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거짓말은 진실이 섞여야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의 영역에 닿은 존재, 악신 그룬트.
그 정신체가 세상에 남아 있다는 말은.
베르티엘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이었다.
그 정신체를 잘만 끄집어내어, 연구한다면......
'베르티엘이 진정으로 원했던, '신'의 영역에 한 발 더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 포인트를 정확히 노린 나의 마지막 말은, 예상대로 적중하였다.
실제로 베르티엘의 눈빛이 벌써 이렇게나 달라지지 않았나.
그녀의 광기 어린 눈을 가우리엘이 슬쩍 살피고는.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잠시 나와서 얘기 좀 하세!"
가우리엘은 힘을 꽤나 주어 거칠게 나를 잡아끌었고.
나는 끝까지 베르티엘과 눈을 마주치며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
베르티엘의 거처에서 적잖이 멀어지자.
가우리엘은 주변을 살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넘어온 것......같나?"
눈을 가늘게 뜨며 묻는 그에게.
나는 긍정의 표시를 보였다.
"눈동자가 완전히 돌아갔더군. 흥미는 끌었다."
사실 내가 베르티엘에게 그룬트의 정신체가 남아있다고 말한 부분부터 시작해서.
가우리엘이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나를 보고 당황하며 말리는 부분까지.
그 모든 게 사전에 준비된 것들이었다.
가우리엘은, 이 섬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베르티엘의 성향에 대해 언질을 해주었다.
그 반쯤 미친 성격을 다 들었는데 그냥 올 수야 있나.
나는 곧바로 지금 이 작전을 준비했다.
필시 베르티엘의 성격이라면, 이렇게 나오리라고 예상을 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로한 경. 그 그룬트의 기운이 남아있다는 건......거짓말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다."
"......!"
"거짓말은 진실이 섞여야 그 빛을 발하는 법이거든."
가우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 대단하군.....한데 진정 아직 그룬트의 정신체가 남아 있단 말인가?"
"그래. 그것 때문에 계속 악몽을 꾸는 중이니까."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다.
한데 히드라의 힘을 흡수한 후부터 뭔가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꿈속에서 점차 그룬트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얼마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혈석을 통해 만났던 그룬트는, 혈석에 갇히던 당시 그룬트의 기억이고.
지금 내 안에 남아있는 흔적이 진짜 그룬트의 정신체라는 것을.
최근 들어서는 연이은 악몽에 아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아마도 히드라의 힘에 그룬트의 정신체가 더 짙어진 탓이겠지.'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내 모습 역시 퀭하리라.
깊이 잠이 들라치면, 꿈속에서 그룬트가 튀어나와 광기에 물들으라 유혹하였던 까닭이었다.
그나마 신성력과, 강대해진 체력 덕분에 버티고는 있지만......
"나도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니 서둘러야 했고.
실상을 전해 들은 가우리엘의 표정이 살며시 굳었다.
"그런......!"
때문에 나는 더더욱 이번이 기회라 여겼다.
그룬트의 정신체를 완벽히 지워버릴 수 있는 기회.
베르티엘의 능력이라면 가능할 터였다.
다만 베르티엘의 목적은, 그룬트의 정신도 지우고, 내 정신도 지워버린 채.
육신만 남은 나를 꼭두각시처럼 쓰는 것이었다.
'호락호락 당해 줄 수야 없지.'
내 영혼을 건 배팅을......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가우리엘과 로한이 자리를 비우자.
베르티엘의 눈동자가 그렌델을 향했다.
"우리, 십 년만이네. 그치?"
히죽거리는 입꼬리에.
악의가 가득 섞인 베르티엘의 그 시선은.
그렌델로 하여금 심히 불쾌한 기분이 들게 하였다.
그에 둘의 사이로 크뢰이튼이 끼어들었다.
"그렇소. 십 년 만이군."
"섭섭했어, 크뢰이튼. 그날.....말도 없이 사라져서 말이지."
"급한 일이 있었소."
