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사기캐로 살아가는 법-160화 (160/194)

160화. 서로 죽일 차례

꿈은 점점 선명해졌다.

지금에 와서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그렇게 현실과 꿈 사이 어디쯤 되는 것 같은 이 공간에서.

저벅, 저벅.

뒷짐을 진 채 걸어오는 한 인영이 있었으니.

새하얗게 센, 산발의 흰 머리.

아무렇게나 기른 수염.

속옷 하나에 가운을 걸치고 나타난, 붉은 눈동자의 노인.

바로 그가 악신 그룬트였다.

"끌끌끌! 바깥에는 또다시 밤이 찾아왔나보구만."

"......"

"그래. 밤은 계속해서 찾아오지. 잠은 몰려들고, 꿈에서는 나를 만나야 해. 끌끌끌!"

"슬슬 그 얼굴도 질리는데."

"어허. 포기해. 이게 네 운명인 듯하니. 어차피 이제 우리는 운명 공동체가 아니던가?"

저런 식이었다.

자신과 나는 한편이라는 말을, 그는 은연중에 계속 내비쳤다.

내가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내 몸과 영혼을 아예 집어삼킬 생각이었다니.'

저 미소 뒤에 감추어진 그 시커먼 속내를, 이제는 베르티엘에게 들은 나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놈이 더 역겨워 보였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아직 나는 놈에게서 얻어내야 하는 게 있었으니까.

"나도 운명 공동체라 생각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는데 말이지......"

"문제라도 있나?"

"깨어있는 동안, 베르티엘이라는 자를 만났다."

그 순간.

그룬트의 얼굴에 미묘한 살기가 아주 잠깐 동안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흐릿하게 보이던 그가, 요즘 들어 선명하게 보였기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만큼 내게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이겠지만......'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는 이 현상 역시, 나의 영혼이 점점 그룬트의 정신체에 잠식되어가기 때문일 터였다.

때문에 나는 더더욱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꿈 속인데도.

"베르티엘?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

모르지 않는 것 같은데.

그룬트는 시치미를 떼었다.

자신의 표정 변화를 내가 읽지 못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 저쪽은 너를 알던데."

"나야 워낙 유명했으니. 모르는 사람이 드물지 않나?"

"글쎄. 보통은 모르던데. 없던 존재 취급이 되어 있거든."

"뭐? 하! 어이가 없구만? 감히 내 존재를 지우려 들다니. 고얀 것들!"

* * *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그룬트는.

과거 혈석에서 보았던 그룬트의 잔재와는 조금 달랐다.

그럴만했다.

그때 보았던 그룬트는, 진짜라기보다는 분노가 원한처럼 남은 찌꺼기였으니까.

신의 경지에 오른 그룬트이다 보니 강한 원한마저도 그룬트의 특성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반면 지금 내 눈앞의 그룬트는.

진짜였다.

분노에만 휘둘리는 게 아닌.

권모와 술수에도 능한......괴물 말이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문제인가? 어차피 우리 둘이 함께라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거늘. 내 너에게 벌써 증명을 하지 않았더냐?"

그룬트는 꿈속에서 내게 이 힘을 다루는 법을 하나씩 하나씩 전수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머릿속으로만 익힌 채.

실제로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그룬트가 전수해준 것들은 확실히 효과적으로 보였다.

다만......

'무슨 부작용을 끌어낼지도 모르는 걸, 함부로 쓸 수야 없지.'

특히 그 내막을 알아내고 나니.

그 비법들이 어쩌면 영혼 잠식을 가속화 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밖에서 써 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도 아직 의심이 남았느냐?"

"베르티엘이 그러더군. 네가 날 성장시키는 이유가......내 육신을 차지하기 위해서라고. 그러니 자신에게 네 정신체를 넘기라 하였다. 뽑아낼 방법이 있다면서."

나는 그룬트에게 살짝 거짓을 섞어.

베르티엘과 나누었던 대화를 풀어놓았다.

사실 저 말도, 내가 먼저 그룬트의 정신체를 넘기겠다고 내뱉은 말이었다.

그걸 베르티엘이 한 말이라며 살짝 뒤틀었고.

또 나머지는 진실이었기에, 그룬트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나는 쐐기를 박는 결정타를 던졌다.

"이대로 너를 내버려 두면 큰 화가 닥칠 것이라던데?"

