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저 꼴 났을 거 아냐?
리치몬드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블라드 캐슬의 정문 쪽 숲이......마치 지옥처럼 변해버린 까닭이었다.
타닥......타닥......!
여기저기에서는 아직 꺼지지 않은 잔불이 연기를 피우며 수풀을 태우고 있었고.
오랜 세월 이 자리를 지키던 거목들은 태풍이라도 만난 듯, 쓰러진 채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바닥에는, 로한이 앉아 있었는데.
문제는 그 밑에 깔린 이상한 물체였다.
"서, 설마......저건......"
리치몬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기에.
그에 옆으로 나와 선 오르헬이, 대답을 해주었다.
"어. 맞는 거 같네, 네 생각."
"그, 그렇다면......지, 진짜로......"
"저거, 보아하니 사이즈가 딱 레메데스네. 키 봐라, 키."
"......!"
오르헬은 피식 웃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거 봐라,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 그랬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과 함께.
솔직히 이렇게 성 밖으로 나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오르헬을 포함한 그들을 믿지 않았던 리치몬드였다.
말이 되는가?
뱀파이어 로드가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지 않나.
뱀파이어 로드들 중에서도 최약체로 분류되는 리치몬드 자신과, 로크만 하더라도 그랬다.
여기서나 최약체이지, 다른 곳에 가면 감히 우러러볼 엄두도 없는 존재 말이다.
만약에, 어떤 인간 놈이 뱀파이어 로드인 자신의 크게 심기를 거슬리게 하였다 치자.
분노를 삭이지 못할 정도의 큰 잘못을 하고 말이다.
그런데 하필 그놈이 어떤 왕국의 국왕이었고, 그 왕국 한가운데 리치몬드가 뚝 떨어졌다고 가정을 한다면?
그날로 그 왕국은 지도에서 사라진다고 봐도 무방했다.
로크?
로크는 오히려 자신보다 더 강자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별반 다르지 않을 터.
즉, 로크나 리치몬드도, 뱀파이어 로드 중에서 따지자면 약한 편에 분류될 뿐.
일반적으로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경지에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라는 존재였다.
중간계에선 그나마 같은 로드급 존재라고는 드래곤 로드와 엘프 로드뿐인데......
'드래곤 로드는 이미 수백 년 전에 그 모습을 감추었고, 엘프 로드 역시 소식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중간계에서는 뱀파이어 로드를 누구도 대적할 수 없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거신족도 아닌, 고작 인간이.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심지어 그 많은 인원이 몰려갔음에도 더 약체인 로크조차 생포하지 못했는데.
로한은 홀로 레메데스를 바싹 튀겨 놓은 것이었다.
'엄청......나다......!'
감탄.
그리고 이어서 든 감정은......두려움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에서 느껴지는, 생존 본능이 만들어내는 두려움.
'근데, 나도 싸웠으면......저 꼴 났을 거 아냐? 와! 씨!'
물론 자신과 로한의 힘겨루기는 실전이 아니었을 테니, 로한이 조금은 봐주긴 했겠지만......
상대의 본모습을 본 리치몬드의 손은 그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미약하게 떨렸다.
그리고 동시에 오르헬이 얄미워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장난이라도 선 넘었지, 이건!'
* * *
내 밑에 누워 있는 레메데스는, 놀랍게도 새카맣게 숯덩이가 된 꼴을 하고서도 숨이 붙어 있었다.
피부 전체가 검게 타버려 굳어버릴 정도가 되어서도.
물론 이렇게 공격하더라도 죽지 않으리라는 것 역시 알고는 있었다.
'뱀파이어 로드를 죽이기 위해서는 전용 무기가 있어야 하니까.'
드레트노어의 심장 감옥검처럼 말이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런 섭리까지 거스를 능력은 아직 없었으니.
죽일 수는 없었다.
다만 레메데스의 체력은 거의 한계에 다다른듯했다.
뭐, 나도 작정을 하고 천지스톰 급으로 죽어라 계속 지져댔으니, 체력이 빠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섭섭했겠지.
어쨌든.
이렇게 숨이라도 붙어 있으니, 말은 할 수 있을 터였다.
내 옆으로 오르헬이 쭈그려 앉았다.
"이봐, 레메데스. 네가 이 중간계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로드로서. 마지막 그 책무를 다 할 기회를 주겠다. 누구냐? 누가 너와 로크에게 접근한 것이냐?"
오르헬은 혹한보다도 차가운 눈빛으로 레메데스를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 사이 눈알을 회복한 레메데스는.
아직은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채, 녹아 눌어붙은 입술로 겨우겨우 웅얼거렸다.
"어리석구나, 오르헬. 이미 그런 책무를 유지해야 할 세상은 끝을 향해 저물어 가고 있다.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될 때인 것이야. 이렇게 시류를 읽지 못해서야 어찌 로드라고 불릴 수 있단 말인가? 네놈이야말로 마지막 기회다. 나를 따라온다면, 그리고 혈석을 내어 놓는다면. 그간의 정을 생각해, 내 직접 거신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부탁해 보겠다."
오르헬은 그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가지는 확실하네. 말이 안 통한다는 거."
오르헬은 그대로 일어서서.
손톱에 피의 기운을 실었다.
그리고는 가차 없이.
촤악!
레메데스의 목을 쳤다.
* * *
뱀파이어 로드 로크는, 마치 숨이 넘어갈 듯 호흡을 헐떡이며.
"허억......! 허억......!"
한 공간에 도착을 하였다.
그곳은 암석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암석 산의 한구석이었다.