"그래? 이상하네. 섬에 들어올 때만 해도 그렇게 급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베르티엘은 재미있다는 듯 크뢰이튼을 쳐다보았다.
크뢰이튼은 입을 꾹 다물었지만.
뒤에 서 있던 그렌델이 앞으로 나섰다.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만."
"음? 무슨 이유?"
"저를 노린 이유."
"아, 그거? 후후후. 별건 아냐. 이십 년 전에, 내가 네 어미를 죽였거든."
"......!"
이것은 크뢰이튼도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그가 오르테미스를 만났던 당시.
이미 오르테미스는 큰 상처를 입고 도망을 치던 중이었다.
누구에게 당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소상히 듣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저 그렌델만 부탁받은 채 각자 다른 방향으로 떠난 게 전부였으니.
그런데......그 때 역시도, 움직이고 있던 것은 베르티엘인 모양이었다.
베르티엘은 입을 멈추지 않고 계속 놀렸다.
"팔을 자르고, 다리를 뜯고. 눈을 뽑고 손가락을 부러뜨려도 말을 않더라고. 참 독했지. 내가 그 년의 마법을 나쁜데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 좋은데, 정의롭게 쓴다는 건데. 끝까지 숨기더라고. 금지된 마법이 금지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나, 뭐라나. 감히 제깟 놈이 뭔데 나에게 훈수 질까지 하면서 말이야."
"가우리엘의 말이 맞군. 제정신이 아니야. 선을 넘었어! 금지된 마법은 금지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선? 그게 뭔데? 아니, 그게 뭐가 중요한데?"
"뭐?......"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선을 지키면 악마들이 알아준대? 아니면 거신족이? 글쎄. 내가 본 녀석들은 그럴 위인들은 아니었거든."
베르티엘은 모두를 비웃었다.
"악마들 죽여서 중간계를 지켜주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인데. 그 정도는 괜찮잖아?"
베르티엘의 시선은 명백하게 그렌델을 향했다.
네 어미를 죽인 것 역시, '그 정도는 괜찮잖아?' 라는 얼굴이었다.
그렌델로서는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베르티엘은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오, 그 눈빛! 기억나네, 예전에 네 어미도 그런 눈을 보였지. 맘에 들어. 참으로 마음에 쏙 들어."
그러자 보다 못한 크뢰이튼이 분노를 표했다.
"그쯤 하는 게 어떤가."
하나 베르티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왜? 한참 재미있는데."
"적당히 해."
"무서워라. 한번 해 보려고? 그런데 나는 가우리엘과 달라. 내 날개는 여전히 그대로거든!"
일순간 분위기는 굉장히 험악하게 바뀌었다.
오르헬과 리치몬드도 조용히 힘을 끌어 올렸고.
앤드류는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 * *
한편, 같은 시각.
가우리엘은 여전히 걱정 어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물론 베르티엘의 성격이라면, 그룬트의 정신체에 혹할 것일세. 다만......그 틈을 이용해 그대의 정신도 없애버릴 수 있음이야. 그리고 그 육신을 빼앗으려 들지도 모른단 말일세."
역시 베르티엘을 잘 알고 있는 가우리엘은.
내가 우려하던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나 또한 아무런 생각도 없이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빼앗으려 들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빼앗으려 들 것이다."
확신이 찬 대답을 하니.
오히려 가우리엘은 당황스러워했다.
"그걸 알고서도 이렇게 밀어붙이는 것인가?"
"나도 생각이 있거든."
"어떻게......할 셈인가?"
베르티엘을 실제로 마주한 후.
나는 유심히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몇 가지 정보를 캐치했다.
"베르티엘은 시간이 얼마 없다."
"......음? 그게 무슨 뜻인가?"
"숲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동안, 유심히 살폈다. 외곽 쪽에는 혈흔이 많았는데, 내부로 들어올수록 줄어들더군."
"그것이 의미가 있는가?"
나는 바닥의 길쭉한 나뭇가지 하나를 튕겨 잡은 뒤.
그림을 그렸다.
스윽, 스으윽.
그것은 두 개의 원이 겹쳐진 그림이었다.
