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짜여 진 각본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그룬트 놈과 이야기를 하면......제대로 잔 것 같은 기분도 들지 않는다니까?......'
피곤이 계속해서 축적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수면을 방해하는 것 또한 아마 내 정신을 약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나는 텐트 밖으로 나왔다.
차라리 찬 밤공기라도 마시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서.
그런데......깨어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한 명도 빠짐없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뭐야? 벌써 깼어, 브라더?"
아직 다들 잠들지조차 않은 모양이었다.
"다들 깨어있었나?"
내 물음에 오르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이 섬 자체가 불편해서 그런가? 다들 잠이 안 오는 모양이더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기운 걸 보니, 이미 깊은 밤이 된 듯 보였다.
"흠."
나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데.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
"왜? 무슨 일 있어?"
그에 나는 크뢰이튼과 그렌델을 돌아보았다.
이 자리에서 가장 마법에 정통한 것은 그들이었으니.
가우리엘과 마그마로스, 트레이톤.
아니면 오르헬이나 리치몬드도 자신이 정통한 계열의 마법 정도는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다양한 마법을 쓸 줄 아는 것은 오로지 그들 둘뿐이었다.
크뢰이튼도 왕실 마법사로 명성을 날렸고.
그 제자였던 그렌델 역시 마법에 재능이 큰 편이었으니.
게다가 핏줄도 보통이 아닌듯하였으니까.
나는 적당한 자리에 앉으며, 운을 떼었다.
"다들 알겠지만, 베르티엘을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날이 밝으면 베르티엘이 다시 거래를 걸어오겠지. 내가 원한 것은 그룬트의 정신체만 없애주는 것이지만......그룬트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더군."
가우리엘은 우려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또 꿈에서 그룬트를 만난 것인가?"
"이제는 놀라울 것도 없지. 매일이다. 하루도 편히 잘 수도 없을 정도다."
"......후우......"
내 대신 가우리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오히려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마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면, 다른 이들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 테니까.
지금 베르티엘의 앞에서 조급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그녀는 곧바로 알아차릴 것이었다.
그러니 내 선에서 그런 불상사를 사전에 차단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룬트를 떠본 결과. 이런 마법진을 베르티엘이 쓸 수 있다고 조심하라고 하던데. 아마도 금지된 마법 중 하나인 육체 강탈이라는 마법인 모양이더군."
마법명이 거론되자.
크뢰이튼과 그렌델의 표정이 확 굳었다.
"육체 강탈이라고 했나? 진정?"
"그룬트의 말로는 그렇더군. 뭐, 어차피 저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잖아?"
대충은 예상했지만, 이제 명확히 마법의 정체를 알아낸 것이었다.
내 대답을 들은 크뢰이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크게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피로 만들어진 거대한 마법진을 추적하는 것 같았다.
"그래......그 마법이라면, 이런 이중 대비가 필요하지."
나는 내 계획을 크뢰이튼에게 털어놓았다.
"일단 그룬트는 내게 그 마법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넘겨주었다. 생각했던 대로 말이지."
그리고는 그가 보여준 마법진을 그들에게도 보여주었다.
"여기를......이렇게 바꾸어버리면, 마법의 효과가 바뀔 것이라더군."
"허어......그룬트라는 자......이 정도의 혜안을 가졌단 말인가?"
"완전히 머리가 빈 놈은 아니라는 소리지."
우리의 대화를 듣던 가우리엘이.
걱정을 하며 끼어들었다.
"흠. 그렇다면 놈이 알려 준 마법 수정도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지 않나?"
그러나 나는, 그 부분에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차피 내 몸을 베르티엘에게 빼앗기면, 그룬트 역시 부활할 기회를 영영 잃는다. 차라리 내 안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부활을 기다리는 게 현명한 방법이겠지. 아마 이 방법은 믿어도 될 것이다."
실제로 크뢰이튼과 그렌델은.
내가 그려준 마법진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함정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렇군. 수상한 점은 찾을 수 없네. 이건 진짜일세."
둘의 확인까지 끝마쳤으니.
한 시름 덜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으니.
* * *
"베르티엘의 뒤통수를 파훼할 방법은 나온 것 같은데......문제는 그룬트 쪽이겠군."
가우리엘 역시도 남은 걱정거리를 바로 파악하고 있었다.
"베르티엘은 처리한다고 해도, 그룬트를 내버려 둔다면 결국 목을 조여오는 셈이 아닌가."
맞는 말이었다.
그룬트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곳까지 온 것도 전부 그룬트 때문이 아니던가.
"물론 그룬트도 내버려 둘 수 없지. 슬금슬금 영향력을 키워가는 놈을 제어하기 위해 베르티엘까지 만나러 온 것이니까."
"하지만 베르티엘이 순순히 도와줄 리 없지 않은가. 당장 지금까지 일들만 봐도 결국 뒤를 치려고 칼을 갈고 있던 꼴이니......"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우리들로는 그룬트 놈을 막을 방법은 없다."
단호한 그 말에.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나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명확한 사실이었으니까.
더불어 완전히 부활을 한다면......모든 게 끝이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어차피 막을 수도 없으니. 포기하려고."
내가 내뱉은 말에.
모두들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돌아다 보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못 막는 걸 알고 있잖나? 다들."
그들을 대표해 입을 연 것은 가우리엘이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는 건 아니지 않겠나!"
"누가 손 놓는데?"
"방금 포기한다고......"
"나야 포기하지. 그런데, 베르티엘도 포기할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인가?"
"굳이 우리가 막을 필요는 없지. 베르티엘이 막아도, 막는 거 아니느냔 말이다."
"......?"
여기까지 설명을 해주었음에도 가우리엘은 아직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서 나는 조금 더 첨언을 보태어 주었다.
