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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사기캐로 살아가는 법-159화 (159/194)

159화. 다시 협상해보자고

끼이이익.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내부의 공기는 한껏 날카로워져 있었다.

나는 모두를 스윽 훑고는, 입을 열었다.

"한바탕 하려고?"

그리고는 그대로 걸어 들어가, 의자에 척 걸터앉았다.

그 모습을 본 베르티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말릴 생각은 없나 봐?"

"천천히 싸워.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나는 은연중에 시간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

그녀가 조급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나 역시 시간에 쫓기는 것은 매한가지이긴 했다.

그러나 베르티엘이 내 사정까지는 알 리는 없었고.

그렇기에 나는 도발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에 베르티엘은 보기 좋게 내 도발에 넘어왔으니.

"나 바쁜 사람이야. 시간 없거든?"

그녀는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 같던 태세를 접고, 나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신기한 녀석이라니까, 진짜? 저 녀석들 네 편 아니야? 그런데도 그렇게 신경 하나 안 쓰나?"

"내 편? 누가 내 편이래? 너는 졸졸 따라다니는 쥐새끼들도 네 편이라고 부르나?"

"푸하하하. 그래? 죽어도 상관없는 놈들이라는 거지?"

"수족이 없으면 귀찮기는 하겠지.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죽는 건 아니잖아?"

나는 베르티엘의 성향에 맞추어.

이기적인 컨셉을 딱 잡고 밀고 나갔다.

"네가 그랬지? 중간계와 천계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선 따위는 없다고."

"......"

"나는 나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선 따위는 없어. 그러니 저들을 다 죽이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안 해. 다만......내 힘을 키울 방법을 알고 싶을 뿐이다."

내 마지막 말을 들은 베르티엘의 눈빛이.

아주 흡족하게 변했다.

"넌 정말......마음에 쏙 든다니까?"

* * *

베르티엘은 구석의 책장으로 걸어가더니.

표지가 없는 책 하나를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몇 장을 넘겨.

팔랑, 팔랑.

그것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악신 그룬트는 심연의 죄인에서 신격으로 올라선 존재였어.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광기와 끈질긴 생명력으로."

"죄인이라면, 죄도 있겠군."

"당연히 죄명도 있지."

나를 향해 사악 시선을 돌린 베르티엘은.

입술을 달싹여.

"신이 창조한 것을 감히......"

그룬트의 죄명을 읊었다.

"파괴한 죄."

"파......괴?"

"당시 최고 신이었던, 거신들의 왕 크로토스. 그 크로토스가 창조한 것을 파괴한 죄라고 알려져 있었어. 신의 창조에 최초로 반기를 든 셈이었지."

베르티엘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허하지 않은 파괴를 제 마음대로 벌인 그룬트에 대한 크로토스의 분노는 하늘이 무너질 정도로 거대했고. 결국 다른 거신들이 나서서 심연에 그룬트를 가두었지. 즉, 제정신은 아니란 소리야. 네 안에 잠들어 있는 그 괴물이."

"......"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실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깨어나는 중이었지.

그러나 그 사실을 발설한다면, 나 역시 조급하단 걸 알리는 꼴이었기에.

나는 가만히 그 말을 삼켰다.

"그리고 그렇게 갇힌 채로 신격에 올랐다고?"

"말 그대로 파괴신. 그게 그룬트의 본질이야."

"재미있네."

"그렇지? 후후후."

베르티엘은 책을 턱, 하고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그녀와 내 눈이 마주쳤다.

"신격에 오른 그룬트는, 분노에 가득 찬 채로 자신을 가둔 거신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휘둘렀고.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붙잡혀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었지. 영혼은 혈석에, 육신은 다시 심연 속에. 그룬트의 시신은, 거신 크로토스가 소멸에 가깝게 처리를 해두었어. 하지만 정신체는 그러지 못했지. 해서 혈석이라는 게 처음 탄생한 거고."

이 부분은 들어서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하였다.

나는 딱히 알고 있는 티는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혈석을 찾은 나는, 그것을 무기화하고자 했어. 생각해 봐. 거신들조차 버거워했던 악신을 무기로 이용한다? 이것만큼 완벽한 계획이 대체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거신족과의 전쟁 당시, 믿었던 천사 몇 놈이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모든 게 꼬였지."

그 부분에서, 오르헬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아마 자신의 과거가 엮인 시점이기 때문이리라.

