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성가신 일을 맡겼더군
헬페리온, 바르바우, 나올을 이긴 것으로 안심을 할 수는 없다.
하위 신과 달리 상위 신은 그 경지 자체가 다르다.
그런 가우리엘의 우려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씁쓸하지만, 나는 직면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가우리엘에게 털어놓았다.
"지금의 나로서는......상위 신들 중 하나라도 마주쳤다간, 무조건 죽는다."
냉철하게 보았을 때, 이것이 팩트였다.
그리고 정확히 현실을 알아야,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물론 당장 잔혹한 현실을 직면한 가우리엘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굳이 상위 신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을 듣지 않았음에도 확신을 실은 나의 대답에.
가우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가늠은 하고 있었네만. 그 정도로군......상위 신들은."
"그렇다."
가우리엘의 말에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지금껏 내가 굉장히 오만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위 신 몇 놈을 잡아내며.
내가 어느 정도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여긴 것이었다.
그리 강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내심 자신감을 키워 온 모양이었다.
하나 직접 신격으로 올라서니.
진실이 보였다.
하위 신과 상위 신은, 같은 신이라 하더라도 격이 달랐다.
'그래. 지구의 신화에도 그랬지. 제우스 혼자서 나머지 모든 신을 이길 수도 있다고.'
딱 그러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상위 신이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이유를.
'작은 벌레 한 마리쯤. 언제든 치워 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부터는 대우가 조금은 달라질 것이었다.
그 악신, 그룬트의 힘을 이어받았으니.
문제는 지금의 내가 그들을 어찌할 수는 없다는 것.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며 말을 이었다.
"신격으로 올라선 후의 경험 차이가 너무 크다. 지금 남은 상위 거신들은 전쟁까지 경험을 한, 소위 말해 베테랑이지. 그에 반해 나는 이제 막 눈을 뜬 갓난아기 수준이고."
그에 가우리엘의 얼굴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말도 안 되는 존재들에게 검을 겨누고 있다 생각은 했지만......막상 직접 듣고 나니, 영 씁쓸하군."
그런 그를 향해, 이번에는 조금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무 힘이 빠지는 건 좋지 않으니 말이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시간이 있다면......승산이 올라갈 수 있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 정도가 될 때까지. 그러기 위해서는 힘 있고 믿을 수 있는 아군이 필요하고."
그 말을 들은 가우리엘은.
팔짱을 끼며 조용히 눈을 감고는 고민을 하였다.
* * *
가우리엘과의 대화 이후.
나는 그가 그 나름대로 움직이게 내버려 두었다.
내가 할 일을 천천히 진행할 뿐.
'일단은 가진 전력부터 정비한다.'
신의 힘을 얻은 직후 나는, 팀의 전반적인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오르헬과 리치몬드의 정상화.
고위 뱀파이어로 격하되었던 그들의 힘을, 뱀파이어 로드 이상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나올이었다.
장님의 상태가 되어버린 나올은,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전력화만 시킬 수 있으면 충분히 밥값은 해낼 녀석인데......'
한데 눈알이 없으니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심연의 악신 그룬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인공 눈.'
의안을 만들어 보자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룬트의 말을 듣기 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본질을 깨달은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차이는 바로, 제3의 눈에 대한 이해도였다.
나는 내가 가진 제3의 눈 스킬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단지 초감각적인 센서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
제3의 눈은, 다른 거신족의 세 번째 눈과 다르지 않았다.
그룬트의 말대로.
거기서 착안한 것이 바로, 인공적으로 만든 모조 세 번째 눈.
실물로 존재하는 세 번째 눈은 정확한 해부도를 구하기 힘들었다.
이 세계에 현미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 번째 눈 자체를 구하기 쉬운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내 심안, 나의 제3의 눈은 달랐다.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이니 실물처럼 굳이 해부를 하지 않아도 설계도를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계획을 수립한 나는, 바로 디아즈에게 이동 준비를 하라 일렀다.
"예? 그걸 누가 만들 수 있습니까?"
"훔카리안."
"아! 훔카리안 님......!"
"그래. 그 드워프 대장장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페가수스도 만든 천재이니까."
"확실히. 페가수스는 제가 봐도 진짜 말 같으니까요. 그래도 거신족의 눈이라니......가능 할까요?"
"내가 설계도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게 있다면 어렵지 않을 테지. 진짜 제3의 눈처럼 특별한 능력까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시력만 돌려줄 수 있어도 충분하니까."
"그렇군요."
그리고 그녀가 출발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세 번째 눈의 설계도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디아즈는 그 설계도를 품에 고이 지닌 채 훔카리안에게로 향하였다.
* * *
디아즈가 떠난 직후.
가우리엘은 다시 나에게 찾아왔다.
"도움이 될만한 자를 알고 있네."
반길만한 소식을 들고서.
그런데 그런 말을 꺼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가우리엘의 얼굴은 그리 밝진 않았다.
그는 곧 이유를 말했다.
"하나 문제가 한 가지 있네."
"일단 누구를 말하는지부터 들어보고 싶은데."
