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걸어볼 만한 도박
드래곤 로드, 바포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그 공포스러울 정도의 위압감......악신 그룬트였어."
첫인상 그대로 정말이지 침착함을 잘 유지하는 타입이었다.
내가 신의 경지에까지 올라섰다는 걸, 다른 누구도 아닌 대천사였던 가우리엘에게 들었음에도.
그것도 다름 아닌, 악신 그룬트의 힘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금세 냉정함을 되찾는 걸 보면 누구라도 모를 수 없었다.
나도 배우고 싶을 정도의 평정심이었다.
어쨌든.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바포레트는, 내가 했던 이야기를 딱 정리해주었다.
"지금이 한계라는 뜻이로군. 이성을 유지한 채로 힘을 흡수하는 건."
나는 그에 긍정을 하였다.
"그렇다. 이 이상 더 나아갈 수는 있겠지만......그렇게 된다면, 과거 그룬트가 그랬듯. 반쯤 이성을 잃은 채, 살육의 쾌감만을 쫓는 괴물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그때처럼 악신과 대적할 수 있는 크로토스도 없지."
히드라를 통해서, 이제서야 나는 이 신의 힘을 어떻게 더 키워나갈 수 있을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계 또한 깨닫게 된 것이었다.
상위 신과 맞설 방법을 알아냈음에도, 할 수 없는 상황.
더불어 바포레트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었다.
지금 시점에서 만약 그룬트가 날뛴다면......
아마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 말인즉, 내가 이 힘에게 나의 주도권을 뺏겨도.
누구도 나를 막아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 힘을 가져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때.
바포레트는 꽤나 예리한 지적을 해내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때의 그룬트와는 다르다. 미묘하게."
바포레트 그 자신도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가 어떤 포인트를 집어낸 것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게 바로 지혜의 대천사, 베르티엘이 손을 써 둔 부분이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히드라의 힘을 흡수할 때 느껴진 그 신성력은.
미약한 신성력만으로도 컨트롤 할 수 있도록 '고의'로 설계가 된 것이라는 걸.
'섬세하면서도 과감한 설계다.'
직접 그녀의 결과물을 써보고 있는 나로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베르티엘의 이 신성력은, 아주 적은 양만으로도 절묘하게 악신의 광기를 제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뇌로 기어 올라오는 그 광기만 정확히 골라내 차단을 해냈다.
이 정도의 결과물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거의 뇌수술에 필적할 정도의 정교한 마력 컨트롤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그걸 창안하고 실제로 구현해 낸 것이 바로 베르티엘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 결론은 하나였다.
"베르티엘은, 내가 이 힘에 잡아먹히지 않고도 온전히 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지금 그룬트의 힘을 제어하고 있는 신성력은.
세월이 오래 흘러서인지 매우 희미하고 또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정도 효과를 내고 있을진대.
만약 제대로 신성력을 쓰는 방법을 내가 직접 배워서 쓸 수 있게 된다면?
이건 게임 체인저가 될 수도 있었다.
아직은 감히 맞설 엄두도 나지 않는 상위 신들조차도.
리미트 제한 없이 내 힘을 더 키울 수만 있다면......
'희망이 있다......!'
솔직히 이 악신의 힘을 내가 가졌음에도, 상위 거신과 맞설 생각을 하면 막막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베르티엘을 만나야 한다."
* * *
다시 한 번 얘기를 하니.
가우리엘은 이제 이해를 했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동시에 곤란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베르티엘이라......"
중간에서 듣고 있던 오르헬이 물었다.
"뭔데 그래? 만나기 어려워? 대천사님이라서?"
"아니. 그게 아니라서 어렵다는 것이네."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 좀 해 봐."
"베르티엘은, 더 이상 대천사가 아니야."
"......엥?"
오르헬이 얼빠진 소리를 내자.
가우리엘이 조금 더 설명을 보태었다.
"그녀 역시 대천사의 직위를 내버렸다네."
"하, 대천사가 무슨 모자도 아니고 썼다 버렸다 그게 그렇게 쉬워?"
"......"
"아니, 그런데 왜 다 몰랐던 건데? 너는 대천사가 아니라는 거, 세상 천지가 다 아는데. 왜 베르티엘은 여전히 대천사라고 알고 있는 거야?"
"견제해야 했으니까. 악마를."
"악마를......견제 한다고?"
가우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천사들 중 둘이나 그 직위를 버렸다? 그 소문이 퍼졌다가는 악마 놈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옳은 말이었다.
악마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대천사가 아니던가.
가우리엘에 이어서 그 대천사가 또 줄었다는 소식이 놈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떤 방향으로든,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 터였다.
"흠......이해가 되긴 되는데......"
오르헬이 머리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거기는 왜 버렸다던데? 대천사라는 자리 말이야."
"베르티엘은 예전부터 대천사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는 자였네. 혈석에 관한 연구를 하던 때에도 그랬지. 거신족과의 전쟁에 대비한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 단순히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싶었을 뿐이었다네."
"호기심?"
"자신의 손으로......신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그런 허망한 호기심이었네."
나는 그 말이 그저 허망하다고만은 생각할 수 없었다.
실제로 내가 체감한 베르티엘의 신성력에서도, 그 집념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하나 결국 신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건 오만한 생각이었다.
