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무슨 시험이었을까?
풍덩! 꼬르르르르륵......!
문득 눈을 뜬 나는.
내가 물속에 빠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걸 깨닫고 나니, 혼란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 어째서?......'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천 년의 얼음골에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왜 물속에?......
'혹시 정신을 잃었나?'
하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마지막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분명히 정령왕의 정수를 잡은 것까지는 기억이 있다.'
만약 이게 그 직후의 상황이라면......
'진짜가 아닌 건가?'
그저 환상.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이렇듯 실제와 같은 환상을 겪은 게 처음은 아니니까.
더불어.
'페가수스도 보이지 않고.'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페가수스의 성향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녀석은 골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를 잘 따랐다.
아니, 골렘이라 그런 건가?
어쨌든.
내가 만약 정신을 잃었거나, 어디론가 이동한 거라면 페가수스 녀석도 쫓아 왔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 어디에서도 페가수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환상이라는 가정을 내린 나는.
이제는 정신을 차리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물론 그러는 사이에도 숨은 점점 막혀 갔다.
이렇게 높은 수준의 환영은, 환영에 먹힌 사람에게 진실과 가상의 경계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충분하였다.
나조차도 물 속에 잠겨 있다는 느낌이 명확하게 들었기에.
자연스럽게 호흡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내 예측이 맞다면......이건 정령왕의 정수가 만들어낸 환영이다.'
마그마로스도 경고를 해주지 않았던가.
[정령왕의 정수는, 자신에게 손을 뻗은 자가 그 힘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려 들걸세. 그대는 그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고.]
대자연의 힘을 자신의 수족처럼 끌어다 쓸 수 있는 자격.
그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손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게 마그마로스의 조언이었다.
전대 정령왕이 만들어 놓은 시험을 깨야 하는 것.
그래야만 물의 정령왕이 가진 모든 힘이 담긴, 정령왕의 정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리라.
'각오는 했는데 말이지......!'
예를 들어, 불의 정령왕 정수의 경우에는, 피부가 다 타들어 가는 환상통을 버텨 내는 게 그 시험이라고 했었다.
나 역시 지금 이 상황에서 물의 정령왕이 준비해 둔 시험을 치르고 그걸 통과해야 한단 말인데.
이건 환상통 정도가 아니라 그냥 환영 덩어리이니......
'골치가 아픈......음?'
그때.
잠시 까먹고 있던 게 하나 떠올랐다.
'그래, 나......환영 깰 수 있었지? 참.'
한동안 안 써서 잊고 있었는데.
내게는 [마나 버닝]이 있지 않았던가.
[일반 스킬 : 마나 버닝 (격투가 클래스 전용) - 남은 마나를 모조리 태워, 마법으로 인한 비물리적 정신 공격(디버프)으로부터 벗어난다.]
마나 버닝은 일반 스킬이고, 환영은 그래도 나름 정령왕의 환영이니.
이번에도 통할지 안 통할지는 해 봐야 알겠지만......
'해봐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 *
콰아아아아앙!
거신의 주먹질은 그야말로 자연재해와 다름이 없었다.
맞설 수도 없고, 그저 피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으니까.
그것은 정령왕인 마그마로스도, 거신에게서 태어난 크뢰이튼도.
그리고 뱀파이어 로드인 오르헬도 다르지 않았다.
나올과 바르바우는, 비록 오랜 과거이기는 하나, '신'이었던 존재였으니까.
오르헬은 바르바우의 살벌한 공격에 눈바닥을 구르며 외쳤다.
"야! 마그마로스! 공멸할 거라면서? 자폭이라도 해서 막을 거라면서? 얼른 좀 해보라고!"
마그마로스도 나올의 주먹을 피하며 소리쳤다.
"조금 전에는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더니!"
"그건 조금 전이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
"에잇! 정 없는 녀석!"
그런 놈들을 향해 두 거신이 분노를 하였다.
"이 약삭빠른 놈드으으을......!"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럼 그냥 맞으라고?"
"그럴 순 없지!"
그들이 시선을 끄는 사이.
크뢰이튼이 조심스럽게 후방을 노리기 위해 움직였다.
쿠우우웅! 콰아아아앙!
마그마로스와 오르헬이 제대로 숨 돌릴 틈도 없이 이리저리 동선을 꼬며 도망을 쳐 준 덕분에.
크뢰이튼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크뢰이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한 화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 외형도 변하기에 이르렀음에.
"크르르르......!"
그의 머리가 마치 붉은 도마뱀과 같았으니.
크뢰이튼은 도마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그마로스가 깜짝 놀랐다.
"살라맨더......!"
"뭐? 살라, 뭐?"
"거신족이 신으로 군림하던 때. 그 고대에 존재했던, 불의 정령이다."
오르헬 역시 크뢰이튼의 모습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그래서, 센 거 맞아?"
"약하지는 않았다. 다만 거신족에게도 먹힐지는......"
"몰라, 그냥 질러. 어차피 저거 안 먹히면 방법도 없잖아. 저 불도마뱀 놈이 선빵 치면, 우리도 들러붙어서 늘어지자고. 별수 없어!"
"그래야겠군!"
둘이 각오를 다지던 그때.
"빌어먹을 거신 놈들! 여기서 시체도 남기지 않게 태워주마아아아!"
크뢰이튼이 입을 쩌억 벌리며, 얼핏 드래곤이 연상될 정도의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검은 화염을 내뿜었다.
* * *
파아아아아앗!
마나 버닝 스킬을 사용한 직후.
눈 앞에 펼쳐진 환영의 세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토, 통한다?......'
마나 버닝과 정령왕의 환상이 각자의 명예를 걸고 부딪히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아무래도 마나 버닝 쪽이 이기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쩌적! 쩌저저적!