그에 나는 살짝 베르티엘의 말에 동조를 해주어 보았다.

혹여 뭔가 새로운 사실이 튀어나올까 봐.

"나쁘지 않은 계획인 것 같은데.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방해를 했나 보군."

"역시! 넌 내 마음을 이해해 줄 줄 알았어.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라니까? 미겔이라는 놈이 그걸 훔쳐 달아난 거지."

"천사인가?"

"그래. 고위 천사. 내 보좌를 하던 녀석이었어. 나름 총명해서 마음에는 들었는데......너무 겁이 많은 녀석이었지."

"겁이 날 이유가 있는가? 거신을 막지 못하면 더 큰 피해가 올 터인데."

"뭐, 굳이 꼽자면 리스크가 하나 정도는 있었는데. 감수하지 못할 정돈 아닌데 말이야."

"그게 무엇이지?"

베르티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하였다.

"실패하면......그룬트가 다시 부활한다는 거?"

그러나 그 대답에 가우리엘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룬트가 부활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팔을 뻗어 그런 가우리엘을 막아섰다.

그녀의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던 까닭이었다.

"그룬트의 힘을 가지게 된 육신의 영혼을, 놈이 집어삼킨다는 뜻인가?"

"정확히는 해당 영혼 자체가 그룬트가 되어버리는 것이지. 섞이거나 집어삼키는 게 아니고. 실패한다면, 그렇다고."

지금의 내 상태가 그 언저리에 닿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대로 그룬트의 정신체가 커지면......그룬트의 정신체가 내 정신을 흡수해 버리고는, 부활을 하는 메커니즘인가......?'

놀랍도록 효율적인 자기 부활 전략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따르면......아무래도 지금의 내 상태는, 완벽히 성공한 케이스는 아닌듯싶었다.

실패로 가는 과정에 더 가까우리라.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칫......!'

생각보다 그룬트는, 더 골치 아픈 상대인 것 같았다.

* * *

"실패했을 때는 그렇다는 말이고. 완전히 성공한다면......얘기가 달라지지. 내 마법은 오히려 그룬트의 정신체까지 에너지원으로 바꾸어버리는 방식이거든."

베르티엘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책들을 가리켰다.

저것들 모두 다른 게 아니라, 그녀가 직접 집필한 책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악신을 영원히 잠재울 마법도 담겨 있으리라.

나는 현재 내 상태는 숨긴 채.

베르티엘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의 내 상태는, 성공과 실패 그 사이쯤인가?"

"과거에 내가 심어둔 신성력이 잘 작동하고 있다면......사실 그룬트의 정신체는 힘도 못 쓰고 있을 거야."

"그렇기는 하다. 그룬트의 정신체가 의식 한구석에 똬리를 트고 있다는 것만 느껴질 뿐이니까."

거짓말이었다.

밤마다 튀어나와 나를 압박하고 있었으니.

"그럼 문제없어. 한동안은. 그러나 영원하지는 않겠지?"

"협박하는 건가?"

"기껏해야 수십 년? 그 안에 결국 그룬트의 정신체는 깨어날 거다."

응, 이미 깨어났어.

그녀는 내게 협박 섞인 말투를 해댔지만.

미래에 다가올지 모르는 공포가 아니라 이미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차라리 나는 더 담담한 척을 쉽게 할 수 있었다.

"아이고, 무서워라, 라고 해줘야 하나?"

"푸훗. 대담해. 제 목숨이 걸렸는데도 말이지. 좋아, 이렇게 하자고."

베르티엘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오르테미스의 딸년을 내게 넘겨. 그러면 내가 네 안에 잠들어 있는 그룬트의 정신체를 꺼내어 주마."

그녀의 말을 따르기만 해도 당장의 위협은 없어지긴 할 터였다.

그러나 나는 호락호락 그 말에 따라 줄 생각은 없었다.

"웃기고 있네."

"......뭐?"

"내가 왜 그렇게 손해만 보는 장사를 해야 하지?"

"하. 손해라고? 방금 내가 한 설명을 잘 이해 못 한 모양인데. 이대로 있다간 너는 결국......"

"그래. 그룬트 그 자체가 되겠지."

"......"

제대로 대답을 딱 하니.

베르티엘의 입이 멈추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는 어슬렁어슬렁 방 안을 걸었다.

