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서열 정리
오르헬이 물었다.
"이게......가능할까?"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물의 정령왕의 심복이자, 아를렘이 직접 만든 최초의 골렘 중 하나인......
"트레이톤. 이 녀석, 되살리는 거."
오르헬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정도로.
트레이톤의 상태는 참혹했다.
박살이 낸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트레이톤의 군단으로 보이는 얼음 병사들 역시도 모두 박살이 난 채로 바닥에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하나 정령왕이 된 까닭일까?
그 병사들까지도 전부 되살려 낼 수는 없겠지만......
'트레이톤 하나 정도는 충분히 살릴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물론 단순히 감으로만 내린 판단은 아니었다.
내 눈에는 보였기 때문이었다.
트레이톤의 중심부에는 아직도 강력하게 남아있는......아를렘의 기운이.
이걸, 내 정령왕의 기운을 이용해 그 힘을 살짝 일깨워주기만 한다면......
'이렇게!'
화아악!
그러자, 내 기운과 트레이톤 내부의 힘이 마치 딱 맞는 열쇠와 자물쇠처럼 절묘하게 맞물리며.
빛과 함께 부서져 있던 트레이톤의 육체가, 시간이 역 재생되듯 중심부로 몰리며 끼워 맞춰졌으니.
누운 채 완성이 된 트레이톤은.
후욱!
곧게 뻗은 꼿꼿한 자세에서, 그대로 일어서는 준비 동작도 없이 일순간 내 앞에 마주 섰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물을 정령왕을 뵙습니다."
척!
정신이 돌아온 트레이톤은 나를 향해 바로 다시 무릎을 꿇고 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신기한 광경에.
오르헬과 마그마로스, 크뢰이튼이 모두 깜짝 놀랐다.
같은 골렘인 페가수스까지도.
"오오!"
"벌써 물의 정령왕이 가진 힘을 완벽히 소화한 건가......"
"신기하구만. 이것이 바로 서리 골렘 트레이톤인가?"
"히히힝!"
나도 물론 갑자기 확 살아나 버리니 조금 놀라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첫 대면에, 왕이라는 자가 화들짝 거리면 체통이 무너질 것 같아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혔다.
"내가 새로운 왕이자, 너의 새로운 주인이다."
"예. 주인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페가수스와 똑같이 골렘인데, 둘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페가수스는 거의 살아있는 말이나 다를 게 없어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당연히 페가수스보다 트레이톤 쪽이 훨씬 더 골렘이라는 명칭이 잘 어울리는 성향이기는 했는데.
'이게 내가 생각한 골렘이 맞긴 하지......'
막상 페가수스를 보고 나니, 딱딱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기는 하였다.
오히려 페가수스가 이상한 것이긴 하니까.
게다가 뭐.
'골렘에 굳이 다채로운 감정이 있는 걸 바란 건 아니었으니 상관은 없지.'
말만 잘 들어주면 되는 것 아닌가.
사실 그게 오히려 더 좋지.
원래 골렘이라는 게 그런 존재이니까.
더불어 트레이톤은, 언제든 내 명령을 들을 준비가 되어 보였다.
나는 녀석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그에 트레이톤은 충성심 가득한 목소리로 즉답을 하였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주군."
* * *
천 년의 얼음골을 내려가는 길.
오르헬은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물었다.
"어이, 브라더. 그 정령왕의 시험이라는 거. 어땠어?"
마그마로스 역시 그게 궁금하였는지, 고개를 슬쩍 내밀며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정확히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어땠는지......나도 궁금하던 참이었으니 말이다.
"잘 모르겠다."
하나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오르헬 그 대답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려웠다는 말이야? 쉬웠다는 말이야?"
"굳이 대답하자면......아무 일도 없었다."
"......엥?"
대답이 끝나자.
이번에는 마그마로스가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니. 그게 가능한 말이오?"
나는 숨길 필요도 없었기에.
얼음골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네 말대로, 환상이 나를 덮쳤다. 아마 그게 전대 물의 정령왕이 준비해둔 시험이었겠지."
