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배워 둘 만해
"불의 정령왕, 이라고 소개하는 쪽이 더 편하겠나?"
그제서야 디아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의문 가득했던 화염을 다루는 사내의 실체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에.
"다, 당신이......정령왕?......"
나 역시도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
하지만 동시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봐버렸으니 말이다.
'화염을 다루는 능력. 아니 화염 그 자체라고 느껴질 정도의 자연스러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마그마로스.
그가 아니면 대체 누가 이런 위용을 보인단 말인가.
마그마로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앉아 있을 생각인가. 이 늙은이가 이만큼 했으면, 뒷정리 정도는 젊은 친구가 해야지?"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일단 내민 손은 붙잡았다.
그때였다.
화아아아아악!
맞잡은 손을 통해 노도와도 같이 흘러들어오는, 거대하고도 웅장한 화염의 기운.
그 강렬한 온기가, 내 온몸을 한 번 때리는 것처럼 통증을 끌고 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핏 사나운 것 같던 그 힘은, 곧이어 내 구석구석을 채우듯 몇 바퀴를 돌더니.
"......! 이, 이건?"
체력이 다시 돌아오는 게 느껴진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털끝 하나 움직일 힘도 남지 않았었는데.......
벌떡.
나는 자리를 박차고 너무나 쉽게 일어섰다.
그 모습에 디아즈마저도 놀랄 정도로.
"로, 로한 님?......"
어리둥절해하는 나와 디아즈를 향해.
마그마로스가 슬며시 웃었다.
"우리, 할 이야기가 많겠구만."
* * *
오르헬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턱을 괸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어디 봉인되었다더니.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그의 질문에 마그마로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세세한 소문까지 다 알고 있는 걸 보니, 나한테 관심이 많았나 보구만?"
"개뿔. 어디 숨어 있는지 찾아서 숨통을 끊어 놓으려고 했는데?"
"하하하하. 여전하군. 뱀파이어 로드."
둘의 대화를 들어보니, 그들은 이미 일면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친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래서. 진짜는 뭔데? 또 장난질 친 건가?"
"장난질이라니. 그대처럼 내 목을 노리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미끼를 조금 여기저기 뿌려 놓았을 뿐이네."
"장난질 쳤다는 소리를 뭐 그리 길게 해?"
오르헬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뭔데? 그렇게 장난질까지 쳐가면서 숨어 계시던 귀하신 분이, 왜 이렇게 행차를 다 하신 건데? 어?"
그러나 마그마로스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대한테는 볼 일이 없네만. 아, 솔직히 같이 있는 줄도 몰랐어."
모를 리가 있겠는가.
내가 어디 있는지까지 알고 찾아온 자가, 오르헬이 같이 있다는 걸 모를 리는 없을 터였다.
그 정도 정보는 당연히 알아 볼만한 것이었으니.
오르헬을 약 올리려고 그러는 게 뻔히 보였다.
"뭐, 인마?"
물론 오르헬은 홀라당 넘어갔고.
"왜? 또 덤벼 보시려고 그러는가?"
"오냐, 그래. 해보려고 그러신다!"
적당한 선에서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내가 결국 끼어들었다.
"오르헬."
"......"
"거기까지만 하지."
"어이, 브라더. 이거는 자존심 문제야."
"안다. 나도 저쪽 이야기를 딱 한 번만 들어보고, 아닌 것 같으면 축객을 하려는 중이거든."
나는 그대로 마그마로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이유로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이러고 말장난이나 할 생각이라면, 나가주면 좋겠는데? 아니면......나까지 끼어서 한바탕 해보실 건가?"
내가 오히려 세게 나가자.
오르헬도 한발 물러서서 양보를 해주었다.
그만 팔짱을 끼며, 입을 다물어 준 것이었다.
그러자 결국 마그마로스 쪽도 한 수 접어 주었다.
"어이쿠. 아무리 그래도 이 늙은 몸으로 2대1은 무리지. 말장난은, 여기까지만 하겠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군."
나의 그 대답에.
마그마로스가 내 뒤에 선 이들을 쳐다보았다.
오르헬을 비롯하여.
디아즈, 그렌델, 앤드류, 에이트럼과 그리고 레바르센까지.
그의 눈치는 뻔했다.
