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생체 병기
하위 거신이 우리의 위치를 발견했더라면.
나는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오히려 끌어들여서 반격을 했을 테지.'
본디 공성보다는 수성이 유리한 법.
블라드 캐슬 역시 성이었기에, 그 공식을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은 내 생각대로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하위 거신이 아니라 상위 거신인 안테이오스가 움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상위 신을 상대로 한다면, 수성전이고 자시고 상대가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 때문에 안테이오스의 정찰용 골렘을 확인한 우리는, 곧장 블라드 캐슬을 이탈하였다.
어느덧 우리는 이제 차우 시온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이 오래된 숲은, 아직까지도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간 이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네."
가우리엘의 말대로.
웬만한 현대의 건축물들보다도 더 거대한 나무들이 빼곡하게 가득 찬 모습은.
이 숲에 발을 들이는 이로 하여금 인간이 정말 초라하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하도록 압도적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습기를 가득 머금은 아열대의 공기가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드니.
확실히 보통의 인간이 탐험을 하기에는 너무나 악조건이긴 하였다.
물론 우리 팀의 구성원들은 거의 대부분 인간이 아니긴 했지만......
그렌델은 확실히 체력이 달렸는지, 페가수스의 위에 거의 널브러진 채로 얹혀져 있었다.
그래도 나머지 인원들은 나름 잘 버티며 정글을 헤치고 나아가는 중이었다.
특히 개인적으로 조금 대견했던 것은, 앤드류였다.
일곱 기사단이라고는 해도, 일원 중 유일하게 순수한 인간이었던 게 앤드류였으니까.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우리는 그렇게 드래곤 로드 바포레트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 * *
당연하게도 가는 길 내내 조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열대 정글에서 사는 생명체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먹고 먹히는 전장이었다.
사냥에 실패하면 그날은 굶거나,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는.
끊임 없이 눈에 보이는 먹잇감을 향해 덤벼들어야 하는 그런 지옥과 같은 전장.
촤악!
"이놈들은 겁도 없네 진짜."
오르헬마저도 혀를 찰 정도로.
이 땅의 동물들은 사냥을 하는 데에 과감했다.
다만 선두에 선 리치몬드와 오르헬이 뚫리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전과 달리 각각 뱀파이어 로드 두 명분의 힘이 부여된 상태였다.
덕분에 이미 하위 거신족과 거의 필적하는 경지에 까지 올라간 채였으니.
보통의 인간들이라면, 날씨와 더불어 이중으로 고생을 시켰을 법한 놈들이긴 했지만......
고작 저 정도로 뱀파이어 로드 둘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더불어 나올도 나름 슬슬 눈 없이 행동하는 것에 익숙해져 가던 터라.
의외로 소리와 감각만으로도 선두에서 한몫을 해내고 있었다.
지금부터 저런 수준으로 감각을 키워 둔다면......
'디아즈가 인공 눈을 가져와서, 그걸 착용하게 되었을 땐, 더 큰 전력이 되겠어.'
아직 나올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괜히 새로운 눈을 만들어 보는 중이라고 언질을 해두었다가 혹시나 실패한다면.
상심이 클 테니까.
일단은 완성이 되어 올 때까지는 참고 기다릴 생각이었다.
어쨌든.
최선두에서 잘 처리를 해주니 후방에 있던 나와 가우리엘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볼 시간이 나왔는데.
마침 궁금한 것도 있었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혈석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나?"
"혈석?"
"뱀파이어 로드들이 힘을 받은 물건이었다."
"알고는 있네. 다만 내가 아는 것도 딱 거기까지일세. 뱀파이어의 기원이 담긴 특별한 돌이라고."
"일종의 권능의 돌이던데. 정확히는 고대 권능의 돌."
"흠......그것이 권능의 돌이었다고? 놀랍군. 하지만...... 아쉽게도 권능의 돌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게 얼마 없어. 워낙 베일에 싸인 부분이 많아서."
"그런가?"
역시 가우리엘도 다 아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해서 나는 똑같은 질문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악신 그룬트는?"
"그룬트?"
그 이름이 나오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우리엘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반응이 묘하군."
"그럴 수밖에. 그 이름은......입 밖에 내기도 꺼림칙하니까."
"천사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군."
"거신족 역시 다르지 않을 걸세."
"혈석 안에 그룬트의 정신이 담겨 있었다."
"......!"
나는 앞을 주시하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을 들은 가우리엘의 반응은 달랐다.
그대로 걷던 걸음을 멈춰 버릴 정도로.
나는 뒤를 돌아다 보며, 말을 보태었다.
"혈석에 담겨 있던 그룬트의 힘은, 내가 삼켰다."
"그,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 힘을 정말......설마 그대가 얻은 신의 힘 기원이......!"
가우리엘의 제대로 된 말은 거기까지였다.
그 다음부터는 몇 초 동안 입만 뻐끔뻐끔거렸으니.
해서 대신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한 그게 맞다. 그래서 말인데, 알고 있는 대로 듣고 싶다. 그룬트에 대해."
* * *
겨우 정신을 차린 가우리엘은.
다시 걸음을 시작하며 말문을 떼었다.
"그룬트가 아니라 혈석에 대해서 궁금하다 하였지?"
"그렇다."
가우리엘은 내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였다.
"그 말은, 그룬트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다는 의미로군."
"기본 정도는."