"그럴 것이오. 그게 시험이 맞소."
"근데......그게 환상통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환영 속으로 온 정신을 집어넣어 버리는 것이더라고. 물속에 빠진 느낌이 들도록. 덕분에 숨도 쉴 수 없었지."
"......허어. 확실히, 전대 물의 정령왕은 환상 계열 마법에 재능을 가지고는 있었소."
"그래서 그냥 깨버렸다."
"......?"
마그마로스가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자.
나는 다시 한 번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냥 깼다. 그 환영 자체를. 그러고 나니, 바로 정수를 얻을 수 있더군. 그래서 모른다. 과연 그게 무슨 시험이었는지."
"......그게 말이오. 깨려고 한다고 깨지는 게 아니라......"
"근데 깼는데?"
거짓말할 필요도 없었으니.
내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너무 당당하니, 오르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럼 시험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깨버린 거야?"
"그렇다."
"하하하하! 역시 우리 브라더! 남이 만든 시험을, 남이 원하는 방식대로 해 줄 리가 없지! 그래야 우리 브라더 다운 거지!"
오르헬은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연신 폭소를 하였고.
"그, 그게......그렇게 깬다고 막 그렇게......마음대로 깨지고 하는 게 아닌데......그러면 안 되는 건데......안 되는 건데......"
마그마로스는 아직도 넋을 되찾지 못한 채.
계속 혼자 중얼거리며 걸었다.
* * *
쿵, 쿵, 쿵!
나올은, 오르헬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올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오르헬이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눈을 잃었기에 앞을 보지 못하는 나올을 배려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사실, 나올이 오르헬의 손을 잡고 걸어가 주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거대한 나올과 자그마한 오르헬.
그 광경이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느낌이 드는 디아즈는, 거신 나올을 쳐다보며 겨우 입을 떼었다.
"대, 대체......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놀라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나올의 옆에 선 오르헬을 보며, 앤드류도 화들짝 놀라 튀어 달려왔다.
"혀, 형님! 형님! 오르헬 형님! 이게 무슨 일이래요? 설마 싸워야 하는 적이랑 손잡고 온 건 아닐거 같고. 갑자기 이 거신은 어디서 나온 거에요?"
앤드류는 나올을 위아래로 훑으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 오르헬이 대답을 해주었다.
"어. 오늘부터 내 밑으로 새로 들어온 신입 동생! 걱정 하지 마. 우리 편이니까. 말하자면 좀 기니까,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줄게.""
나는 그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왜 나올이 동생이지? 거신이면 너보다는 먼저 태어났을 건데?"
"......그, 그런 사소한 건 그냥 넘기라고. 그렇지, 나올?"
오르헬이 그의 손을 툭툭 치자.
"나올도 상관없다. 새로운 형님이 생겨서 좋다!"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까 나도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이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앤드류는 열심히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아니 그러면......"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내자.
모두의 시선이 일순간 그에게 모두 쏠렸다.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가 싶어서.
하나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앤드류는 기운이 픽 빠지는 질문을 날렸다.
"그럼 나올보다는 내가 형님인 거 아니에요?"
이 복잡한 상황에, 저런 부분을 짚고 넘어가려는 앤드류에.
다들 풉! 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앤드류는 진지했다.
"제가 형님인거죠? 먼저 들어왔는데!"
오르헬이 반박을 했다.
"얌마! 아무리 그래도 나올이 나이가 몇 갠 데."
"나이는 형님보다도 더 많잖아요."
"그렇긴 한데......"
"아, 몰라, 몰라! 내가 형 할 거야! 그래도 되지? 나올!"
나올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나올, 좋다!"
"나이스! 서열 정리 완료!"
앤드류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에게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크게 관심이 없지만.
노이어 결사대 단장 에이트럼도 처음에는 거신 나올부터 견제했지만.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지금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다만 눈썰미 좋게도, 내 뒤에 서서 조용히 있는 트레이톤을 발견하고는 관심을 두는 것 같았다.