"드래곤 로드."
"......드래곤 로드라면......"
그랬다.
이름 그대로 드래곤들의 수장.
거대한 용이자, 중간계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바포레트."
가우리엘이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생각보다는 도움이 될만한 전력이었다.
이 중간계에서 그만한 힘을 가진 자는 드물었으니까.
그러나 아직 가우리엘이 말했던 문제점이 걸렸다.
가우리엘은 곧이어 그것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었다.
"바포레트는 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싶어 한다네. 그래서 여태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 것이고. 찾아가 대화 정도는 해 볼 수 있네만......전면으로 나설지는 의문이네."
"만날 방법은 있다는 것이지?"
"내게 빚을 진 게 있거든."
나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고민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만나서 이야기라도 한번 해 봐야겠군. 지금은 손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니까."
"알겠네. 그럼 준비해보도록 하지."
"음."
이야기를 다 들은 내가 그만 돌아서려 하자.
가우리엘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네만."
"무엇이지?"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부탁. 기억하는가?"
"일곱 기사단에 넣어 주는 조건으로 했던 부탁 말인가?"
"그렇다네."
나는 즉답을 하는 대신,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가우리엘이 뭔가 싶어 나를 따라 위를 쳐다보았지만.
그곳에는 블라드 캐슬의 천장밖에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돌아다 보는 가우리엘.
그의 시선을 받으면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제 도착한 것 같군."
"......?"
나는 천천히 바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가우리엘은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내 뒤를 따라 걸었다.
"뭐, 뭔데 그러는 건가?......"
* * *
"주군을 뵙습니다!"
처억!
물의 정령왕이 다루는 골렘, 트레이톤.
블라드 캐슬 앞에 도착한 것은 그였다.
그런 트레이톤이 나를 보며 무릎을 꿇자.
가우리엘은 아직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해하느라 조금 바쁜 것 같았다.
"트, 트레이톤이......왜?......"
왜 트레이톤이 내게 무릎을 꿇고 주군이라 부르는 것이냐?
아마 이 질문인 모양인데.
가우리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채였다.
그래도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 정도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른 이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침 내가 나가는 것을 본 리치몬드가 따라왔었는데.
그는 마치 자신이 뭐라도 된 양.
가슴을 쫘악 펴며 이상하게 근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거야 뻔하지. 우리 형님이 바로 물의 정령왕이시니까!"
내 대신 대답한 리치몬드의 말에도.
가우리엘은 아직 납득하지 못한 듯, 내게 다시 물어왔다.
"저 말이 진정 사실인가?"
나는 그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트레이톤에게 물었다.
"내가 시킨 일은 잘 처리했나?"
"예, 주군. 말씀하신 대로, 제게 맡기셨던 인장은 테라트럼에 위치한 제단에 잘 가져다 놓았습니다."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그런데 노이어 결사대가 안 보이는데?"
"에이트럼의 말에 따르면, 결사대의 다른 동료로부터 급한 요청이 있어 그쪽으로 일단 합류한다고 합니다."
"그래? 음. 알겠다."
어쨌든 임무를 잘 해결을 했다는 대답을 들은 나는.
가우리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굉장히 성가신 일을 맡겼더군. 아를렘이 직접 창조한 존재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들어가라니."
"......인줄 알았거든."
"뭐?"
"그대 천족의 일원인 줄 알았다네. 내 딴에는 나름 확신하고 맡긴 것일세."
자신의 판단이 빗나갔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은 가우리엘은.
뻘쭘한 미소를 지었다.
"천사도 아닌 걸로 모자라, 물의 정령왕의 힘까지 차지하고 있다니......그간 긴 세월을 살아오며 겪을 만한 일은 다 겪어서, 이제 놀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건방진 생각이었던 것 같군."
그러나 나는 그의 감탄 섞인 말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푸드드득!
갑자기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
그 새에게서 거신족 특유의 기척을 느낀 까닭이었다.
나는 당장에 트레이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저 새를 추락시켜라!"
리치몬드와 가우리엘은 느닷없는 나의 발언에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트레이톤은 골렘이라는 그 특성에 걸맞게 바로 얼음 화살을 만들어 쏘아버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슈우우우웅!
그렇게 날아간 화살이 날아가는 새를 꿰뚫자, 놀랍게도.
새는 돌멩이가 되어 하늘에서 추락하는 게 아닌가.
후두두둑.
산산조각이 난 채로.
저것 역시 골렘이었던 것이다.
새의 형상을 한, 바위로 만든 골렘.
그리고 바위로 저런 골렘을 만들 이는 굳이 길게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뻔했다.
'상위 거신족, 안테이오스......'
나는 휙 돌아서며 다시 블라드 캐슬로 들어서며 리치몬드에게 말하였다.
"당장 이곳을 뜬다. 드래곤 로드를 조금 빨리 만나러 가야겠다."
몇 시간이 지나고.
이미 준비를 끝마쳤던 우리는.
서둘러 드래곤 로드가 있을 거라던, 고대 숲 차우 시온으로의 여정을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