"뭐. 나도 간단한 것 이외에는 알지 못하네. 그 옛날, 거신족조차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그런데 그게 궁금한 게 아니고, 혈석에 대해 물었다는 건......"
가우리엘은 말끝을 흐리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짐작 가는 바가 있네."
"오호."
"그룬트가 거신족에 의해 정신과 육체가 찢겨진 후. 그의 육체는 심연에 던져버렸고......정신은 어딘가에 봉인하였네. 그리고 그 봉인이 된 물건을, 대천사 중 한 명이 발견하였지."
"대천사가?......"
"지혜의 대천사, 베르티엘. 지혜의 대천사답게, 그녀의 휘하에는 지혜로운 천사들이 여럿 존재하였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아주 재미있는 의견을 내었다네."
그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서 내뱉은 이야기 역시 그러하였다.
"혹여나 추후 거신족이 다시 일어선다면, 그룬트의 힘을 이용해 그들과 맞서자는 것이었지."
"그게 무슨 소리이지?"
"그룬트의 힘을 꺼내어, 생체 병기를 만들겠다는 말이었네."
"......!"
"상위 거신까지 상대할 수 있는......대거신전 전용 생체 병기. 그것이 바로 베르티엘이 최종적으로 구상을 한 것이었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계획은 실패하였네. 그룬트의 봉인석이 사라진 것이지."
거기까지 듣자.
내 머릿속에서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정보들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사라진 게 아니라, 오르헬에게 써진 거라면?......'
오르헬에게 혈석을 넘겨 준 그 천사.
그 천사가 아마 베르티엘의 휘하 천사라면?
하필 당시의 오르헬이 죽을 위기에 처했었고.
그 오르헬을 살리기 위해, 혈석을 써버린 거라면?
지금 내 생각이 그날의 진실이라면......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놀랍도록 정확하게.'
나는 가우리엘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 사라진 물건이......거신들에게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병기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이로군."
"믿을 수 없군.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천계에 있을 때. 천사들 사이에서도 그 봉인석은 거의 전설처럼 회자되던 물건이었네. 실존하는지 아닌지조차 확인되지 않았었지."
"베르티엘이라는 대천사가 만들었다면서? 만든 자가 멀쩡히 존재하는데도 전설처럼 회자 되었다고?
"베르티엘은 신들의 전쟁 당시 죽었거든."
"그래서......추적을 할 수 없었던 것이군."
"그렇다네. 여하튼. 그것은 그만큼 위험한 힘이네. 천계의 천사들조차 두려워 할 정도로. 가장 큰 문제는......그 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걸세.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아무도 모르거든."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였지만.
솔직히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위험한 힘이라고는 하지만......반대로 말하자면, 내게도 상위 거신족들에게 맞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뜻 아닌가?'
내게는 오히려 희망적이라고 보였다.
자신의 충고가 내게 닿지 않은 것을 느꼈는지.
가우리엘은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알지 못하는 힘을 다루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다. 다만 아직 다룰 방법조차 깨닫지를 않아서 말이지."
원래 모르는 것이 가장 두려운 법이었다.
심지어 아직 이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다른 능력들은 얻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거나 혹은 그 특성이 명확해 얻는 순간 감이 오곤 했다.
그러나 악신의 힘?
이건 솔직히 감도 안 올 지경이었다.
얻고 나서 아직은 단 한 번도 쓸만한 상황을 맞닥뜨린 적도 없었고.
과연 신의 힘이란 게 무엇일까?
이미 전투력만으로는 하위 신들을 뛰어넘었던 나였다.
단순히 힘만 강해서는 신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았는데......
조금은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행해, 가우리엘이 가벼운 조언을 해주었다.
"일단은 그럼 여기 정글에서 덤벼 오는 야생 동물들부터 상대하며 차근차근 한 번 경험을 쌓아 힘에 점차 익숙해져 보는 게......"
라고 말을 하던 가우리엘은.
느닷 없이 말을 멈추고는 당황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 얼굴을 굳혔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거대한 존재감.
그것이 원인이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그것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우리엘에게 질문하였다.
"드래곤 로드는......아니겠지?"
"비슷한듯하지만, 조금 다르네. 기운 자체가 너무......섬뜩하군."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되는 표현이었다.
그야말로 날이 선 듯한 살기.
접근을 하고 있는 그 기운의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이 바로 살기였던 것이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차차 오르헬, 리치몬드, 나올 또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럴만 했다.
힘만 따진다면 하위 신의 영역에 도달한 오르헬과 리치몬드도.
더불어 하위 신인 나올마저도.
그 거대한 힘에 비하면 모자람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가장 먼저 그 소름 돋는 기운의 주인을 알아챈 것은.
눈을 잃고 나서 감각이 한껏 예민해진 나올이었다.
"이, 이거 히드라다! 도, 도망쳐야 한다아아아!"
나올이 겁에 질려 호들갑을 떨었다.
그나마 옆에서 오르헬이 진정을 시켰지만.
'아무래도 정글에서 덤벼 오는 야생 동물들부터 상대하며 차근차근 한 번 경험을 쌓을 시간은......없을 거 같네.'
나도 검을 뽑아들......려고 하던 그때.
순간 나는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예상치 못한 존재들이, 숲의 나무를 뚫고 위로 솟구친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이 차우 시온 숲의 지배자.
'드래곤......!'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