"이제부터는, 그룬트와 베르티엘의 싸움으로 만들 것이다. 우린 빠질 거고."
"......!"
"이렇게 해보자고. 내가 칼춤 한 번 추지. 그러면 결국 베르티엘도 움직이지 않고는 못 베길 테다."
씨이익.
모두가 나의 이어지는 계획에.
소름 돋는 얼굴을 하였다.
* * *
"쿨럭! 쿨럭!"
베르티엘은 갑자기 튀어나온 기침에, 입을 막았다.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기분이 들어 내려다보자.
흥건하게 붉은 피가 보였다.
그녀는 옆에 쌓여있는 손수건들 중 하나를 꺼내어 입 주변과 손을 닦았다.
"썩을 오르테미스 년. 그 마법 안에 함정을 넣어둘 줄이야......후우. 이제 이 육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오르테미스의 품에서 찾은 금지된 마법.
그것을 익혔던 베르티엘은, 계속해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몸을 가지게 되었다.
불멸의 존재에서 필멸의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시간은 독약이었고, 피할 수도 없었다.
이제는 그 마지막 순간에 당도하고 있었으니......
'얼른 로한이라는 놈의 몸을 뺏어야 한다.'
아를렘께서는 아직도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시점이 저놈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이것은 기회였다.
죽음을 극복하고 자신의 방법이 정당했음을 증명할 기회.
그렇게 작은 미소를 흘리던 그때.
콰과아아아아아앙!
느닷없이 외부에서 커다란 굉음과 함께 진동이 느껴졌다.
"뭐야! 설마 상위 거신 놈들이 이곳을 알아챈 건가?"
베르티엘은 얼른 창문을 열고 바깥 상황을 살폈다.
그 타이밍에 절묘하게.
쩌저정! 쩌정!
시커먼 천둥이 하늘에서 추락을 하고.
얼음 조각이 섞인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으아아악!"
"자, 잡아!"
"젠장!"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짙은 혈향이 피어나는가 싶더니.
소용돌이가 핏빛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베르티엘은 눈치를 챘다.
로한에게 무언가 변고가 생겼음을.
'저건 분명 그룬트......!'
다른 두 가지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으나.
저 강렬한 혈향은 잊을 수 없었다.
분명 그룬트의 그것이었다.
'젠장! 지금 로한 놈이 그룬트에게 몸을 빼앗기면 안 되는데......!'
그 몸은 자신이 가져야 했다.
그룬트가 아니라!
베르티엘은 크게 당황을 하며,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 * *
바깥은 상황은 생각보다 더 참혹하였다.
"감히 나를 혈석 따위에 가두어? 모조리 죽여버리겠다아아아아!"
날뛰는 로한의 주위로 가우리엘이 날개를 펼친 채 시선을 끌었고.
불의 정령왕 마그마로스와 크뢰이튼은, 화염 채찍으로 로한의 양팔을 각각 하나씩 붙들고 버티고 있었다.
그것조차 버거워하면서.
다른 이들의 상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음 골렘으로 보이는 녀석은, 아마도 최초로 공격을 받았던 것인지.
몸이 반파된 채 나무에 기대 쓰러져 있었고.
뱀파이어 로드 오르헬 역시도 크게 피를 흘리며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베르티엘은 또 다른 뱀파이어 로드인 리치몬드에게 다가갔다.
"언제부터 이런 것이지?"
"몰라! 방금 전부터!"
"그룬트가 깨어난 것인가? 아직 시간이 남아있어서 여유가 있다 하지 않았나!"
"아, 씨! 모른다고! 우리도 지금 당한 거 안 보여? 도울 생각 없으면 꺼져!"
한껏 날카로워져 있는 그 모습에.
베르티엘은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숨겨두고 있던 패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너! 마법 쓸 줄 알아?"
"마법? 혈마법 말곤 몰라. 왜! 바쁘니까 그만 불러 세워!"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를 죽이지 않고 막을 수 있단 말이다! 맞아, 그 아이는 어디에 있지?"
"뭐? 누굴 말하는 거야? 똑바로 얘기를 해!"
"오르테미스의 딸!"
그에 리치몬드가, 저쪽 구석에서 지원을 하고 있던 그렌델을 불러들였다.
"어이! 이리 와 봐!"
"저 말입니까?"
"어!"
베르티엘은 다가오는 그렌델에게 뛰어 가 설명을 했다.
"침묵 마법 쓸 줄 아나?"
"말을 못하도록 제어하는 마법?"
"그래. 그거."
"알고 있다."
베르티엘은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이 섬 전체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여기, 여기, 여기로 가면, 마법진 속에 작은 마법진이 또 있는데. 그 마법진을 통해, 침묵 마법을 써라. 시간 간격은 짧을수록 좋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그러나 그렌델은 미간을 찌푸리며 베르티엘을 노려볼 뿐이었다.
"어째서 내가 이걸 해야 하지?"
"뭐? 상황 파악이 안 돼?"
"네가 이 마법에 무슨 수작을 부렸을 줄 알고?"
"수작 따위 부리려면 네놈들 다 쓰러뜨리고 부렸을 거다. 로한은 내게도 필요한 실험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
"노닥거릴 시간 없다고! 늦어질수록 로한의 영혼은 더 완벽히 소멸될 것이다! 이것만이 그의 안에 있는 그룬트를 제어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알겠......다. 믿어 보지."
결국 그렌델은 베르티엘의 말을 따라, 숲 속으로 사라졌고.
마법진에 마력이 흘러들어옴을 감지한 베르티엘은 악신 제어 마법을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게 짜여 진 각본이라는 것도 모른 채.
"제발......제발......! 빨리 뛰어라, 오르테미스의 딸......!"
베르티엘의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리치몬드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로한 형님, 큰 그림......미쳤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