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재미있는데?
바르바우의 입가에서는 서서히 미소가 지워져 가고 있었다.
"이 냉기에서......저, 저 정도 힘을 낼 수 있다고?"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쌍둥이 거신 나올은 정신없이 얻어터지고 있었다.
퍽! 퍼퍽! 쾅! 빠악! 퍽!
불의 정령왕조차, 마그마로스조차 버거워하는 냉기였다.
또한 괜히 불씨의 거신 헬페리온 역시 이곳 천 년의 얼음골에 갇혀 있던 게 아니었다.
그 불타는 거신조차도 이 혹한의 감옥에서는 탈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물의 정령왕이 사라진 지금.
이제 냉기를 지배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올과 바르바우, 자신들 둘 뿐이었다.
감히 누가 이 서리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버틴다는 말인가?
또 감히 누가 이 서리 속에서 나올과 바르바우에게 송곳니를 들이민단 말인가!
버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솔직히 놀랍다고 생각이 들었을진대......
갑자기 공중에서 뚝 떨어진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 놈은, 고작 버틴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거신족인 나올을 아주 다져가고 있었다.
"크륵! 크르르르......!"
결국 나올이 물러서기에 이르렀으니.
바르바우는 그 광경에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나올이 힘에서 밀린다고?'
세 번째 눈을 이용해 완전체로 변한 나올은, 모든 거신들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이며 강력한 거신이었다.
바다의 거신이니만큼, 바닷속에서 더더욱 그 진가를 발휘하기는 하겠지만......
지상에서도 저 녀석이 일대일로 밀리는 것은 처음 본 바르바우였다.
만약 가능하다면 기껏해야 거신들의 왕 크로토스 정도가 전부일 터.
신들의 전쟁 당시에도, 나올은 수십의 천사와 아를렘의 협공에 겨우 당하지 않았던가.
하나 녀석은 이성이 아닌 야성으로 싸우는 만큼, 심각한 단점이 하나 있었다.
'전의를 상실하면......끝이다......!'
신들의 전쟁 때도 저런 모습을 보였다.
겁을 먹고 물러서는 꼴 말이다.
그때는 아를렘이 나타나는 순간에서야 저런 한심한 몰골을 보였었는데.
'아를렘이 없음에도 저따위 겁을 먹은 꼬락서니라니!'
그리 생각하기는 했으나, 어느샌가 로한을 노려보는 바르바우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게 변해 있었다.
"나올! 눈을 내게 넘겨라!"
그는 생각했다.
'힘은 꽤나 쓰는 놈인듯하나......과연 마법 앞에서도 그렇게 건방지게 서 있을 수 있을까?'
* * *
툭.
이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나올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바르바우가 소리를 치자, 바로 세 번째 눈을 빼내었다.
그리고 직후.
"바르바우......나올, 아프다......"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나올."
"아, 알겠다. 바르바우."
나올의 몸은 다시 보통의 거신족들처럼 조금은 얌전하게 변하였다.
역한 괴성만 지르던 것도, 다시 어눌한 말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물론, 그럼에도 위협적인 덩치인 건 매한가지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올은 손바닥 위의 눈알을, 저 뒤에 서 있는 바르바우를 향해 휙 던졌다.
그것을 보며 나는 눈을 번뜩였다.
'지금이다!'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드디어 온 것이었다.
세 번째 눈이 놈들의 손에서 벗어난 유일한 찰나.
나는 바로 발을 굴리며, 그들의 세 번째 눈알을 향해 튀어 나갔다.
내 목적을 놈들도 간파한 순간.
바르바우가 다급하게 소리를 쳤다.
"나올! 놈을 붙잡아! 우리의 눈을 노린다!"
"아, 알겠다아아!"
바르바우는 자신의 쪽으로 날아오는 눈알을 향해 뛰쳐나왔고.
나올은 나를 붙잡기 위해 또 달려나갔다.
하지만 우리 쪽 인원들도 넋 놓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미 두 거신 놈들이 내가 만든 얼음 방벽을 깨기 전부터.