둘이서 얘기하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의도를 받아들여 줄 생각이 없었다.
"다 내 사람들이다. 오르헬도."
그 말을 들은 오르헬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깨를 쫙 폈다.
작은 헛기침과 함께.
"엣헴!"
정말 어쩜 저렇게 속내가 훤히 다 보이는지.
나는 분위기를 잡느라 피식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하지만 앤드류는 그러지 못한 모양이었다.
"푸훕!"
오르헬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뭐야? 왜 웃어?"
"아, 아니에요."
"쯧!"
그 모습을 보며 마그마로스가 중얼거렸다.
"오호. 예전과는 많이......바뀌었군."
그리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대의 영향인 건가? 신기하구만. 그래. 그대의 말을 믿고, 이 자리에서 말하도록 하겠네."
마그마로스가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 * *
"알고 있겠지만, 요즘 거신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네. 지금의 신들과 전쟁을 벌인 후 패배한 놈들은......아무래도 그 긴 세월 동안 복수를 꿈꾼 것 같더군."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지금의 신을 숭배하는 존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려는 듯하던데."
내가 지금까지 찾아낸 정보들로도 거기까지는 추론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 정보와, 마그마로스가 여기 있는 이유와는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부분은 아직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에 마그마로스는 다시 입을 떼었다.
"그렇다네. 해서 나는 가우리엘을 찾기 시작하였다네. 나와 계약이 된 존재, 대천사 가우리엘을. 물론......그의 날개가 뜯겨진 건 이미 알고 있었음이야. 그래서 더 이상했지."
마그마로스가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분명 뜯겨졌어야 할 날개가. 그 날개 속에 담긴 강력한 화염의 기운이 움직이고 있었거든. 날개에 발이 돋아난 것도 아닐진대. 그래서 그 힘을 좇았다네. 만일 거신족의 손에 들어갔다면 뺏어야 했고......그게 아니라면, 궁금했거든. 감히 누가 대천사의 육체조차 버거워하는 이 힘을 다루고 있는지."
그 눈에서 흥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솔직히, 조금 놀랐다네."
내가 되물었다.
"인간이라서?"
"아니. 인간이기 때문은 아니었네. 자네가 인간이 아니라 그 무엇이었든, 나는 놀랐을 걸세."
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마그마로스가 미소를 지었다.
"불을 삼키는 그림자. 그 괴물이 왜 태어났는지 알고 있는가?"
"......?"
"가우리엘 때문일세."
"가우리엘......때문이라고?"
"그렇다네. 그 괴물은, 전쟁 병기였네 그것도 대가우리엘전을 염두한, 전용 전쟁 병기였단 말일세. 가우리엘의 그 포용의 날개를 무력화시키고 화염을 다루는 힘을 묶어두기 위한 족쇄 같은 놈이었지. 아, 물론 가우리엘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불을 삼키는 그림자만으로는 불가능했었다네. 그래도 말이지, 가우리엘이 그 괴물의 존재를 껄끄러워했던 건 사실일세. 가우리엘을 노리는 공격에, 불을 삼키는 그림자가 끼게 되면 천하의 가우리엘도 굉장히 버거워했거든."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왜 아직까지도 저 괴물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약간 있었다.
내 기억 속, 원작 속 가우리엘은 그야말로 천상의 경지에 있던 존재였다.
심지어 그것조차 날개가 뜯겨진 이후가 아니던가.
그리고 불을 삼키는 그림자가, 제아무리 대가우리엘전 병기였다고는 해도.
가우리엘이 혼자 싸웠겠나?
분명 휘하 천사들도 있을 터였다.
그러니 휘하 천사들에게 다른 적들을 맡긴 후에 작정을 하고, 조금 전의 나처럼 놈을 몰아붙였다면......분명 죽여도 벌써 죽였지 싶었던 것이다.
"화염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대천사의 직위가 있을 때였다는 소리이고. 그러면 지금보다도 더 강했다는 것일 텐데......가우리엘은 왜 저 괴물을 여태 살려 둔 거지? 이유가 있었던 건가?"
나는 의문을 담아 진심으로 질문을 던졌다.
한데......
이상하게도, 마그마로스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왜 살려두었느냐고? 허허. 왜 살려두었느냐니......"
이어진 그의 말에는.