"그 간악한 자의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글쎄. 솔직히 다 믿지는 못하겠지만......조심할 필요는 있겠다 싶더군."

나는 말 안에, 베르티엘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살포시 얹었다.

그룬트가 그 작은 떡밥을 놓치지 않길 바라며.

다행스럽게도 그룬트는 그것을 잡아내었고.

내게 자신의 의도를 늘어놓았다.

"자, 자. 진정하고 내 말을 잘 들어 보라고. 전에도 말했듯, 나는 심연 속에 잠들어 있는 내 본래의 육신만 꺼내 주면 돼. 그걸 위해서 널 키우는 것이고. 그런데 내가 대체 왜 네 녀석의 육신을 탐한단 말이더냐?"

계속해서 그룬트가 내게 호소하던 말이었다.

자신은 원래 자신의 육신을 얻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니 내게 해를 끼칠 일은 없으리라고.

어느 정도 일리는 있어 보였기에, 처음엔 나도 긴가민가했던 게 사실이다.

"다른 것 필요 없어. 그냥 나는 내 몸만 찾고 조용히 네 머릿속에서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것은 베르티엘의 말을 듣고 생긴 변화였다.

'과연 그룬트의 저 말이 사실이라면......과연 베르티엘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그룬트의 시신은, 거신 크로토스가 소멸에 가깝게 처리를 해두었어. 하지만 정신체는 그러지 못했지. 해서 혈석이라는 게 처음 탄생한 거고.]

물론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긴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지 않을 거란 것이었다.

베르티엘이 내게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쓸데 없는 거짓말들이 늘어나다 보면, 그러지 않아도 될 부분에서 의심을 사 신뢰도를 깎아 먹을 수도 있었다.

베르티엘의 성향상, 그런 실수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베르티엘이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니라면......지금 내 앞의 그룬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더불어, 하나씩 대입을 해보기만 해도 결과는 간단했다.

그룬트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베르티엘의 말을 따르면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룬트의 정신체를 내 안에서 빼내 버리면 굳이 놈의 육신을 찾아 줄 필요도 없으니까.

반대로 그룬트의 말이 거짓이라면?

베르티엘의 말을 따라야만 할 것이었다.

이대로 내 육신이 뺏길 테니까.

나로서는 어떻게 해도 안전한 방향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룬트의 정신체를 빼낸다.'

하나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과연 베르티엘은 숨겨둔 속내가 전혀 없을까?

내가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그룬트의 편을 은근슬쩍 들며 대답을 한 것은......모두 그것을 위한, 계산된 말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룬트는 내가 모르는 베르티엘에 대한 정보를 꺼내 놓기 시작하였다.

"어이. 그, 대천사. 믿으면 안 돼."

* * *

"베르티엘 말인가?"

"그래. 그쪽도 영 질이 좋지는 않은 종자이니까."

"무슨 뜻이지?"

당연히 베르티엘이 내게 이득이 될 일만 하지 않을 거란 건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그룬트는 짝다리를 짚고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괜히 상대방을 까는 것 같아서, 내가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 말을 시작으로 그는 내게 경고를 시작하였다.

"네가 아무래도 베르티엘을 내 생각보다 신뢰하는 것 같아서. 그 자식 그거. 네 몸뚱어리 노리고 있어."

그래, 그럴 줄 알았지.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모르는 척.

"......뭐라고?"

"지가 하려는 걸 나한테 덮어씌우는 거라고. 내 정신체를 빼낸다고 무슨 마법을 쓰려고 하는 거지? 그거 다 사기야, 사기. 정신 차려. 어?"

"하!......"

나는 일부러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이게 나를 뭐로 보고......!"

"베르티엘은 오래전부터 금지된 마법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게 요망한 마법에 심취하다 보니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실수까지 저지르고 말았지."

그룬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불멸이어야 할 대천사가......필멸자가 된 것이었지."

"......!"