이 타이밍을 노리자고 입을 맞춰두었으니까.
진기까지 모두 끌어다 써, 움직일 수 없는 크뢰이튼을 제외하고.
오르헬과 마그마로스가 나올을 따라붙었다.
"거신 놈을 잡아! 붙잡아!"
"알고 있다!"
오르헬이 나올의 등에 매달리며 목을 조르며 붙들었고.
마그마로스는 나올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놔, 놔라! 이놈들!"
"이이이익! 놓으라고 하면, 놓을 줄 알고?"
"멈춰라아아아아!"
그 둘이 들러붙었음에도 나올을 완전히 멈춰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녀석의 속도를 늦추는 정도는 해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나와 나올의 거리는 꽤나 벌어졌으니.
이제는 오롯이 나와 바르바우의 속도 싸움이었다.
물론 유리한 것은 바르바우 쪽이었다.
세 번째 눈알은 바르바우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고.
나와는 오히려 멀어지는 중이었으니까.
바르바우 역시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씨이이익!
미소를 지었다.
하나 나 역시 속으로 미소를 지었으니.
'성급한 놈이네.'
나올에 비해서 침착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벌써 저렇게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스르릉!
나는 검을 뽑아들며.
타다닷!
한 번 더 바닥을 박찼고.
그럼에도 바르바우는 아직 자신이 빠를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후훗! 검을 뻗어 봤자, 닿을 수 없을......"
서걱!
놈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는데.
내 검은, 보통의 검이 아니라.
신검, 모르테논.
보이지 않는 칼날을 가진 모르테논 말이다.
코 앞에서 세 번째 눈알이 세로로 쪼개지는 것을 본 바르바우는.
한 마디만 겨우 내뱉었다.
"억?......"
* * *
촤악!
가볍게 잘려버린 쌍둥이 거신의 세 번째 눈.
그 광경을 바로 앞에서 봐 버린 바르바우는 그대로 서서 얼어붙었고.
오르헬과 마그마로스를 뿌리치고 달려나오던 나올은, 당황한 듯 눈알을 굴렸다.
"어, 어어어......바, 바르바우! 어떻게 해? 어떻게 해?"
"......"
그러나 바르바우 역시도 대답을 해주지는 못하였다.
설마 이렇게 세 번째 눈을 잃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지.
그에 나올이 얼른 바닥에 떨어진 세 번째 눈을 양손으로 줍고는.
바르바우의 옆으로 착지하였다.
쿠우웅.
육중한 몸이 바닥에 떨어지자, 바닥이 흔들렸지만.
그 누구도 그런 소소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르헬과 마그마로스 역시 눈도 깜짝하지 않으며, 내 좌우로 나란히 섰다.
"에이 씨. 붙잡으려고 했는데. 빡세."
"미안하네. 결국, 놓쳤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잘 버텨 주었다. 덕분에......베었거든."
그제서야 오르헬과 마그마로스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된 거야?"
"베었단 말인가? 설마......나올의 손에 들린 저게......"
"오오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허둥지둥하고 있는 나올을 보기만 해도.
나올은 두 조각이 난 채 손 위에 올려진 세 번째 눈을 보며 울먹였다.
"바, 바르나우......"
"......때문이다."
"응?"
바르나우는 하나뿐인 눈을 희번덕 뜨며 소리쳤다.
"네놈 때문이라고! 네놈이 똑바로 던지기만 했어도......!"
그에 나올은 어깨를 움츠렸고.
"미, 미안......"
하나 그걸로 바르나우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으니.
"말로만? 이번에도 말로만? 내가 그냥 넘어가 준 게 한두 번이야? 이번에는 못 참아!"
"바, 바르나우? 잠시만! 잠시만!"
결국 바르나우는, 나올의 하나 남은 눈마저도 뽑아버리기에 이르렀다.
푸욱!
"으아아악! 아, 아프다, 바르나우! 아프다아아!"
"시끄럽다!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라고!"
그 잔혹한 광경에.