나도 조금 놀랐다.
그는 천천히, 다음 말을 내뱉었다.
"못 죽인 걸세. 안 죽인 게 아니라."
* * *
그 이후.
마그마로스가 내게 던진 제안은, 꽤나 흥미로웠다.
"화염, 그렇게 단순하게 쓰는 게 아닐세."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쓰는 걸 보지 않았나? 조금 더 창의적으로 쓸 수도 있다는 소리이지. 물론 자네처럼 압도적인 용량을 가진 자라면......기존의 방법도 못 쓸건 아니네만. 더 훌륭한 방법이 있는데 굳이 그 길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역시......그랬던 건가?
어쩐지, 너무 힘들더라니.
그리고 마그마로스의 제안이 나왔는데.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네만. 그대가 원한다면?"
"가르쳐준다, 라......"
나는 잠깐 고민을 하였다.
당연히 배울 수 있다면 배우고 싶기는 했다.
실제로 그림자 괴물 잔당들을 처리할 때 보여준 그의 화염 마법은, 마치 불꽃이 살아 있는 것처럼 아주 유려했으니 말이다.
다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어?'
그다음에 나타날 그의 의도를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혹시나 무슨 대가를 바랄지도 모르니까.
내 표정을 읽었는지.
마그마로스는, 다시금 대화를 시작하였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네. 다만......좀 재미있을 거 같기도 하고. 또, 친해져서 나쁠 것도 없을 것 같고?"
그 대답에 오르헬이 끼어들었다.
"친해지기는 개뿔! 그냥 기술까지만 딱 가르쳐 줘. 우리 브라더야, 이 자식아!"
오르헬은 이어서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저 자식......나랑 사이가 안 좋기는 해도, 그렇게 쓰레기는 아니다. 그리고 불 쓰는 능력 하니만큼은 배워 둘 만해. 그냥 배워. 걱정 말고.
마그마로스는 아직 믿을 수 없었지만.
오르헬은 믿을 수 있었기에.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더 훌륭한 방법이 어떤 건지......궁금하군."
* * *
마그마로스는 간만에 흥이 난다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불의 정령왕.
그쯤 되는 위치에 있다 보면, 화염을 보는 눈이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실제로 인간들 중에서도 종종 화염 계열의 마법을 쓰는 자들이 있었다.
권능의 돌로 능력을 얻은 자도 있었고.
아니면 순수히 재능만으로 불을 피우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저런 인재들은 많이 만나 본 마그마로스였다.
그러나......
'내 눈에 차는 자들은 없었는데.'
처음이었다.
자신 이외에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을 만난 것은.
심지어는 대천사 시절의 가우리엘조차도 저런 재능을 가지지는 않았었다.
게다가 가장 놀라운 것은.
'저 묵직한 마나통.'
화염구를 집채만 하게 키울 수 있는 컨트롤 능력과.
그 컨트롤 능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기초 체력과도 같은 마나량.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게 바로 로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궁금해졌었다.
만약 저런 인재를 가르친다면......대체 어디까지 화염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을까?
대체 어떤 화염을 창조해낼 수 있을까?
불꽃을 다루는 자로서.
순수한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 마그마로스는.
로한의 앞에서 직접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어디 보자. 그래도 처음이니까 약간은 기선 제압을 해야 선생으로서의 면이 서겠지?'
그는 약간 장난스러운 기분으로.
일전에 그림자 괴물들에게 썼던 그 연쇄 폭발 화염을 선보였다.
펑! 퍼퍼퍼퍼펑! 퍼퍼퍼펑!
"자, 이렇게 하면 되는 걸세. 참 쉽지?"
물론 이게 쉬울 리가 없......
"음. 전에 보여줬던 것이군. 이렇게......하면 되는 건가?"
펑! 퍼퍼퍼퍼펑! 퍼퍼퍼퍼펑!
마그마로스의 눈이, 점점점점 커지고 있었다.
설마, 아니, 설마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못 하겠거니, 라는 마음으로 보여준 건데......
'이, 이걸 한 번에 한다고?......'
로한은 너무나 편안하게 그 기술을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다음은 뭘 해야 하는지 물어왔다.
"다, 다음에는......어디 보자......"
마그마로스의 뺨으로.
작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재능이......선 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