"그것으로 인해 다른 대천사들보다도 신비한 힘들을 여럿 얻었지만, 평생 필멸이라는 걸 생각도 하지 않았던 놈에게 있어 죽음은 큰 공포로 다가왔겠지."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보통은 거기서 도망치겠지만, 그 독한 것은 오히려 더 마법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나를 노리기 시작했지. 내 불멸의 정신을 이용해......자신의 정신체도 불멸의 존재로 만들려고 한 것이야. 육체는 이미 필멸을 잃었으니, 정신만이라도 불멸을 유지하겠다는 계산인데. 그게 쉬울 리가 있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혈석을 이용해 내 후계자를 만들어 내야만 했어.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어. 내 힘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는 자가 그리 흔한가? 네가 알고 있는 그 오르헬이라는 놈처럼, 어쭙잖은 놈들만 나온 거지. 뱀파이어라는 종족으로서 말이야. 가장 중요한 재료가 없으니 혈석을 이용해 영생을 누리려는 건 포기했었을 거야. 그때 바로 네가 나타난 것이고. 가장 중요한 재료인 네가."

그룬트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그러니 결과는 뻔한 거 아닌가? 처음 짰던 계획을 실행하려 하겠지. 네 육체를 차지하고, 불멸의 존재로 다시 돌아가는 것. 그게 베르티엘의 꿍꿍이야."

그는 허공에 그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한 마법진이 눈앞에 생겨났다.

"이 문양. 잘 기억해 둬. 이게 바로 육체를 강탈하는 마법에 사용되는 문양이니까. 이걸 쓴다면......네 몸을 뺏겠다는 의미다."

나는 가만히 그룬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룬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중요한 걸 알려줬더니 표정이 왜 그래?"

"그럼 당장 이곳을 벗어나, 네 육신부터 꺼내 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니. 잠깐."

그룬트는 손바닥을 펼쳐 나를 막아 세웠다.

"왜지? 네 육신을 원하는 것 아니었나? 베르티엘은 나를 압박하고. 매번 밤마다 꿈속에 이렇게 나타나니, 나도 슬슬 지치거든."

"그렇기는 한데......"

그룬트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어차피 녀석도 내 몸을 노리는 상황.

자신의 육체를 되찾는다는 건 핑계에 불과하니, 막상 내가 움직이려 하니 막아선 것이었다.

놈의 입장에서는 시간을 끌어야, 내 정신을 잡아먹을 테니.

최대한 시간을 끌려 하리라.

'이렇게 막아선 이상, 흥미로운 다른 제안을 해야 내가 멈춰줄 텐데 말이야. 어디 한 번 내놔 봐. 베르티엘을 막을, 재미있는 방법.'

일부러 나는 그룬트를 조급하게 들쑤셔 보았다.

아직 그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남아있어 보였기에.

"더 할 말 없으면, 그냥 빨리 내가 되찾아주겠다."

만약 내가 육신을 되찾아냈는데도, 그룬트가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눈앞에서 들킨다면.

나야 분명 베르티엘의 말을 듣게 될 테니.

그룬트의 입장에서도 이제 목숨이 달린 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베르티엘의 존재를 이용해, 그룬트의 목줄을 죄는 것.

이것이 내 계책이었다.

그 그물망에 그룬트는 보기 좋게 걸려들었으니.

그는 내가 의도한 대로, 머리를 짜내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차라리 여기서 베르티엘을 처리하고 움직이는 건 어때?"

"처리.....하자고?"

"그래. 베르티엘의 마법진을 조금만 뒤집으면, 재미있는 마법이 되거든. 분명히 베르티엘은, 네게 말한 것과 달리 나를 끄집어내는 마법이 아닌, 육신을 강탈하는 마법을 쓸 거야. 그 순간 여기를 이렇게 바꾸어 버리면......"

그룬트는 베르티엘이 펼칠 것이라 예상되는 마법진을 내 눈앞에 직접 보여주며 설명을 했다.

"마법의 효과는 육체 강탈이 아닌, 시전자의 정신 붕괴로 바뀌게 되거든. 타이밍을 잡기는 어렵겠지만......이걸 이용한다면, 베르티엘을 없앨 수 있을 게다. 육체 강탈 자체도 금지된 마법인지라, 보안이 그렇게 잘 연구된 건 아니라서 말이지."

나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마법진을 머릿속에 새겼다.

'이런 묘수가 있었군......!'

썩 마음에 들었다.

결국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 싸움을.

그룬트와 베르티엘이 서로 물어뜯고 뜯기도록 비틀어버린 것이었으니까.

정작 나는 쏙 빠진 채로 말이다.

지금부터는, 그들 둘이서......서로 죽일 차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