘의 날개가 오히려 그 진정한 날개를 펼치는 데에 방해만 할 뿐."

"내가......날개가 있다고?"

"날아오르는 법도 다 알려 줄 터이니. 조급하지 말아라. 그러나......"

아를렘은 내 등에 돋아난 가우리엘의 날개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을 뜯어낼 때는 조금......아플 것이다!"

뚜두두둑!

"으아아아아악!"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많이 아팠다.

* * *

의외의 반전은.

정작 그룬트의 정신체를 제거하는 건 크게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등짝은 뜯겨나간 날개 때문에 피부가 찢어지는 통증이 남아 있었다.

포세이튼이 나름 가벼운 회복 마법은 걸어주고 있었지만.

그것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여전히 통증에 무릎을 세우지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피코의 회복력도 이번만큼은 시간이 좀 걸릴 정도였으니.

확실히 보통의 상처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직접 이 통증을 겪고 나니.

가우리엘이 진짜 독한 독종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남이 뜯어도 이렇게 괴로운걸.

혼자서 다 뜯어내다니......

'가우리엘은 통각이라는 게 없나?'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니.

점차 통증이 가라 앉고 있기는 하였다.

불사조의 회복력은, 그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이게 아니었다면 어떻게 버텼을까.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피코를 만나게 된 게 정말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쨌든.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만큼 체력이 회복 되고 나니.

다시 아를렘이 입술을 떼었다.

"이걸로 그룬트의 정신체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 얼굴 앞에 손바닥을 펼치자.

그 손바닥을 향해 내 몸 안에서 무언가가 연기처럼 슈우욱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이 소용돌이치며 한 점을 중심으로 모이더니.

일전에 보았던 그 검은 액체처럼 구형의 모양이 되었다.

"이건, 그룬트의 정신체가 남긴 힘이자 잔재이다."

"후욱......후욱......"

묻고 싶은 건 많았는데.

입을 열 여력까지는 아직 없었다.

그런 나를 향해.

아를렘은, 반대편 손에 또 다른 검은 구체를 소환해내었다.

그것은 그룬트의 정신체가 만들어낸 잔재와는 달리, 액체 형태의 모습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저것은, 마신의 잔재였다.

베르티엘이 가지고 있던 그 힘.

"이 두 가지 힘은, 가우리엘의 날개와 달리 그대의 육신과도 잘 어우러질 것이다. 물론 이 잔재들의 원천이 알다시피......호락호락한 존재들은 아닌 만큼, 이걸 흡수하는 것도 역시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앞선 데미지도 회복이 덜 되었는데.

또 겁을 주니......이상하게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안 먹을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헐떡거리면서도 눈에 광채를 내니.

그 모습에 포세이튼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를렘의 영혼이 아니라서 우려가 없지 않았건만......아주 물건이로군. 그대가 원래 살던 세상도 만만치 않았나 본데?"

"그건 다음 기회에 해주도록 하지."

"좋아, 기대하고 있겠네."

잠시의 잡담이 끝나자.

아를렘이 그 두 개의 검은 구체를 내밀며 물어왔다.

"마신과 그룬트. 어느 쪽부터 하겠나?"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한 번에 가자고."

* * *

"푸학!"

가까스로 섬을 탈출한, 가우리엘을 포함한 인원들은.

뭍에 발을 디디며 뒤를 돌아보았다.

미로아 섬이 있는 방향을.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지독하구만......"

오르헬은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아를렘과 로한을 놓쳤다는 이유 하나로.

그 분풀이로 섬 하나를 아예 없애버린 안테이오스였다.

쿠구구구구구궁......!

간간히 들리는 지진과 같은 흔들림이 지금도 느껴졌다.

저만큼 난동을 부렸음에도,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우리엘은 일단 그곳을 벗어나고자 했다.

당장에야 로한과 아를렘에게 신경이 꽂힌 안테이오스였으나.

만약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챈다면, 당장에라도 죽이려 들 게 뻔했으니.

아니, 차라리 죽여주면 다행일 터였다.

붙잡힌 채로 로한과 아를렘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가 된다면......

'없느니만 못한 짐덩이가 될 터.'

가우리엘은 모두를 향해 작게 소리를 내었다.

"일단은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그에 오르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여기서 거기부터 가자고. 나올이 기다리고 있는 곳."

"아, 그렇군."

오르헬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섬을 나오기 직전에 들었는데. 브라더가 디아즈에게 나올의 의안을 만들어오라고 시켰더라고."

"거신족의 의안이라니......그게 가능한가?"

"나야 모르지. 그런데 브라더가 했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으, 으음."

"여하튼, 디아즈가 나올의 의안을 가져오면 어떻게 해야 사용 해야 하는지 브라더가 알려줬는데......직접하라니까, 결국은 날 시키네."

투정 같아 보였지만.

그 속내는 걱정이었다.

로한이 괜찮을지에 대한......걱정.

가우리엘 역시 함께한 시간이 짧진 않았기에.

오르헬의 어법을 알고 있었다.

"로한 경은 괜찮을 것이네."

"그래. 그래야지."

그 대화를 끝으로, 그들 역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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