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나쁜 조건은 아니지?
완전히 우연이었다.
새로운 신격이 탄생하던 당시, 가우리엘이 이 근처에 있었던 것은.
당시, 앉은 채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가우리엘은......
흠칫!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일순간 거대한 위압감 같은 게 터져 나온 까닭이었다.
가까웠기 때문에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새로운 신격이 탄생했다는 것을.
그는 두려움 반, 걱정 반 섞인 얼굴로.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었다.
'도대체 어떤 존재가......신의 경지에 오른 것인가?'
그리고 오늘.
한 걸음에 달려온 이곳의 문을 두드리자.
자신을 반겨 준 것은 다름 아닌 뱀파이어 로드였다.
"뱀파이어 로드......리치몬드?"
"오호라. 나를 아시오?"
"모르진 않소."
"이것 참 영광이로구만? 들어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리치몬드는 작게 웃으며 먼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것처럼.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가우리엘에겐 혼란스러웠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신을 알아볼 때부터 놀랐는데.
'진짜......알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상황이 이어질수록 가우리엘은, 긴장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신의 영역에 도달한 것일까?
그리고 그 존재는 대체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 오리란 것을 알고 리치몬드를 보낸 것일까?
'애초에 리치몬드와 같은 뱀파이어 로드를 손님맞이용으로 부리다니......'
가늠이 되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렇게 계산도 없이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모든 신이 다 호의적인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시 상황이었다.
악마들과의 전쟁.
이어 숨 돌릴 틈도 없이 튀어나온 배후의 거신족들과의 제 2차 전쟁.
생각을 하고, 이것저것 재고 따져 본 후 움직일 겨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행여나 새로운 신이 거신족의 편에 붙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최악.'
사자의 등에 날개를 다는 꼴이리라.
그래서 가우리엘이 이렇게 정면 승부를 걸어온 것이었다.
물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단 머리를 들이민 꼴이다 보니,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신들 중에서는 정말이지 괴팍한 자들도 많았다.
일반적인 필멸자나 천사들이 보기에는 그 생각을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지금 이 복도의 끝 방에 있을 저 신도 그럴 수 있다는 의미였다.
심지어는......
'이전처럼 다시 악신이 튀어나올지도 모르지.'
그것은, 새로운 신이 거신족에게 붙는 것만큼이나 또 다른 관점에서 최악이었다.
가우리엘은 새로운 신이 악신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래곤 로드는 중간계에서도 중립을 지키고.
엘프 로드는 비교적 천계와 친밀도가 있었다.
하나 뱀파이어 로드는 중간계를 지키는 로드들 중에서도, 솔직히 천계에 우호적인 편은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신을 모시고 있다는 건......
'제발 이번만큼은 내 예측이 틀리길.'
가우리엘은 순간 떠오른 불길한 상상을 머리를 흔들며 날려버렸다.
그러는 사이 리치몬드와 가우리엘은 어느덧 복도 끝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리치몬드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주며,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죠."
"고맙소."
그렇게 문이 열리고.
길게 깔린 붉은 카펫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어 화려한 천장을 받들고 있는 두꺼운 기둥들이 보이고.
마지막으로 가장 끝.
왕좌에 빛나는 창을 쥔 신이 보였다.
꿀꺽!
가우리엘은 조심스럽게 그 새로운 신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의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워지자.
먼저 입을 연 것은 저쪽이었다.
"어서 와. 블라드 캐슬은 처음인가?"
"다, 당신은......!"
가우리엘은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블라드캐슬 최심층부 왕좌에 앉아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로, 로한?"
익숙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 * *
나는 오르헬의 추천에 따라, 가우리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치몬드가 앉아 있던 왕좌에 앉아서.
너무 과한 설정이 아닌가 싶어 처음엔 거절했는데......
"아냐, 아냐. 가우리엘 그 양반, 대천사라면서? 대천사는 콧대가 높다니까? 초면에 한 번 기를 콱 꺾어 둘 필요가 있어!"
결국 오르헬의 의견에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하염없이 가우리엘을 기다리던 그때.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궁금증이 있었으니.
과연 신성력은 그대로 쓸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악신 그룬트의 힘을 받았는데......가우리엘의 날개에서 받는 신성력은 괜찮으려나?'
굳이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직접 해보면 되지.
그렇게 해서 황금의 창을 만들어 보았는데......
별 문제 없이 잘 만들어 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하필 그때 문이 열리고.
뚜벅, 뚜벅.
가우리엘이 아주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점점 가까워졌다.
나야 저쪽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저쪽은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는데.
곧 나의 얼굴을 확인한 가우리엘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로, 로한?"
나는 황금의 창을 지우며 여유로이 대답하였다.
"오래간만이군."
"......"
가우리엘은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이렇게 대화를 나누기엔 조금 어색했으니.
나는 앞장서서 옆의 작은 방으로 걸어나갔다.
가우리엘은 아직도 넋이 돌아오지 않은 채로 나를 따라 걸었고.
그렇게 단둘만이 있는 공간에 들어서자.
나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앉지. 아니면 계속 서서 얘기할 생각인가?"
"아, 아......그렇군."
그렇게 마주 앉은 우리 둘.