"그러면 그때도 과연 네가 다시 그룬트를 이길 수 있을까? 과연 그룬트의 정신체를 손에 넣을 기회가 있을 거냔 말이다."

"......"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래, 그렇겠지.

완전히 부활한 악신 그룬트를 이길 수는......절대로 없을 테니까.

나는 계속해서 혀를 움직였다.

"그룬트의 정신체를 에너지원으로 바꿀 수 있다고? 그 말인즉, 놈의 정신체만 가져가도 너한테는 이미 충분히 이득이라는 소리 아닌가?"

"......!"

정곡을 찔렸는지.

베르티엘의 눈썹이 순간 움찔거렸다.

"잘 생각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네 쪽이다. 지금 그룬트의 정신체라도 챙겨가느냐......아니면 이대로 나를 놓치고 나중에 완전히 부활한 악신 그룬트의 손에 뒤지던가."

나는 그녀를 보며,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다.

"내 입장에서는 그룬트의 정신체를 넘겨주는 건데, 거기다가 그렌델까지 넘겨라? 내가 아무리 나 스스로만 챙긴다고 하지만, 그렌델도 내 것이다. 내 걸 뺏기는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 난 거래를 하러 온 거지, 부탁을 하러 온 게 아니야."

"......이 대화에서 그걸 알아챈다고? 후후후......"

그리고는 눈을 크게 뜨며 베르티엘을 직시하였다.

약간은 희번뜩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나는......다른 건 몰라도 내가 손해 보는 건 못 참아. 어? 차라리 그냥 악신이 되고 말지."

베르티엘은 짜증이 올라온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그룬트의 정신체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하든 나는 신경 쓰지 않겠다. 세상을 지키든, 세상을 뒤엎든."

그러나 나는 그 눈빛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아직도 손익 계산이 잘 안 되나 본데. 잘 생각해 봐. 날도 슬슬 저무는데, 나는 한숨 자고 올 테니까. 내일 다시 협상해보자고."

나는 그대로 걸어서 방을 빠져나갔다.

급한 건 내가 아니라는 걸 보여줄 생각이었다.

* * *

내가 그곳을 빠져나오자.

베르티엘을 제외한 우리 측의 모든 인물들이 줄줄이 나를 따라나왔다.

그리고는 리치몬드의 주도하에, 야영지를 꾸리기 시작하였다.

베르티엘의 거처 안에서 잠을 자기엔 찜찜한 까닭이었다.

한편.

가우리엘은 내 옆으로 따라붙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이게......통하겠나? 먹히지 않으면, 자네의 목숨도 위험한 게 아니느냔 말일세."

하나 나는 자신했다.

"흘려듣진 못할 거다. 저쪽도 마지막 기회인 건 마찬가지이니까."

"흠......하지만 나는 베르티엘에게 그룬트의 정신체를 넘기는 것도 걱정이긴 하네. 그 성격이라면......"

"그래. 분명 꿍꿍이속이 더 있다."

"맞네. 호락호락 따라 줄 성격은 아니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나온 것이었다.

어느덧 야영지가 완성이 되고.

리치몬드가 내게 다가왔다.

"형님. 다 완성은 됐는데......역시 평소보다 경계 병력을 좀 더 늘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베르티엘은 지금 우릴 습격 할 여력이 없어."

"그, 그렇습니까?"

"그럴 것이다."

조금 전, 나와 가우리엘이 잠시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깨달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된 그 방 안에서.

미세하기는 하였으나, 베르티엘의 기운은 불안정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의 기감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가진 제3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당장 전투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몸 상태이리라.

그러니 습격 따위?

절대로 불가할 터였다.

리치몬드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최소 인원으로 경계만 서겠습니다."

"알겠다."

그렇게 나는 내 텐트 안으로 들어가.

몸을 뉘었다.

피곤해서는 아니었다.

신격에 올라 선 이후로 크게 피로감을 느낀 일은 드물었으니.

그러나 나는 그대로 누워 눈을 감았다.

아마 곧 꿈속으로 들어가질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도 급히 잠자리에 든 이유는......

팟!

"오늘은 좀 빨리 왔구나? 클클클!"

그룬트를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베르티엘은 그룬트와 대화할 수 없고.

그룬트 역시 베르티엘과 대화를 할 수 없으니......

'그 둘 사이에서 나만이 양쪽의 정보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지금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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