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익숙한 물건
뎅강......!
오르헬의 자비 없는 일격에.
레메데스의 목이 잘려나갔다.
눈을 부릅뜬 채로 레메데스의 머리는 바닥이 나뒹굴었고.
머리를 잃어버린 몸통은 힘없이 축 처졌다.
그러나 그 모습에 놀라는 이는 없었다.
그나마 리치몬드만이 조금 흠칫한 정도?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유는 뻔했다.
앤드류의 질문이 그 해답이었다.
"저래도 죽은 거 아니죠?"
그 물음에 오르헬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안 죽었어. 목을 붙여두고 조금만 있으면 다시 살아난다. 죽었다고 할 수는 없지. 지금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겠지만......단지 그뿐."
"거신족이랑 똑같네요."
"그래. 잠시 멈춰 둔 정도다."
이미 거신족을 통해 이런 모습을 보아왔던 우리였기에.
오히려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다는 게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나마 뱀파이어 로드는 죽일 수단이 있기는 했지만, 거신족은 아예 전무하였으니.
어쨌든, 지금은 레메데스도 죽일 방법이 없어 둘 다 매한가지이긴 했지만.
오르헬은 손가락으로 리치몬드를 불렀다.
그리고는.
"머리하고 몸통. 붙지 않게 따로 잘 보관해 둬."
"아, 알겠습니다. 형님."
그에 리치몬드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앤드류도 옆으로 붙으며 도왔다.
"저도 거들게요, 형님."
"아. 그래, 고마워."
비슷한 성격인 둘이 사이 좋게 레메데스를 처리하는 동안.
남은 이들은 다시 미궁에 빠진 배후에 대해 고민을 계속하였다.
오르헬은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문제는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는 건데......"
마그마로스와 크뢰이튼 역시 영 찝찝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뱀파이어 로드에게 접근할만한 거신이라.......애매하구만."
"쉽지 않을 것 같소."
나 또한 머리는 이리저리 굴려보았지만.
사실 딱 떠오르는 무언가는 없었다.
애초에 거신족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예 방향성을 틀어보기로 하였다.
"헐석. 레메데스 놈은 계속 혈석 타령을 하던데.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지."
오히려 놈들이 원하는 것을 파헤쳐 본다면 무언가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하나 오르헬도 약간은 곤란한듯한 느낌을 보였다.
"사실 혈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네. 애초에 뱀파이어 로드가 아니고서는 접근조차도 불가능에 가까울뿐더러, 아는 이들조차 몇 없으니."
"그런데 거신 놈들은 알고 있는 것 같군."
"그것 때문에 더 의문이라는 거야. 놈들이 어떻게 혈석에 대해 알고 있는지조차 이해가 안 가거든."
"레메데스가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혈석에 대해 알고 있었나?"
오르헬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뱀파이어로서, 세상에 처음 태어난 것은......내가 처음이었으니까."
그는, 조금은 오래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내 기억의 시작은, 아직 전쟁이 한창이던 전란의 시기였어."
* * *
신들의 전쟁이 한창이던, 아주 먼 과거.
"쿨럭! 쿨럭!"
오르헬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눈을 떴다.
"이건......또 뭐야?"
그는 자신의 손에 묻어있는 끈적한 액체를 털어 내었다.
마치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새가 떠오르는 모양새였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때.
그의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오르헬. 그게 네 이름이다......쿨럭!"
오르헬은 목소리의 방향을 향해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지독하리만치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뚫린 구멍뿐만 아니라, 입과 코.
그리고 심지어는 눈에서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천......사?......"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 단어가 머리에 떠올랐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머리 속에 아무런 지식도 없는 건 또 아니었다.
그게 오르헬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한편, 이제 생명이 거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 천사는.
오르헬을 향해 말을 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오르헬. 너는 뱀파이어다. 뱀파이어 로드."
"배, 뱀파이어가 뭔데?"
"피를 먹는 괴물."
"괴......물? 내가 괴물이라고?"
"그래, 괴물. 하지만 명심해라. 너는 원래 괴물이 아니었다. 죽은 너를 억지로 되살리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었다. 쿨럭! 그러니, 네가 괴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괴물로 살지 말아다오."
천사의 기침은 점점 더 악화되어갔다.
"쿨럭! 쿨럭!"
오르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이 세상에서, 자신에 대해 아는 이는 저 천사 하나 밖에 없는듯하였다.
저 자가 지금 죽는다면, 자신의 정체는 영영 미궁 속에 빠지리라.
그에 오르헬은 천사의 양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 그럼 나는 원래 뭐였는데? 나는 도대체 뭔데!"
"......"
그러나 이미 천사의 숨통은 끊어진 이후였으니.
오르헬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없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우르릉......콰과광!
하늘에서는 여전히 거신족들과 신들의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비가 흩뿌리는 하늘을, 오르헬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꽈아아아아악......!
거신 안테이오스의 거대한 손바닥이.
뱀파이어 로드 로크의 숨통을 움켜쥔 채 조여들어 갔다.
"켁! 켁! 이 개, 새......켁! 놔! 놓으라고!"