이렇게 마주 앉는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직후.
후안 요새라는 곳으로 끌려가는 마차 위에서 이리 마주 앉지 않았던가.
그날 이후로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가우리엘 역시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헛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군. 내가 여기 올 것이란 건......어떻게 알았나?"
"신격으로 올라서는 순간, 근처에 있는 생명체들의 기운을 볼 수 있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순간, 심연이 그대를 들여다보듯."
"내가 그대를 감지 한 그 순간, 그대도 나를 감지했다는 것이로군."
"그렇다. 그래서 생각했지, 분명 너라면 이리 올 것이라고. 거신족과 싸울 우군이 필요할 테니까."
"......"
정확히 허를 찔렸는지.
가우리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그러나 그 눈빛 속에는 우려의 감정도 섞여 있었다.
가우리엘은 자신의 걱정을 내게 넌지시 털어놓았다.
"그 말인즉, 다른 거신족 또한 이 위치를 알고 있다는 말 아닌가?"
"알고 있겠지."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았느냐고? 간단하지."
"......?"
나는 테이블에 올려진 등불 아래로 손바닥을 집어넣으며 보여주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 거신족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내가 움직였을 거라 판단했을 것이다."
내 판단에 가우리엘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과감한 결단이로군. 하지만, 나처럼 확인하러 오는 자도 있지 않겠나?"
"그럼 더 좋지. 이리 찾아오는 녀석이 만만한 놈이라면......제 발로 와서 각개격파 당하는 꼴이 될 테니까."
오히려 웃어 보이는 나를 보며.
이제 놀라는 것을 넘어, 가우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신족을 만나 본 적이 있는 눈치로군."
"몇 놈 정도는. 바르바우와 나올. 그리고 헬페리온."
"호수의 거신과 바다의 거신, 불씨의 거신......그들을 마주하고도 이 자리에 있다는 건, 그들을 이겼다는 소리로군."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너무 당연한 소리니까.
그러나 아직 가우리엘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힘과 능력이, 거신족의 전부라 생각하면 안 된다네. 그들은 하위 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알고 있다."
하위 신, 상위 신.
나도 이미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직접 신의 경지에 올라서 보니 더욱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냉정히 평가를 내릴 수도 있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 사실을, 가우리엘에게 담담히 말해 주었다.
"저들 하위 신과는 차원이 다르겠지. 지금의 나로서는......상위 신들 중 하나라도 마주쳤다간, 무조건 죽는다."
* * *
새로운 신의 탄생을 눈치챈 안테이오스는.
그 웅장한 거구를 일으켜 동굴을 빠져나갔다.
이미 해는 저물어 있었고.
바위로 이루어진 산은, 그 극심한 일교차에 의해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땅처럼 변해 있었다.
이 돌덩이뿐인 땅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 안테이오스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존재감은 더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쿵......쿵......
안테이오스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빨리 꺼내 줄 생각은 없었거늘......'
사실 안테이오스가 이 바위산에 터를 잡고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절대로 죽일 수 없는 불사의 뱀, 히드라.
그 신화 속 뱀이, 바로 이 바위 산 아래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노리고 이 산에 터를 잡은 것이고.
그러나 이날이 이렇게 빨리 오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안테이오스였다.
제2차 신의 전쟁이 벌어지는 날에, 녀석을 깨우려고 했건만.......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안테이오스처럼 오랜 세월 살아온 존재는, 이런 변수에 인정하는 것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져 있었다.
'때로는 생각과 달리 흘러간 일들이 좋은 결과를 주기도 하니까.'
그렇게 마침내 오른 산의 정상.
그곳에는 깊은 구덩이 하나가 있었다.
이곳이었다.
이 바위산의 가장 깊은 곳과 연결된 유일한 길 말이다.
안테이오스는 그 육중한 몸을 내던졌고.
휘우우우우웅......
한참을 바람을 가르며 추락하고 나서야.
쿠우우웅!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렇게 산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한 안테이오스.
그는 천천히 그 고개를 들었다.
그런 안테이오스의 앞에.
"크르르르르르르!"
산의 가장 무거운 바위에 깔린 뱀 머리 하나가 독니를 드러내며 눈을 부라렸다.
안테이오스는 그 뱀, 히드라에게 다가가 손에 쥐고 있던 시체 하나를 툭 던졌다.
바닥을 나뒹군 그 시체는 다름 아닌 전 뱀파이어 로드, 로크였다.
"먹어라."
오랜 세월 굶주렸던 히드라는.
짧게 안테이오스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얼른.
꿀꺽!
로크를 삼켰다.
간만에 먹어보는 고기 맛에.
히드라의 눈에 작은 광채가 돌아왔다.
안테이오스는 자세를 낮추어 앉으며, 히드라의 머리 옆에서 속삭였다.
"이놈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놈들, 다 잡아먹는다면......너를 괴수가 아니라 하위 신으로 승격시켜주마. 내가 직접 처리하고 싶지만. 알다시피 신이란 본디 바쁘거든."
"샤아아아아!"
거대한 바위 아래 짓눌린 머리의 눈동자가, 안테이오스를 향해 돌아갔다.
그에 안테이오스가 내리깔아보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나쁜 조건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