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샤아아아아......
나를 감싸던 붉은 기운이 차츰 소멸하고.
오르헬이 가장 먼저 나의 변화를 눈치챘다.
"신격......에, 올라 선거야?......"
너무 작게 중얼거린 나머지 다른 이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리치몬드와 앤드류는 고개를 동시에 똑같이 갸웃거렸다.
뭔가 느끼긴 했는데 잘은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분위기가......바뀐 거 같은데?"
"그쵸? 엄청 뭔가......묵직? 한?"
그에 크뢰이튼이 둘의 옆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방금 오르헬 경이 말 한 거, 못 들었소들?"
리치몬드와 앤드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슨......?"
"못 들었는데요?"
"로한 경은, 우리의 영역을 넘어섰다네."
"......?"
"예? 그게 무슨......"
크뢰이튼은 또박또박, 한 글자씩 대답을 하였다.
"신이, 되었다는 말일세."
"서, 설마......"
"뱀파이어의 신?!"
그에 리치몬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미친! 큰일이네......"
"왜, 왜요? 리치몬드 형님?"
"그럼 이제 로한 형님이 아니라 로한 신님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냐?"
"그렇네요! 큰일이네요!"
그들의 실없는 대화에.
"풋."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 * *
호칭은 대충 정리를 했다.
신님이라고 불리는 건 아무리 나라도 부담스러웠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냥 형님으로 유지하기로 결정이 난 것이다.
호칭 정리가 끝난 후.
앤드류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근데, 진짜 신이 된 거에요? 어때요? 신이 된 기분은? 막 날아다닐 수도 있고 그래요?"
"날아다니는 건 원래 할 수 있었다."
"아......맞다. 날개 있었지? 참."
사실 정확히 나도 아직은 무엇이 바뀌었는지 알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송곳니가 조금 날카로워진 것 같기도 하고.'
혀에 슬쩍슬쩍 닿는 송곳니가, 왠지 모르게 더 뾰족해진 느낌이 들었다.
뱀파이어처럼.
나는 오르헬을 쳐다보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내가 얼마나 오래 가만히 있었지?"
오르헬은 손을 휘저었다.
"오래라니? 거의 혈석의 힘을 흡수하자마자 바로 정신을 차렸는데?"
"바로?"
"어. 잴 시간도 없을 정도로."
"그렇군......"
지금 내 안에 넘치는 힘과.
그리고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룬트라는 자와의 대화.
헛것을 본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간 감각이 엉망이 된 것 같네.'
잠시 동안이지만, 신이 만들어낸 공간에 들어갔던 게 원인인듯싶었다.
그 안에서는 엄청나게 길게 느껴지는 시간도, 실제로는 찰나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오르헬은 그런 내 말에서 이상함을 느낀듯하였다.
"뭔가 있구나? 브라더."
"혈석을 통해 한 목소리를 만났었다."
"그럼 그렇지. 질문이 이상하더라고. 그래서, 그 목소리가 무슨 말을 한 거야?"
오르헬은 전에 본 적 없이 간절함과 진지함이 섞인 모습이었다.
어쩌면 이번이 자신의 진짜 과거를 알아낼 수도 있을,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으니까.
나도 그를 돕기 위해, 그 안에서 들은 이름을 되짚어 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을 그룬트라고 하더군."
"그룬트? 그룬트라......그룬트. 흐음."
한데 예상외로.
오르헬은 그룬트라는 이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 이름에 반응을 한 것은, 크뢰이튼이었다.
"그룬트라면, 심연을 기어오른 신이 아니던가?"
나는 크뢰이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역시 비슷한 말을 하였다."
"심연을 기어오른 신이라면, 알고 있네."
"그는......어떤 존재였지?"
"간단한 질문이로군. 그는 한마디로 정의가 되는 존재였네. 순수 악."
어쩐지.
이상한 놈이다 싶더니.
평판이 보통은 아니었다.
* * *
"그는 아를렘이 신들의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만들어 준 존재였네."
"전쟁의......명분이라고?"
"과거 크로토스가 군림하던 당시의 거신족은, 우리가 지금껏 봐왔던 거신족들과는 그 수준이 달랐네. 지금 남은 거신족들은 거의 대부분 당시에 거인족들이 거신족으로 격상된 존재들이지."
