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어? 어디가?
콰과가가가가!
갑자기 솟아오른 거대한 얼음 방벽.
예상치 못한 그 방해물의 등장에 두 거신이 내지른 공격은 허무하게 막혀버렸고.
나올과 바르바우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르바우, 이상한 게 나왔다......"
"다른 놈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인가?"
그저 좁은 벽도 아니었다.
좌우로 길게 펼쳐진 형태의 장벽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생각보다 높이 또한 높았기에, 뛰어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당황한 나올과 달리.
바르바우는 바로 몸을 날려, 방벽을 향해 몸통을 날렸다.
한 방에 박살을 내 버릴 작정으로.
하나.
콰아아아아앙!
전력으로 부딪혔음에도 얼음 방벽은 그것조차 버텨내 버렸으니.
그제서야 두 거신은,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벽이 보통의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에 나올이 소리쳤다.
"바르바우! 세 번째 눈알을 내게 줘라. 힘은 내가 더 세다!"
"......그러지."
바르바우는 왼쪽 눈알을 빼내어, 나올에게 던졌다.
휘익!
그 듣도 보도 못한 현상을, 나올과 바르바우는 익숙하게 해치웠다.
턱.
눈알을 받은 나올은 혀로 한 번 눈알을 닦고는.
푸욱.
자신의 왼쪽 눈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나올의 몸이 더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힘이......! 난다아아아아!"
콰득, 콰드드득!
뿐만이 아니었다.
나올의 몸은 기존과는 다르게 점점 변해갔다.
주둥이는 튀어나오며 동시에 이빨이 더 날카롭게 변했고.
팔뚝은 더 길게 늘어나, 고릴라처럼 4족 보행을 하기에 적합하게 바뀌었다.
더불어 몸 여기저기에서 뿔과 같은 날카로운 부위가 솟아올라.
그 형체는 더더욱 살벌한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이제 그 어수룩한 말투조차 사라져 버릴 정도로 마수의 모습이 되었으니.
"크아아아아아!"
나올은 완전히 지성을 버리고, 본능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에 바르바우가 혀를 찼다.
"이래서 세 번째 눈은 주기 싫었는데 말이지."
그는 나올이 날뛸 것을 감안해 몸을 슬쩍 피했다.
그리고 나올은, 끔찍한 괴성과 함께 얼음 방벽을 향해 돌진을 하였으니.
"쿠워어어어어! 쿠어!"
콰과가가가강!
그 인정사정없는 몸통 박치기에.
결국 거대한 얼음 장벽이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 * *
얼음 장벽을 만들어낸 직후.
"어, 어떻게 로한 경이 여기에......!"
나를 보고 가장 격하게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마그마로스였다.
거의 무슨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놀라니 말이다.
그러니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못 올 거라 생각한 것 같군."
"그, 그렇네......"
마그마로스는 순순히 인정을 하고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이곳에서 두 거신들과 공멸을 할 작정으로 싸웠고.
그것으로 내게 시간을 벌어주려 했다는 사실을.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대로 말을 했어야지."
물론 마그마로스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는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말이지.
만약 내가 진짜로 오래 걸렸더라면......
그리고 전멸한 채 죽어있는 이들의 시체를 마주하게 되었더라면......
그 미안함과 안타까움,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상실감은 도대체 얼마나 컸을 것인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에 약간의 분노가 치밀었다.
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는 걸 마그마로스 또한 깨달았는지.
그는 고개를 숙였다.
"속내를 숨긴 것은 미안하네......하지만 그때의 나는, 다른 방법이 보이질 않았네. 내 입장에선, 그대만큼은 지켜야 했어. 그대만큼 정령왕이라는 직책을 모자람 없이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흔치 않으니 말일세."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두 번은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고 현명한 판단을 해줬으면 좋겠군.
내 말 안에, 한 번의 더 기회를 준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깨달은 마그마로스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명심하도록 하지."
그때.
콰아아아아앙!
장벽 너머에서, 무언가 몸통을 들이받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하나 그 한 방으로 이 장벽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다만, 다음 순간 장벽 너머의 분위기가 싸하게 바뀌는 것을 느껴졌다.
그리고 그 직후.
"크아아아아아!"