"무엇인가, 이게?"
"바깥에는 선이 있어야 하고. 안에는 선이 필요 없는 것."
추가로 내가 봤었던 몇 줄기의 혈흔을 더 긋자.
스으윽.
이제 확연히 그 그림은, 마법진으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설마......! 이게......마법진이었다고?"
"온 섬을 아우르는 거대한 마법진. 이 정도 규모의 압도적인 마법이라면. 내가 보기에 보통의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그, 그렇겠군......"
가우리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내가 그린 그림을 살폈다.
"하나 이것만으로는 무슨 마법을 펼치려는지 알 수 없다네. 정보가 부족해."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공중에서 내려다본 것도 아니고.
그저 오는 길에 보였던 것들만으로 그린 그림이니까.
"이 정도 정보로는......나는 아직 그대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없네. 베르티엘이 왜 시간이 없다는 것인지."
물론 이것만으로는 결론에 닿을 수 없었다.
나 또한 이걸로 베르티엘의 상황을 파악한 것이 아니었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베르티엘의 태도였다.
"베르티엘은 우리가 섬에 들어오고 한참 후에나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공격도 하지 않고."
"그야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인이 들어왔으니......"
"이 섬에는 저렇게 큰 피의 마법진을 만들 수 있을 정도 많은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아.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이지. 외부에서 제물을 들여오는 것."
"그렇......겠지."
"그런데 지금은 그 제물들이 제 발로 굴러들어왔다."
"음......"
가우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필시 먼저 눈치를 챘을 베르티엘이, 왜 바로 공격하지 않았을까?"
"그야......상대를 파악하지 못해서?"
"파악할 필요가 있나? 거신족이 아닌 이상, 누가 대천사에게 맞선단 말이지?"
"......"
가우리엘은 답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러했으니까.
원작에서도 거의 마지막 챕터까지 압도적인 무위를 뽐내던 가우리엘이었다.
날개를 두 쌍이나 뜯어냈음에도.
그러나 베르티엘은 모든 날개를 지닌 채였다.
똑같이 세 쌍의 날개를 가졌을 당시에는 가우리엘보다 약했을진 몰라도.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럼 왜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당장은 우릴 죽일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거다."
"이유?"
"제물로 쓰려면 벌써 죽였겠지. 아니, 최소한 무력을 써보려 했겠지.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살려둔 채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거고."
"살려 둘 이유가 있다, 라......"
"한 가지 확실한 건, 베르티엘도 조급하다는 것이다. 섬에 도착하기 전, 당신에게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베르티엘의 실험실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했지. 그래서 혈석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그렇네. 그녀가 진정으로 믿는 몇몇 천사들 외에는......다른 대천사조차 예외가 없었지."
"그런데 우리는 거침 없이 그 실험실까지 들어갔단 말이지."
가우리엘이 눈을 부릅떴다.
"그렇군......! 만약 저 핏자국들이 전부 마법진을 구성하는 부분이라면, 그 거처는 분명 마법진의 최중심부. 그러니 그곳이 모든 마법 연구가 이루어지는......실험실이었어!"
이제야 가우리엘도, 내가 왜 베르티엘이 조급하다 여겼는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뭘 원하는지는 알 수 없잖나?"
나는 발로 내가 그린 마법진을 문질러 지운 후.
베르티엘의 거처, 아니, 실험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부터 알아내 봐야겠지. 그리고 내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쉽진 않겠어."
"그럼......방법이 없는 건가?......"
"쉽지 않다 뿐이지, 불가능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
나 역시 다음 수가 전혀 없이, 맨땅에 헤딩을 하는 건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악신 그룬트의 정신체.
'악신 그룬트와 타락한 대천사 베르티엘. 그 둘을 붙여 놓는다면......? 꽤 재미있을 것 같군.'
나는 미소를 띤 채.
가우리엘을 향해 마지막 당부를 하였다.
"계속 연기 잘 부탁하지."
"아! 으, 음!"
그렇게 우리는 다시 베르티엘의 실험실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