"진짜 거신족은 따로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정확하네. 신으로 태어난 자들 혹은 스스로 신의 경지에 올라간 자들. 그런 자들이 진짜 거신족이었지. 그런 거신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때에는, 감히 아를렘도 고개를 들지 못했네. 그러던 때에, 심연의 저 깊은 곳에서 악신이 탄생했지. 그룬트."
이게 무슨 고대 신화 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그런데 희한하게도......흥미가 돋기는 했다.
"거신족이 아닌 다른 종족에서 태어난 유일한 신, 그룬트는 당시의 거신족들조차 두려움에 떨게 하였네. 홀로 어둠을 누비며 거신족들을 사냥하고 잡아먹고 다녔거든. 재미있다는 이유로 말이지."
"그런 성격 같았다."
"당시 그의 이명은 신을 먹는 자, 갓 이터."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작 몇 마디를 나눈 것임에도, 그 목소리의 주인 그룬트라면 저지를 만한 일이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신족은 그룬트를 죽여서 그 시체마저도 다시 심연에 던져버렸다고 들었네."
"그 그룬트가, 저 혈석 안에 있던데?"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마그마로스는 팔짱을 낀 채로 추론을 하였다.
"거신족에 의해 육체와 정신을 강제로 분리당한 것인 게 아닐까 싶은데. 육신은 심연으로 던져버리고, 정신은 그 혈석이라는 것 안에 가두어 버린 거지."
"목소리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거신족에 대한 놈의 분노를.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는 추측이로군."
지금에 와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혈석을 통해 느낀 그룬트의 목소리에서는 조급함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오랜 기간 정신체로만 버텨 왔지만, 이제는 그 마지막 여력마저 얼마 남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실제로 나와 그룬트 사이의 거래는, 내게 아무런 강제력도 없는 것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거래라기보다는 소멸되기 직전 마지막 부탁에 가까운 것이지 않을까 싶었다.
"여하튼. 거신족도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걸 깨달은 아를렘은, 그때부터 거신족의 폭정에 반기를 들었다네. 그래서 전쟁이 시작되었지. 그 전쟁의 승리로, 중간계는 지금처럼 평화로워질 수 있었고."
악신인 주제에, 본의 아니게 좋은 일을 해버린 건가?
참으로 묘한 운명이라 할 수 있었다.
한편, 가만히 듣고 있던 오르헬은.
조심스럽게 다시 입술을 떼었다.
"그렇다면......현세대의 뱀파이어들은, 실질적으로 전부 그 악신의 후손이었던 건가? 어쩐지 피를 마시고 싶다는 욕구가 드는 것부터 이상하더라니......"
그는 스스로의 처지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야 앞뒤가 맞네. 내게 혈석을 주었던 그 천사. 그 천사가 괴물이 되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의 뜻이, 이제야 이해가 돼."
물론 그 힘 덕분에 죽었던 오르헬이 되살아나기는 했겠지만.
정작 아직 오르헬이 원하는 정답에는 크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럼 난......거신족이었던 건가?"
논리적으로는 타당하긴 했다.
거신족이 혈석을 처음 만든 게 아닌가?
그 혈석을 통해 부활하며 뱀파이어가 되었으니......얼핏 그럴듯싶긴 했지만.
그 이론에는 큰 헛점이 있었다.
그 부분을 리치몬드가 정확히 짚어주었다.
"에이. 거신족이라고 하기엔, 너무 쪼그맣잖아요?"
실제로 거신족이라 보기에는 당장 리치몬드보다도 작은 오르헬이었다.
리치몬드는 보란 듯이 오르헬의 옆에 서서, 자신의 가슴께 밖에 오지 않는 오르헬을 내려다보았다.
"야 인마. 조그맣다고 해. 왜 쪼그맣다고 하는 거야?"
"강조, 강조."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강조하냐고?"
"형님이 거신족은 아니라는 의미죠."
오르헬도 더 이상 반박을 하지는 못하였다.
"아직은 알 수 없다는 건가."
그의 풀이 약간 죽은 듯 보이자.
나는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을 강조해주었다.
"대신 다른 방향에서 접근할 방법 하나는 찾았지. 그룬트. 그 이름을 시작으로 또 조사를 이어나가다 보면, 새로운 것들도 나올 것이다."
나의 말에 오르헬이 슬며시 웃었다.
"뭐야? 걱정해주는 거야?"
"아직은 축 처질 때가 아니라서."