안테이오스는 로크의 얼굴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거신족이라는 뜻이라면서 내게 소리를 질렀지? 그럼, 거신족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렷다. 놈은 거신족과 다른 형상을 하고 있었나?"
"켁!......그, 그렇다! 내가 본 거신족과는 달리 인간 같아 보였다!"
"그런데 천계의 신성력도 가지고 있었고?"
"그, 그래! 그리고 정령왕의 정수도! 이, 이제 좀 놔! 놓으라고!"
하나 안테이오스는 로크의 발악에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로다......'
어찌 한낱 인간이, 거신족이 가진 세 번째 눈과 천계의 신성력을 함께 품는단 말인가?
그럴 경우 보통은 그 육체가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릴 터였다.
그릇보다도 강하고, 뜨겁고, 분에 넘치는 힘은, 그릇을 부숴버리는 게 자연의 이치였으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그 힘을 품을 정도의 그릇이라는 소리인가?'
하지만 그건 더 이상한 소리였다.
세상 감히 어떤 존재가 거신족의 힘과 아를렘의 힘을 같이 담는단 말인가?
거신족들조차도, 본연의 힘 이외에 더 큰 힘은 가질 수 없었다.
이 강인한 육신을 가졌음에도, 그들이 가진 힘 이상의 것은 오히려 해가 될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거신족이 가진 힘은 거대하였다.
'이해가 되질 않는군.'
도대체 어떤 놈이 그 모든 걸 손에 쥔단 말인가?
안테이오스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의 손에 들어가는 힘도 점점 더 커졌으니.
결국 로크 역시 살 궁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단 작은 동물로 변신을 해, 안테이오스의 손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억? 어어억? 어......!"
갑자기 로크의 입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하였다.
마치......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어째서?'
거신 안테이오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오래 방황을 했지. 그렇잖아.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전장 한가운데서 말이야."
이해가 되었다.
아니, 이해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격하게 공감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도......이 세상에 뚝 떨어졌으니까......'
지금 보니 어째서 그가 이상하게 밉지 않고 끌렸던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마음 저 아래 깊은 곳.
오르헬과 나는 같은 짐을 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영원히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자의 공허함.
온전히 스스로 새로운 길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가야 하는 자의 불안함.
그리고 두려움.
아마 그런 것들이, 나도 모르게 오르헬과 가깝게 느껴지게 만든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오르헬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로드라는 직책에 대해 알게 된 건, 엘프 로드 덕분이었어. 중간계의 균형을 수호해야 하는 존재라고. 그래도 처음엔 모르겠더라고.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건지. 애초에 왜 나여야만 하는 건지. 그것도 매번 흡혈 욕구가 솟구치는 이 괴물 같은 육신을 가진 채로 말이야. 근데, 그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고, 또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조금씩 바뀌더라고."
오르헬은 쑥쓰러운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이런 건 조금 더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건 조금 더 많이 먹어보고 싶다. 이런 건......내가 지켜주고 싶다."
그는 그대로 걸으며 리치몬드를 돌아다 보았다.
"너는 모르겠지만, 인마. 너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어. 내 인생에서......없어지지 않았으면 했던 것들."
리치몬드도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던 것인지.
고개를 홱 돌리며 대답했다.
"뭐, 뭐 그런 소리를 하고 그래요?"
오르헬은 피식하면서 리치몬드가 얼굴을 돌린 방향으로 따라갔다.
"야, 우냐?"
"우, 울기는!"
"그냥......얘기해 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레메데스도, 드레트노어도. 다 좋은 놈이었잖냐. 내 욕심에 그 애들, 괴물로 만든 거지."
"괴물? 웃기지 마쇼, 형님. 형님은 각자 다른 이유로 죽어가던 우리들 살려준 은인입니다. 그 사실은 절대 안 바뀌어요."
"미안했다. 항상. 그래도 말이야......이 형님은 항상 그랬어. 너희들이 있어서 좋았고, 고마웠고, 그리고......"
리치몬드는 그만 오르헬의 말을 끊어버렸다.
"아, 거기까지만 해요! 진짜 울겠다!"
이미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팽, 풀고는.
"우리 살린 게 형님이 한 거요? 혈석이 한 거지. 형님이 신경 쓸 일 아니오. 그리고 솔직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투정부린 놈 있었나? 그런 놈 없었어요. 폼 그만 잡아요."
"후후. 그런가?"
"그런가? 는 무슨. 늙었소, 형님도."
"그래. 늙었나 보다."
리치몬드가 눈물 콧물을 빼는 사이.
우리는 어느덧 혈석이 보관된 장소 앞에 섰다.
애석하게도 그 깊은 이야기를 다 들었지만.
그 누구도 아직 혈석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접근하는 이는 없었다.
해서 하다못해 직접 혈석을 마주해보기라도 하자, 라는 마음가짐으로 도착한 이곳.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혈석을 보러 온 것이었는데......
정작 혈석을 마주한 나의 표정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 반응에, 오르헬과 리치몬드는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서, 설마 이걸......본 적이 있는 거야?"
"이게 뭔데요? 로한 형님? 예?"
놀란 동태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둘.
그러나 나도 아직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다름 아닌 혈석의 정체는......
'권능의 돌이잖아?'
의외로 익숙한 물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