물로 가득 찬 세상이, 마치 유리가 깨어지든 사방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고.
와창창창!
이내 완전히 무너지며 실제의 세계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히히힝!"
정신을 차린 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다름 아닌 페가수스 녀석이었다.
녀석은 여태 내 곁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곁에 딱 붙어서, 바람을 막아가며 말이다.
게다가 자신의 몸이 금속인지라 차가운 걸 아는지, 아예 바짝 붙지는 않고 딱 냉풍만 막아낼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골렘이 이렇게 배려심이 있는 게 가능한 건가?
솔직히 조금 놀라웠다.
"여태 날 지켜준 건가?"
"히히힝!"
"풋."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나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녀석의 몸통에 손바닥을 올려 쓰다듬었다.
"차갑기는 차갑네."
나는 손에 살짝 열기를 올려 페가수스의 몸통을 데우며 물었다.
"뜨겁지는 않은가?"
"히힝."
페가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골렘이기는 골렘인지라, 열기에 다치거나 괴롭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더 속도를 올려, 페가수스 타기 딱 좋을 온도까지 올린 후.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가자. 이러는 동안에도 오르헬 등등 세 녀석이, 거신 놈들의 시선을 끄느라 고생하는 것 같으니."
제3의 눈을 통해.
전투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페가수스 역시 방향을 아는지.
정확히 목표를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하였다.
다만 나는 문득 짧은 궁금증이 생기긴 했다.
'시험을 깨야 한다던데......결국 무슨 시험이었을까?'
너무 쉽게 깨버린 탓에, 약간은 시험 내용이 궁금해진 나였다
* * *
"크뢰이튼이다! 바르바우, 크뢰이트으으은!......"
"나도 봤다!"
순식간에 수분을 모조리 날려버리며.
살갗이 쩍쩍 갈라지게 만드는 검은 화염.
그 인정사정없는 불길에.
바다와 호수의 거신인 나올, 바르바우조차도 방심을 할 수가 없었다.
크뢰이튼이 지금 내뿜는 검은 화염은, 그 농도가 불씨의 거신 헬페리온이 쓰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으으으윽! 감히 우리에게 이빨을 들이밀다니, 크뢰이튼!"
"뜨, 뜨거워! 열 받는다아아아......! 나올, 뜨겁다!"
그러나 말은 그리하고 있어도.
두 거신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버티고 있을 정도로 건재하였다.
그에 오르헬과 마그마로스도 그 틈을 타 각자 주력 무기를 꺼내었다.
촤아아악.
오르헬은 열 자루의 거대한 혈의 창을!
"크뢰이튼 저 녀석. 저 모습으로 변하니 말도 거칠어진 게, 성격도 좀 변한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마그마로스는 마치 바다의 용오름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불기둥을!
"집중이나 하게!"
"원래 집중도 적당히 릴렉스도 하면서 해야 하는 거야!"
"하여간 말은......!"
파바바바밧!
혈의 창들이 눈발을 가르며 쏘아졌고.
불기둥은 천지를 불살라버릴 듯한 기세로 두 거신들을 덮쳤다.
푹! 푸푸푸푹! 화르르륵!
그에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피로 만들어진 장창이 박힌 거신들에게, 크뢰이튼의 검은 화염에 마그마로스의 불기둥까지 겹치니.
마치 검은 불기둥에 혈의 창이 꽂혀 있는 것 같은 모양이 된 것이었다.
그들은 기력을 끝까지 끌어 올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몰아쳤다.
주변의 눈이 녹아 바닥에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추가로 만들어낸 작은 피의 암기들이 연신 그 불기둥을 뚫고 왔다 갔다 거렸다.
그 안에 있는 거신 놈들이 아주 넝마가 될 정도로.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고.
크뢰이튼과 마그마로스, 오르헬마저도 슬슬 체력이 바닥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불기둥 안에서 특별한 저항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쉬이이이익......
결국 천 년의 얼음골이 만들어내는 냉기에 불기둥조차 소멸하고.
겨우 서 있는 게 한계인 그들 셋은, 자연스럽게 불기둥이 휘몰아치던 그 자리로 시선이 꽂혔다.
"해치......웠나?"
그때였다.
쿠구구궁!
두 덩치가 다시 일어서는 것은.
그 광경에, 마그마로스와 오르헬이 혀를 찼다.
"깜빡했네. 이놈들......목을 쳐도 살아 있던 놈들이었지?......"
"에라이, 젠장......"
한편 거신들 쪽은 잔뜩 열이 받은 것 같았다.
"바르바우......나올, 진짜 화났다......!"
"그래, 나올......나도 이제 적당히 할 생각은 없어졌다!"
도마뱀 머리로 변한 크뢰이튼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좀......힘들어질 것 같구만."
바르바우와 나올이 각자 발과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치자.
콰과가가가가가가가!
뾰족한 얼음 가시들이 연속적으로 솟구치며, 셋을 향해 쇄도하였다.
"크으으윽!"
"피, 피하기는 늦었어! 마, 막아!"
"젠장!"
너무나 거대한 크기에 차마 도망칠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가시들이 셋을 덮치기 직전의 그 순간.
엄청난 지진과 함께.
쿠구구구구구구궁!
그들의 앞에 얼음으로 된 벽이 솟구쳤다.
그 장벽은, 두 거신의 공격을 너끈히 막아내고도 여유가 남았다.
그리고.
이어서 로한의 목소리가 저 위에서 들려왔다.
"내가 없던 사이 작전이 바뀌었나? 내가 오기까지만 버티라고 했을 텐데?"
그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검은 페가수스 위의 로한이, 위풍도 당당하게 마치 개선 장군과도 같은 모습으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