"로한 경, 그런데 저 뒤에 분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할 말이 있다."
* * *
나올과 오르헬은 조금 멀리 둔 채.
우리는 먼저 내려왔던 이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숙소에 들어섰다.
민가의 사람들이 나올을 보면, 심히 놀랄 테니 말이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천 년의 얼음골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모든 설명을 들은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놀라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가장 놀란 것은 결사대원들을 이끄는 에이트럼이었다.
"그곳에 매복을 하고 있었다니......생각도 못했소이다."
에이트럼은 놀란 정도가 아니라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해가 되는 게.
만약 그대로 밀어붙여서 행군을 했다면......결국 체력이 바닥난 대원들을 데리고 매복에 맞서 전투를 해야 할 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몰살당할 뻔했겠군."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감사의 말을 해왔다.
"로한 경이 아니었다면, 다 죽을 뻔하였소. 아니, 내가 다 죽일 뻔한 것이로군."
하나 매복을 예상하지 못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페가수스가 아니었다면, 아마 매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당했을 테지."
"그리 말해주니......고맙소이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그럼 이제는......어찌하실 생각이시오?"
에이트럼은 내게 조심스럽게 물어왔고.
나는 내 생각을 털어 놓았다.
"트레이톤이 있다면, 그를 통해 제단에 이 인장을 바꿔 끼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단이 위치한 테라트럼까지 가는 동안 거신의 기습을 받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으니......트레이톤만 보내기는 조금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트레이톤 본인은 최선을 다해 해내겠다고 대답했지만......
이미 거신들의 협공에 패배한 트레이톤이었다.
그렇기에 혼자 보내기에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하던 때.
에이트럼이 나섰다.
"우리가 함께 가겠소."
갑작스러운 그 발언에.
나는 대답할 타이밍도 놓치고 계속 말을 들었다.
"나올의 증언에 따르면, 지체할 시간이 없는 것 아니오?"
"그렇기는 하지. 거신들이 크로토스가 갇힌 그 감옥을 통째로 파괴하고, 그를 꺼낼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다면......"
"왔다갔다 둘 다 해결하기엔, 시간이 촉박하오."
나올이 말한 대로.
거신들이 크로토스의 감옥을 부술 방법을 찾아내었고.
또 그것을 실행하려 하고 있다면, 단순히 인장을 교체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람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또 인장 교체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문제가 되었던 것인데.
트레이톤에 노이어 결사대가 합류해서 움직인다면 아무래도 걱정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 천 년의 얼음골 같은 경우에는 저들이 워낙 힘들어하는 환경이기에 큰 도움이 못되었지만.
테라트럼이라면 숲 속에 위치한 곳이었다.
엘프들로 이루어진 노이어 결사대에게 테라트럼은 충분히 활약을 하기 좋은 지형이었다.
더불어 레바르센 역시 포텐셜이 확실한 자이니, 큰 도움도 될 것이고.
에이트럼의 의견에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충분히 타당성 있는 제안이다. 그럼, 그대들에게 이 인장을 맡기도록 하지."
나는 그의 의견을 따라, 둘로 병력을 쪼개기로 결단을 내렸다.
* * *
"인장을 갈아 끼우고 나면, 다시 합류하도록 하겠소."
"임무 완수하고 복귀하겠습니다, 주군."
에이트럼과 트레이톤을 필두로 한 인장 원정대가 먼저 출발을 했다.
먼저 얼음골을 내려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덕분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사라진 후.
이제는 우리도 다음 지역을 향해 이동을 시작할 차례였다.
목표는, 크로토스가 수감되어 있다고 알려진 영원의 감옥.
다만 그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었으니.
가는 길에 위치한 지역.
바로......
"자! 우리도 출발하자고! 뱀파이어 로드의 고성을 향해서!"
오르헬의 선행을 따라.
뱀파이어 로드의 힘을 얻기 위해.
뱀파이어 로드가 되기 위해.
모든 뱀파이어 로드가 최초로 탄생하였던 그곳.
블라드 캐슬을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