소름 끼치는 괴수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우리 넷의 시선이, 모두 방벽을 향해 돌아갔다.
오르헬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마, 막을 수 있는 거지? 브라더?"
하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저 방벽이 무슨 불멸의 장벽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잠시 시간을 벌 수 있을 정도이다."
그에 마그마로스가 앞으로 나섰다.
"급조한 방벽으로 벌써 몇 번의 공격을 막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지."
"알아, 인마. 나도 알아. 그래도 지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잖아. 특히 저 친구."
오르헬의 시선이, 크뢰이튼을 향했다.
전력을 쏟아낸 탓일까.
살라맨더의 모습이 된 크뢰이튼은, 무릎을 꿇은 채 거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저 녀석. 계속 체온이 떨어지고 있어. 숨을 쉬면 쉴수록 냉기가 들어가니 더 그렇겠지."
물론 오르헬과 마그마로스라고 멀쩡하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도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가득한 것은 매한가지였으니까.
더불어 체력의 소모도 심각해 보이고.
그러나 크뢰이튼은, 그 와중에 특별히 상태가 나빠 보인 것이다.
사실 다급히 방벽을 세운 것도 크뢰이튼을 보았기 때문이었고.
마그마로스는 크뢰이튼에게 다가가 그의 등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리고는 그 손을 통해 크뢰이튼에게 화염의 기운을 조금씩 흘려보내기 시작하였다.
"이, 일단 응급 처치는 해보겠지만......이걸로는 모자랄걸세."
"그래? 그럼 빨리 내려가야 한다는 소리로군."
내 말에, 마그마로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그럼 빨리 끝내고 내려가도록 하지. 슬슬 여기 풍경도 좀 질리는 것 같아서."
"......?"
때마침.
나올이라는 거신 놈이, 한껏 몸을 부풀린 채로 내가 만든 얼음 장벽까지 뚫어내며 등장하였으니.
콰광! 콰가가가가강! 후두두둑......
나는 왼팔을 크게 빙빙 돌리며, 앞으로 나섰다.
"내려갈 채비들 하고 있어."
* * *
"푸르르르르르!"
마치 야생의 소처럼 콧김을 뿜으며 눈을 부라리는 나올.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 원래 애꾸 아니었나?"
분명히 페가수스를 통해 정찰하며 봤을 땐.
한쪽 눈뿐이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두 눈을 다 뜬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질문 아닌 질문에, 마그마로스가 대답을 해주었다.
"나올과 바르바우는 쌍둥이인지라, 두 놈이서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네! 그리고 세 번째 눈은 둘이서 번갈아가며 쓸 수 있지. 나올이라는 거신이 세 번째 눈을 꿰차고 있으면 저런 모습으로 변하게 되고, 바르바우라는 거신이 세 번째 눈을 꿰차고 있으면 더 고위의 마법을 부릴 수 있다네!"
마그마로스는 조금 더 설명을 보태었다.
"헬페리온 때와 달리 지금은 세 번째 눈을 노려도 소용이 없네! 강력한 얼음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으니까. 오로지 눈을 빼내어 서로 건넬 때만 노릴 수 있네!"
"흠."
그런 원리였던가?
신기한 놈들이네, 싶었다.
눈을 마음대로 뺐다 꽂았다 할 수 있다니 말이다.
'어디 보자, 그렇다면. 힘으로 나에게 밀린다는 걸 깨닫게 해주면......저 놈이 스스로 눈을 뽑아서 저 뒤에 똥폼 잡고 있는 바르바우라는 놈에게 눈알을 넘길 수도 있는 건가?'
대충 계산이 선 나는.
힘 자랑을 하러 달려오는, 나올을 향해 직선으로 걸어나갔다.
그런 나를 향해 오르헬이 소리쳤다.
"브라더! 그놈, 변신하기 전에도 힘이 장난이 아니었어! 정면 승부는 피해야 해!"
반면 저 멀리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거신 바르바우는 입꼬리를 비틀고 있었다.
"후후후. 몸을 쓰는 것도, 여유가 될 때 하는 것이지. 불의 정령왕도 버티지 못하는 이 혹한에서, 나올과 힘 싸움을 하겠다고? 어림도 없다!"