'만약 내가, 과거 그룬트처럼 살육에 취해 스스로를 컨트롤 할 생각도 없이 날뛰었더라면......이런 방법으로는 제어할 수 없다.'
외부의 개입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힘을 가진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
그렇기에 베르티엘은, 결국은 실패했을 터였다.
다만 그 노하우를 내가 이어 받는다며는......
내 스스로 나를 컨트롤 하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가우리엘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베르티엘이 위험하다 판단 천계 회의에서는, 결국 베르티엘을 제명하기로 하였다 들었네. 이후에는 중간계 어딘가로 사라졌다 알고 있네만......"
그때.
크뢰이튼이 대화에 끼어들었으니.
그가 내뱉은 말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내가 알고 있소. 베르티엘이 어디에 있는지."
* * *
갑자기 너무 모든 시선이 집중된 탓에.
크뢰이튼은 약간 당혹스러워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안다는 건 아니고. 십 년 전쯤에, 있던 곳을 알고는 있소. 미로아 섬이었소."
그러나 그것조차도 우리에게는 큰 정보였다.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십 년......시간이 좀 흐르기는 했지만, 가 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 근처의 지도를 본 적이 있었다.
미로아 섬이라면 지금 이곳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
물론 배를 타고 움직이기는 해야 했지만......못 갈 곳은 아니었다.
오르헬 역시 긍정을 하였고.
"어, 맞는 말이지. 그런 정보가 있는 게 어디야. 그런데......"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거기 있는 건 형씨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실은, 만난 적이 있었소. 딱 십 년 전. 그녀가 내게 먼저 접근을 해왔소."
"설마 형씨가 거신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존재라는 것을 알고 접근한 건가?"
"그건 이미 알고 있었소. 다만......당시 그녀가 내게 접촉을 한 것은, 그 이유가 아니었소."
"그것도 아니라니. 그럼 대체 이유가 뭐였는데?"
크뢰이튼은 심란한 얼굴로 잠시 뜸을 들이더니.
또 다시 예상외의 이야기를 꺼내어 주었다.
"그렌델의 목숨을 요구하였소. 당연히 나는 거절하였고, 그날로 나는 그렌델을 데리고 섬을 빠져나갔소. 그 이후로는 본 적은 없소."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그렌델은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목숨을 왜......대천사가, 왜 노립니까?"
그녀뿐만이 모두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던 차였다.
때문에 모두 크뢰이튼의 대답에 집중을 하였다.
크뢰이튼은 한숨과 함께, 가슴에 담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말을 하려 했다. 너는 사실......마녀의 딸이었다."
"마, 마녀라니......!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말을 안 해주신 겁니까?"
"나도 처음이었으니까."
"......?"
"나도......어린 생명을 키우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단다. 어떻게 해야 네게 상처가 되지 않을지, 어떻게 해야 네가 크게 아프지 않고 받아들일지. 알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려무나."
"제 어머니가 그럼......차원을 가르는 마녀, 그 사람이었습니까?"
"그건 아니다. 그 마녀, 레데이아의 스승이 바로, 네 어머니였다."
이거, 참......
생각지도 못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을 코앞에서 마주하니.
나도 당황스럽기는 했다.
이런 분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니까.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크뢰이튼과 그렌델, 둘 사이의 이야기는 따로 할 수 있도록 다른 주제로 넘기는 것뿐이네.'
해서 나는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주제를 되돌렸다.
"미로아 섬으로 떠날 채비를 하도록 하지."
마그마로스 역시 센스 있게, 내 말에 동조를 해주었다.
"그럼 트레이톤과 함께 준비하도록 하겠네."
"음. 트레이톤, 마그마로스를 도와라."
"예. 주군."
오르헬과 리치몬드 역시 눈치를 살짝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도 돕자고."
"예, 형님. 빨리빨리 움직이죠."
그렇게 모두들 일어나니.
나와 바포레트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바포레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직시하였다.
"우르르 찾아간다고 베르티엘이 모습을 드러낼까? 미로아 섬은 그리 작지 않다. 작정하고 숨는다면, 그 섬에 있다 하더라도 찾을 수 없을 테지."
"내가 미끼가 될 생각이다."
"미끼?"
"가우리엘의 말에 따르면 베르티엘은 혈석을 생체 병기화 하는 데에 꽤나 전력을 쏟았더라고 하더군. 그런데, 그 실험의 결과물이라 볼 수도 있는 내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호기심이 많은 베르티엘로서는, 안 나오고 배길 수 없겠군."
"나도 그리 생각한다."
바포레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정말이지, 모든 상황에 대응법을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렇지는 않아. 그때그때 운 좋게 떠오른 것뿐인 거지."
"글쎄? 그것 역시 능력이 아니겠는가."
나는 바포레트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네 능력이 필요하다."
"내.....능력이라고?"
"중간계 최강의 존재 드래곤 로드. 그 힘이 필요하다."
"신이 내 도움을 요청하다니. 생각도 못 한 일이로군."
"상대 쪽도 신이니까."
"그렇군. 그럼 만약 그 부탁을 들어준다면......나는 거신족들과 척을 지게 되는 것인가?"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아니지. 내 쪽 줄을 서게 되는 것이지."
그에 바포레트 역시 웃는 얼굴로 답해주었다.
"뭐. 인생 한 번 걸어볼 만한 도박이긴 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