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잠시 잊고 있었군
'그래, 내가 언제부터 화염구 하나로 싸워 왔었던가?'
화염구 없이도 이미 내가 가진 건......결코 적지 않았다.
그간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얻은 경험치.
그리고 또 사지를 넘나들며 챙긴 갖가지 능력들.
그 모든 것들이 내 재산이었고, 동시에 나였다.
내 화염구와 마그마로스의 화염 채찍에 헬페리온의 시선이 유도된 틈을 타.
펄럭!
날개를 펼쳐 바람을 탔다.
그리고 낮은 궤도에서 순식간에 저 위쪽으로 비상하였고.
화아아아악!
곧이어 시야에 헬페리온의 세 번째 눈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헬페리온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열기는 그 기세를 더해갔다.
이 정도의 화력이라면 아마 이전에 쓰던 검은, 벌써 녹아버렸으리라.
하지만 지금 내 손에 들린 신검, 모르테논은 달랐다.
그 모든 화력을 뚫고 나와 함께 맹렬하게 돌진하였으니.
"이거나 처먹어라!"
그 외침과 함께 나는 헬페리온의 세 번째 눈에 검을 박아 넣었다.
푸욱!
거신의 몸이 처음으로 휘청거렸고.
"끄아아아아아아!"
헬페리온의 그 덩치에 걸맞는 비명이, 화산지대를 뒤덮었다.
그가 고통을 느꼈기 때문일까?
쿠구구구......콰과과과가가! 퍼어어엉!
몇몇 분화구에서 용암이 솟구쳤고.
"피, 피해라!"
"파편을 조심해!"
"물러서!"
"온다, 온다아아아아!"
쿵! 콰앙! 콰과광!
사방에서 거대한 비산물들이 추락하였다.
결국 결사대원들도 쇠사슬을 놓치고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버티고 있는 것은 마그마로스 뿐이었으니.
오르헬이 그것을 발견하고는, 눈치껏 그에게 날아가는 돌덩이들을 처리해주기 시작하였다.
촤악! 촤좍! 촤아악!
오르헬의 강력한 손톱에 사람 몸통만 한 바위들이 쪼개어졌고.
디아즈와 그렌델, 앤드류가 오르헬의 뒤를 이어 합류해 마그마로스를 지켰다.
덕분에 마그마로스는 화염 채찍을 놓치지 않은 채.
화르르륵!
그 불길의 위력을 더 키워나갔다.
채찍의 근처에만 있던 오르헬과 디아즈, 그렌델, 앤드류마저도 고통스러워 할 정도로.
"어우! 더워!"
"뜨, 뜨겁습니다."
"저도......!"
"앗, 뜨거! 앗, 뜨거! 갑옷이 시뻘게지고 있어요! 으악!"
하지만 마그마로스는 다른데 신경을 쏟을 여력이 전혀 없었다.
헬페리온은......세 번째 눈을 찔렸음에도.
'내 화염을......잠식하고 있어?'
마그마로스의 화염 채찍이, 저쪽 끝에서부터 검은색의 화염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 * *
검은 빛의 화염.
혹은 검은 빛의 번개 등등.
그것은 모두 거신족의 상징과도 같은 색이었다.
만물이 색을 갖기도 전 태초의 모습.
지금 마그마로스의 화염 채찍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는 그가 펼치는 화염 마법을, 헬페리온이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마그마로스도 이대로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과거의 망령과 달리, 지금 이 순간 불의 정령왕은 바로 이 몸이란 말이오!'
그의 화염 채찍이 절반 정도 검은색으로 변질되던 그때.
마그마로스는 그 화염의 권능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대충 할 생각을 한 내가 어리석었도다!'
확실히 헬페리온의 화염에 대한 권능 또한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도 고작 이 정도로 먹힐 존재는 아니었다.
아니, 그래 줄 수 없었다.
불의 정령왕이라는 이름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잠시 방심을 했던 마그마로스가 다시 각성을 하자.
화르륵!
붉은 화염이 검은 화염과 줄다리기를 시작하였다.
* * *
헬페리온의 세 번째 눈을 찌른 나는, 이제 모든 게 끝일 줄 알았다.
그런데......거신족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신이라는 그 명성에 걸맞게 죽지 않았다.