오르헬과 마그마로스조차도 혀를 찼으니......
"미친놈......"
"정도가 없군."
촤아악!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올의 눈을 취한 바르나우는.
그것을 자신의 왼쪽 눈에 집어넣었다.
번뜩!
* * *
"끄어어어어억!"
전혀 예상도 못 한 순간에 생눈이 뽑혀버린 나올은, 얼굴을 감싸 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아, 안 보여......바르바우! 안 보인다아......!"
하지만 바르바우는 차가웠다.
그는 나올을 발로 차버려, 저 멀리 날려버린 것이다.
"평생을 참았다! 이제 네놈 투정을 듣는 것도 지긋지긋해! 네놈 탓에 다른 눈을 잃었으니, 이것은 내가 가지겠다!"
퍼억!
"커헉!"
나올은 눈바닥을 뒹굴며 저 아래로 굴러떨어졌고.
이제 바르바우의 두 눈은, 오로지 나만을 향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자, 이제 본 게임 시작이다. 저런 힘만 센 무식쟁이와는 다를 것이야."
"글쎄. 꼭 착각들 하더라고."
"......뭐?"
"쳐 맞기 전에는. 착각들 하더라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
"이 건방진 미물 따위가!"
바르바우는 발을 들어 올려 힘껏 바닥을 내리찍었고.
콰앙!
그로 인해 일어난 진동과 함께.
쌓여 있던 눈들이 뒤집어지며 솟구쳤고.
그것을 시작으로, 검은 얼음으로 이루어진 가시들이 바닥에서 튀어나오며.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여태까지 보여주었던 마법과는 확실히 급이 달랐다.
일전에는 한 줄기의 가시 공격만이 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몇 줄기가 동시에 발현하여.
여러 갈래로 쪼개어졌다가, 나를 향해 도주로를 막아버리며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도주로를 확실히 막아버리는 치밀한 일격이었다.
유일한 경로는 후방뿐.
물론 속도가 굉장히 빠른 탓에, 달리는 것으로는 후방으로 회피한다 한들 결국 붙잡힐 것이 뻔했다.
그러나, 나는 달려서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타타닷!
일단은 뒤로 몸을 날리며 거리를 벌리고.
"휘이익!"
휘파람을 불자.
저 하늘 위에 숨어 있던 페가수스가, 구름을 뚫고 급강하하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 저게 도대체......!"
갑자기 등장한 페가수스에, 바르바우의 눈이 흔들렸다.
물론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달리는 그 상태로.
풀쩍!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탔고.
내가 자리를 잘 잡은 것을 확인한 페가수스는 속도를 올렸다.
나는 녀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크게 돌아서, 저놈에게 역으로 한 방 먹이자!"
"히히힝!"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페가수스는.
크게 선회를 하며 돌아 날았고.
자신이 만든 검은 가시 마법을 뒤에 달고, 다시 자신에게 쏘아지는 것을 확인한 바르바우는.
"이, 이런......!"
당혹스러워하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나는 고삐를 움켜쥐며 한 손으로는 검을 쥐고, 미소를 머금고 호기롭게 놈을 향해 쏘아졌다.
"이랴!"
쐐애애애애액!
그리고 놈과 부딪히기 직전.
홱!
온 머리의 피가 한쪽으로 쏠릴 정도로, 급선회를 하는 페가수스였다.
바르바우는 양팔에 검은 얼음으로 된 방패를 만들어.
쩌저적!......콰과과과가가가!
자신이 쏜 마법을 자신이 막아내고 있었다.
공격에 꽤 전력을 쏟은 탓인지.
커다란 방패를 만들어 방어를 했음에도, 바르바우 자신조차 온전히 멀쩡하지는 못하였다.
"끄윽! 으으으으윽!"
놈이 흘리는 신음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죽지는 않았으니.
나는 페가수스의 위에서.
검은 얼음 가시를 다 막아내고서 씩씩거리는 바르바우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확실히 본 게임이 시작되니까 재미있는데?"
"......이, 이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