로크는 혹여나 추적자가 있을까 뒤를 흘깃거리며,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바위들을 넘어갔다.
그렇게 한참 후.
그의 발걸음이 잠깐 멈춘 곳은, 거대한 암석 동굴의 입구였다.
로크는 다시금 뒤를 살핀 후.
추적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괴물의 입처럼 거대한 그 동굴의 입구로 들어섰다.
저벅, 저벅.
자신의 발소리만이 이 어두컴컴한 동굴에 메아리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로크는 알고 있었다.
조용하기는 하나, 이 공간에 있는 것은 자신 혼자가 아니라는 걸.
그는 오르헬에게 당해 화끈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질질 끌며.
계속해서 동굴 안으로 깊게 들어갔다.
몇 번의 분기점이 지나고.
로크는, 그 동굴의 끝점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쿠구구구구......!
거대한 존재 하나가 고개를 천천히 내리며 로크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로크였지만.
레메데스가 없는 상황에서 그를 독대하니,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이 넘어갔다.
꿀꺽!
하나 그것도 잠시.
로크는 눈을 부라리며 거신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얘기가 다르잖나! 안테이오스!"
그 부름에.
바위의 거신 안테이오스가 되물었다.
"레메데스는 어디 있지?"
"네놈이 잘못된 정보를 넘긴 탓에 다 꼬였잖아!"
연신 목소리를 키우는 로크에.
안테이오스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약간 변하였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목소리를 낮추어라. 뱀파이어 로드. 나는 소란스러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잊었나?"
"......!"
그 말 한마디에 로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살기?
그런 허접한 기운이 아니었다.
신의 기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한 차원 위의 존재가 내뿜는 압박감.
로크는 제대로 된 정보도 주지 않고 자신들을 보낸 안테이오스에게 분노해 치를 떨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티도 내지 못하였다.
다시 한 번 안테이오스가 입을 열었다.
"레메데스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나의 물음에 답하라."
한결같이 명령조의 말들이었으나.
로크는 저항하지 못한 채 대답하였다.
"블라드 캐슬에, 이미 오르헬과 몇 놈들이 더 와 있었다. 리치몬드만 있을 거라던 네 말이 틀렸다는 소리다."
"......"
잠시 생각을 하는 듯 입을 다물고 있던 안테이오스는.
다시금 물었다.
"오르헬이 있더라도 레메데스가 잡힐 일은 없어야 한다."
그에 로크가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런데 방금도 말하지 않았나. 오르헬 외에 몇 놈이 더 있었다고."
"그래 봤자......"
"불의 정령왕, 마그마로스. 그자도 섞여 있었다!"
"......마그마로스?"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안테이오스 역시 당황스러움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레메데스와 달리 다소 다혈질이었던 로크는.
그 순간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다시금 열불이 뻗쳤다.
"그리고 또 나올은 또 왜 그놈들 편에 선거지? 그리고 왜 말해주지 않았느냔 말이다! 나올이 블라드 캐슬의 정문에서 소란을 피운 덕택에 꼬이기 시작했다고!"
"나올이......배신을 했다는 말이냐?"
안테이오스가 눈을 가늘게 뜨자.
로크는 오히려 더 쏘아붙이기 시작하였다.
"그게 전부인 줄 아나? 아니! 헬페리온의 불을 쓰는 놈도 있었고, 이상하리만치 강한 인간 놈들도 셋이나 섞여 있었단 말이다! 이것도 그냥 일부라고. 더 큰 문제도 있었어! 지금까지 말한 그 괴물 같은 놈들은 전부 내 뒤에 붙었었다. 오르헬까지 포함해서!"
너무 급진적인 상황의 변화에.
심기가 거슬렸음에도 안테이오스는 입을 꾹 닫고 로크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무슨 뜻이냐고? 단 한 명! 단 한 명이 레메데스 형님을 처리했다고! 이게 말이 되느냐는 소리다! 심지어 그 놈! 분명히 제3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거신족이라는 뜻이잖아!"
로크는 목소리에 힘을 끌어 올려 외쳤다.
"짐승의 형태로 변할 수 있는 내 감각은, 다른 형제들보다 극도로 예민하고 동시에 월등하다는 거 알고 있지 않나!"
시선을 바닥에 두며,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로크였다.
로크의 주먹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은, 레메데스를 제압한 자의 압도적인 힘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확실히 놈에게서 느꼈다. 레메데스 형님을 쓰러뜨린 그놈은......분명 천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정령왕의 정수와......거신족의 기운까지도 품고 있었어!"
로크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거신 놈이 자신과 레메데스를 함정에 빠뜨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그 모든 기운이 다 뒤섞여 제대로 알아채기 힘들긴 했지만 내 감각은 그렇게 무디지 않다고. 제3의 눈에, 그 왼팔에 응집된 거신족의 기운까지......! 세상 모두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내 감각은 속일 수 없다고!"
제3의 눈이라는 소리에.
안테이오스가 상체를 숙이며, 로크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온 안테이오스의 거대한 눈알.
"......!"
그에 순간 로크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회피할 틈도 없이.
화아악, 덥썩!
눈알보다도 더 거대한 안테이오스의 손이 어둠 속에서 덮쳐와, 로크의 몸통을 짓이겨 버릴 기세로 움켜쥐었다.
콰드득!
그 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통스러울 테지만.
오르헬에게 당했던 부상조차 아직 완치되지 않은 로크는, 절로 새어 나오는 비명을 막을 수 없었다.
"으윽!......아악!"
그러나 안테이오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떼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것 무엇하나,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대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