물론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만든 화염구를 간섭하던 헬페리온의 힘도 무력화되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아직 직접적으로 손이 닿은 화염 마법은 헬페리온의 간섭을 완전히 벗어나기엔 힘이 든 것 같았다.
당장 마그마로스의 화염 채찍도 헬페리온이 붙잡은 채 버티고 있었으니.
나는 날개를 접고 헬페리온의 어깨에 착지하였다.
'역시 날개는 체력 소모가 너무 크다......'
이 전투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체력 안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턱.
헬페리온의 어깨에 발을 디디자.
화르륵!
당장에 발에 불길이 일었다.
그것도 검은색의 불길이.
과하게 뜨거운 물체에 닿으면, 불이 피어오르듯.
단지 놈의 어깨에 내려앉은 것만으로도 마치 용암에 직접 발을 담근 것과 같은 효과가 난 것이었다.
그 순간.
바로 내 몸무게를 감지한 헬페리온의 손바닥 하나가.
마치 나를 파리 잡듯 내려찍어 죽이기 위해 급강하하며 날아들었다.
"크윽!"
너무나도 즉각적인 반응 속도에.
나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바닥을, 아니, 헬페리온의 어깨를 박찼다.
정확하게 놈의 손가락 사이 틈으로 튀어 올라.
서걱!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 버렸다.
"우어어어어어어!"
이것 역시 예상치 못한 것일까.
헬페리온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헬페리온의 다른 손이 날아오게 되었으니.
"......!"
다시 헬페리온의 어깨에 착지하자마자, 나는 채 회피할 틈도 없이 다른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검을 들어 방패처럼 이용해보기는 하였으나.
빠아아아아악!
집채만한 주먹이 나를 덮치고.
까드드득!
나는 이를 갈며 그 무게를 버텼다.
그야말로 몸이 분리수거장의 빈 깡통처럼 짜부라질 것만 같았다.
거대한 압축기가 온몸을 눌러대는 느낌.
"으그그그......!"
나도 모르게 비명도 기합도 아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때.
촤르르르륵!
새로운 화염 채찍 한 줄기가, 내 몸을 짓누르는 헬페리온의 팔에 감기는 게 보였다.
그 후.
화아악!
팽팽하게 당져진 화염 채찍.
나는 그 채찍의 끝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자, 오른팔에 이어 왼팔까지 써서 버티고 있는 마그마로스와.
그 마그마로스를 돕고자 눈에 핏대를 세우고 화염 채찍을 맨손으로 잡아당기는 오르헬이 보였다.
"브라더어어어어어! 빠, 빨리! 도망쳐!"
헬페리온의 힘이 약해진 것을 느낀 나는.
전력을 다해 힘을 주어, 놈의 일순간 팔을 밀었고.
투웅!
틈이 생기자, 냅다 발을 굴려 그곳을 탈출하였다.
하지만 나는 도망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쪽 어깨로 이동한 후 발을 고정한 채.
검을 가로로 눕혀 들고, 헬페리온의 목을 칠 준비를 하였다.
'지금이 기회다!'
물론 헬페리온의 목은.
그 덩치에 걸맞게 어마 무시하게 두꺼웠다.
제아무리 긴 검이라도 일격에는 베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내 손에 들린 것은 보통의 검이 아니었다.
'이 신검이라면······. 해 볼만 하지!'
원채 거신의 목이 두꺼운 탓에, 그럼에도 한 번으로는 베기 힘들겠지만.......
한 번으로 안 되면 어떠한가.
몇 번 더 휘두르면 되지!
촤자자자자자작!
"커억! 커어어어어!"
내 보이지 않는 칼날이, 공간 베기의 힘을 받아.
거신의 목을 점점 잘라가기 시작하였다.
* * *
일격에 목이 베이지 않은 탓에.
오히려 헬페리온은 더 고통스러워하며 목이 떨어졌다.
쿠우웅......!
그런데 우리들 앞에는 역겨운 문제 하나가 새로이 나타났으니.
오르헬 역시 그에 당혹스러워하였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목이 잘렸는데도 왜 힘이 안 빠져? 어?"
다른 이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계속해서 날뛰는 헬페리온의 몸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가 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목을 잘라도 움직이면......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심지어 머리가 잘린 몸통은, 머리를 향해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그마로스가 소리쳤다.