그 말과 함께 나는 오르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후우우우우웅!
나와 오르헬을 동시에 감싸는 붉은 기운이 잠깐 스쳐 지나가고.
오르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 사라졌던 로드의 힘이......순혈의 힘이......!"
내가 뱀파이어의 신이 되던 순간.
모든 로드의 힘이 내게로 되돌아오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드레트노어의 힘이야, 원래 내 것이었고.
오르헬이나 리치몬드 그리고 레메데스, 로크의 힘까지도.
새로운 신격이 탄생하며, 이전의 신격이 했던 일들이 전부 초기화된 것만 같았다.
물론 가장 핵심적인 로드의 힘만 돌아왔을 뿐.
오르헬과 리치몬드는 여전히 뱀파이어이기는 했다.
뱀파이어 로드에서 한 단계 격하된, 고위 뱀파이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방금 오르헬에게, 원래 그가 쓰던 힘을 다시 부여해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 더해서, 오르헬에게 레메데스의 힘도 보태었다.
그에 오르헬이 깜짝 놀랐다.
"이, 이건......"
"빌려주는 거다."
그에 오르헬이 입꼬리를 올렸다.
"훗. 알지, 당연히."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리치몬드가, 각을 딱 잡고 서서는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형님!"
나는 피식 웃으며,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리치몬드가 괜히 귀여운 척을 하며 다다닥 앞으로 나왔다.
그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이 제 형님이라 다행입니다!"
"누가 위아래인지 가려보자고 할 땐 언제고?"
"당연히 농담이지 말입니다!"
"그래?"
"옙!"
리치몬드 역시 이어서 뱀파이어 로드의 힘을 되찾게 되었고.
로크의 힘도 더불어 부여받았다.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형님!"
"말은."
나는 그들을 향해 한 마디 덧붙였다.
"로드가 될 자격이 있는 자가 있다면, 데려와도 좋다."
오르헬은 그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능력을 다 나누어 줘도 괜찮겠어?"
나름의 걱정이 되어서 하는 소리인 것은 알겠으나.
실은 할 필요 없는 걱정이었다.
"신의 힘을 직접 가져보니......그 정도 권한을 넘기는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더군."
나는 직접 내가 가지게 된 힘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손을 들어 올려, 오르헬이 그랬던 것처럼 피의 손톱을 세워 보인 것이다.
촤악!
그러나 힘의 크기 자체가 달랐던지라.
오르헬이 보여주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손톱이 늘어났던 오르헬과는 달리.
내 것은, 붉은 기운이 손 전체를 덮을 정도로 거대한 피어났던 것이었다.
굳이 비교해보지 않아도 뻔히 보였다.
지금 내 팔과, 오르헬의 손톱이 부딪힌다면......어떻게 될지.
그걸 보니 오르헬의 걱정은 쏙 들어갔다.
"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그렇지?"
"어, 어......"
나는 내 손을 휘감은 이 붉은 기운을 직시하였다.
크로토스조차 움직이게 만들었던 이 악신의 힘을, 나는 제대로 한 번 써 볼 요량이었다.
다만 가장 먼저 할 일은......손님 맞이였다.
나는 리치몬드를 향해 한 마디를 던졌다.
"곧, 가우리엘이 찾아올 것이다."
"가우리엘이라면......가, 가우리엘? 헉! 설마 대천사 가우리엘이요?"
"그래. 그 가우리엘."
* * *
그리고 며칠 후.
블라드 캐슬 앞에 한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가우리엘이었다.
"여기......인가?"
가우리엘은 사람이 드나들기 위해 만들어진 성의 작은 문 앞에 서서.
캐슬을 올려다보았다.
까아아아악!
까마귀가 하늘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그 광경이.
마치 악마성 같아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내쉬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가우리엘이 기척을 내기 직전.
끼이이익.......
문이 먼저 열리더니.
한 명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우와 씨!......진짜 대천사가 왔네? 미래도 보시는 건가......"
그는 자신의 존재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이 자리에 올 것이란 걸 예측한 누군가에 대해 놀라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심지어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는듯한데도 말이다.
아마도 새로운 신이 언질을 준 게 아닐까.
하나 사실 진짜 놀라고 있던 것은, 가우리엘 쪽이었다.
손님 맞이를 하러 나온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로, 로드 리치몬드?!"
뱀파이어 로드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