나는 저런 놈들이 제일 싫었다.
뭘 해보기도 전에 어림도 없다느니, 포기하라느니.
마음대로 결론을 내리고 잘난 척 뒤에서 무게 잡는 놈들 말이다.
그러는 사이 나와 거신 나올의 거리는 이제 지척으로 좁혀졌고.
바르나우의 입이 미소로 쭉 찢어졌다.
"하등하고 미약한 미물 같으니라고. 그 작은 몸뚱어리로 감히 거신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그에게 시선을 싸악 돌리며, 작게 대답해주었다.
"응, 돼."
거신쯤 되니 그 작은 대답도 들린 모양이었다.
* * *
내 대답이 진실인지, 허세인지 판가름나는 것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워어어어어어!"
멧돼지처럼 일직선으로 들어온 거신, 나올.
나는 오른발을 살짝 바깥으로 빼서 가슴을 열고.
휘익.
슬쩍 놈의 첫 공격을 피해내며 왼팔에 힘을 주며.
꾸우우우우욱!
놈의 왼쪽 다리를 통으로 걸어버렸다.
당연히 나올 역시 이성은 잃었더라도 동물적인 본성으로 내가 하려는 행동을 간파해내고는.
그냥 힘으로 밀어버리려 계속 발을 뻗었다.
그런데.
콰악!
저쪽도 거신이지만.
내 왼팔도 '거신'병의 왼팔이 아니던가.
게다가 나는 저놈들과 달리, 각종 포션과 여러 능력들로 추가 스탯까지 들어간 상태이니.
'깡 힘으로는, 안 밀려야지!'
거기까지 계산을 끝낸 나였기에.
자신감 있게 힘 대 힘 싸움을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는 내 예상대로.
콰당! 쿠당탕! 쿠우우웅......!
다리가 걸린 나올이 거칠게 바닥을 굴렀다.
나는 그 자리에 멀쩡히 서 있었고.
나올은 저쪽 절벽에 꼴아 박힌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정신없겠지.
그리고 인정하기도 어렵겠지.
"크, 크워어어어어어!"
놈은 절벽에 머리를 박은 채 소리를 질렀다.
짜증이 가득한 굉음을.
곧 거대한 팔뚝으로 다시 얼굴을 뾱 하고 빼낸 나올.
놈은 분을 이기지 못한 표정으로 침까지 질질 흘려가며 눈을 부라렸다.
나는 여유로이 상체를 풀며 손을 까딱까딱 흔들어 보였다.
"응. 드루 와, 드루 와."
"캬아아아아아!"
완전히 이성이 날아가, 달려드는 것조차 헛발길질까지 해대며 바닥을 치고 나오는 녀석.
저렇게 대가리 비우고 덤비는 놈은, 나로서는 땡큐였다.
나는 훌쩍 뛰어올라 태양을 등지며.
"뚝배기!"
콰아아아아앙!
놈의 정수리를 내려찍었고.
"켁!"
나올의 머리는 다시 바닥에 수직으로 처박혔다.
당연히 그거 한 방으로 뻗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고마웠다.
"턱! 간장! 간! 심장! 여기가......에라이 몰라!"
쾅! 쾅! 쾅! 퍽! 쾅!
거의 반죽이 되듯 찌그러지는 나올.
녀석 역시 가만히 맞지는 않고, 나름 반격을 해댔지만.
오히려 작은 나를 맞추는 건 힘이 들었다.
휙, 휙!
나야 타겟이 큼지막하니, 편했고.
퍽! 퍽! 퍼억! 쾅! 퍽! 퍽!
그렇게 한 10분쯤 지나자.
"커헉. 헉! 헉......헉!"
쥐어 터지던 나올이, 드디어 상황을 파악했는지.
눈탱이가 밤탱이 된 얼굴로 슬금슬금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그에 이번에는 내가 입꼬리를 쭈욱 찢어 미소를 지었다.
다시 손을 까딱까딱 흔들며.
"어어. 괜찮아, 괜찮아. 들어 오라니까? 들어 오라고. 어? 어? 어디가? 들어 오세요, 자식아. 콱! 처맞기 전에."
"깨, 깨개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