"몸통을 붙잡아! 머리를 손에 넣으면, 다시 붙일 수 있을 걸세!"
잘린 머리도 다시 붙일 수 있다니.
이제는 놈이 신인지 괴물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때.
어디서 들어 본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내 뒤에서 들려왔다.
"그 정도로는 거신족을 죽일 수는 없다네!"
나와 거의 비슷하게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그렌델이었다.
"스, 스승님?"
이어 나도 그를 불렀다.
"크뢰이튼?"
심연을 심판하는 마법사, 크뢰이튼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에, 나는 인사보다는 다른 질문이 먼저 튀어 나갔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여유가 없었기에.
"죽일 수 없다고?"
나의 물음에, 크뢰이튼이 대답을 하였다.
"지금의 신들이 괜히 거신족을 봉인해 둔 것이 아니라네. 저들의 육체는 죽지 않아.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뿐일세. 봉인을 하는 것!"
한편.
놀랍게도 저쪽에 잘린 헬페리온의 머리가, 그의 목소리를 알고 있는 듯 반응하였다.
"크뢰이튼! 네가 감히 누구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더냐!"
"......"
그러나 크뢰이튼은 대답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로한 경. 가우리엘의 날개를......포용의 날개를, 정말 손에 넣었구려."
한 눈에 내 상태까지 간파한 그는.
내 앞에서 화염 마법 하나를 보여주었다.
화르르륵!
그러나 처음 보는 마법은 아니었다.
그것의 모양새는, 마그마로스가 지금 헬페리온의 몸통을 붙들고 있는 화염 채찍과도 똑같이 생긴 것이었으니.
심지어 지금은 나도 쓸 수 있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약간 달랐다.
나는 곧 그 이질적인 느낌이 무엇 때문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거, 검은 불꽃?'
크뢰이튼이 만든 화염 채찍은, 놀랍게도 거신족의 상징인 검은 빛의 마법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 검은빛의 화염 채찍을 길게 뽑아 헬페리온의 몸통을 휘감기 시작하였다.
촤자자자자자작!
잘린 목 부분부터 감아나가던 크뢰이튼의 검은 화염 채찍은.
계속 늘어나며 마치 아나콘다가 먹잇감을 조여가듯, 헬페리온의 몸통을 집어삼켜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헬페리온의 몸통이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완벽히 봉인이 되자.
크뢰이튼이 나를 보며 소리쳤다.
"로한 경! 검은 천둥의 힘으로, 지금 내가 한 것처럼 헬페리온의 몸통을 한 번 더 감아, 이중 봉인을 완성해야만 하네!"
"이중......봉인......?"
"방법은 이것뿐일세!"
그의 말을 들은 나는.
검은 천둥의 채찍을 오른손 위에 창조해내기 위해 집중을 하였다.
사실 검은 천둥의 반지를 흡수해버린 후.
자연스럽게 검은 천둥은, 원래의 검은 빛이 아니라 찬란한 빛의 천둥으로 변해버렸었다.
황금의 창과 융합이 되며 그렇게 바뀌어버린 것이리라.
그렇기에 과연 내가 검은 천둥을 다시 되살릴 수 있을까 걱정을 하였는데.......
막상 집중을 한 채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그 기운을 끄집어내니.
의외로 검은 천둥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을 채찍의 모양으로 변형시키는 것 또한.
기본 원리는 화염 채찍을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치직! 치지지직! 우르릉......콰광!
크뢰이튼은 내가 조급증을 품지 않도록, 조언을 더했다.
"물론 내가 한 것 처람 한 번에 해내기는 쉽지 않겠으나, 여러 번 나누어서라도 완성을 시켜보게! 내가 최대한 버티고 있어주겠......"
하지만 간만에 만난 크뢰이튼이 간과한 게 하나 있었으니......
내가 이 정도 마법을 여러 번 나누어서 완성시킬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휘릭! 휘리리릭! 우르르릉! 콰과과강!
나는 단번에 검은 천둥의 채찍으로 헬페리온의 몸통에 두 번째 봉인을 시작하였다.
심지어는 크뢰이튼보다 더 두꺼운 채찍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헬페리온의 몸통을 완전히 집어 삼켜 버렸으니.
그 광경을 보던 크뢰이튼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 오랜만에 만나서 잠시 잊고 있었군. 자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허,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