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내 힘을 가졌기로서니
로한이 화염구를 키우면, 불을 삼키는 그림자는 그것을 흡입해 줄여나갔다.
둘 다 물러설 수 없는 정면 힘 싸움.
먼저 밀리는 쪽이 지는 것이었다.
불을 삼키는 그림자가 멈춘다면 그대로 화염구에 쓸릴 것이요.
로한이 먼저 멈춘다면, 거대해진 불을 삼키는 그림자를 막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불을 삼키는 그림자는 점점 더 커져갔고.
로한의 체력은 무한대가 아닐 테니까.
그런데......균열은 에상치 못한 찰나의 순간에 찾아왔다.
슈우우우우우욱!
계속해서 로한이 화염구를 집어삼키던 불을 삼키는 그림자는.
갑작스럽게, 괴로운듯한 소리를 내더니.
"어, 어어억?"
곧이어.
퍼어어어어엉!
부풀어 오르던 배가 폭발해버린 것이었다!
그 배 안에 잔뜩 쌓였던 화염도 사방으로 튀며.
여기저기에 불똥을 날려 화재를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결사대원들이 입을 쩍 벌렸다.
"저, 저게......!"
"터지......다니......"
"불을 얼마나 먹이면 저 괴물이 배가 터져?......"
"아니, 애초에 저게 가능한 거였나?"
"몰......라......묻지 마."
넋이 반쯤 나간 채 두 괴물의 싸움을 지켜보던 결사대원들을 향해, 에이트럼이 소리쳤다.
"아직 잔당들이 남아 있다! 집중 놓지 마!"
"예, 예!"
그래도 에이트럼 역시 한 시름 놓은 것은 다르지 않았다.
이제 이 눈앞에 남아 있는 몇몇 놈들만 처리하면, 이곳의 일은 일단락될 테니까.
더불어 이제 불을 피워도 그림자 괴물들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빛을 없애고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놈들의 우두머리가......사라졌으니 말이다.
'진짜 불을 삼키는 그림자를 이기다니......놀랍군.'
약간의 방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려고 하던 그때.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그들의 앞에 들이닥쳤으니.
상상도 못한 대규모의 그림자 괴물들이, 왕궁 안쪽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휙! 휙! 휘휙!
"이, 이거......! 잔당 수준이 아닌데?"
"이게 본대인 건가?"
"너, 너무 많잖아......!"
놈들의 우두머리는 쓰러뜨렸으나.
까딱했다간 자신들의 무덤 역시 이곳이 될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에이트럼이 다급하게 소리를 쳤다.
"정신 똑바로들 차려라!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 * *
"후우......!"
나는 긴 호흡을 내뱉었다.
솔직히 조금 아슬아슬했다.
내 생각보다 불을 삼키는 그림자의 뱃속 용량은 거대하였다.
불의 정령왕이 아니라면 이길 수 없다는 리베카의 말.
반대로 말하자면 불의 정령왕은 이길 수 있다는 그 말에, 나는 확신을 가지고 힘을 때려 부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보다도 불을 삼키는 그림자는 꽤 오래 버텼다.
그 와중에 커지기까지 하니, 솔직히 나로서도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나 멈출 수가 없었다.
저렇게 키워 놓고 여기서 포기한다면......안하느니만 못했으니까.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냥 끝까지 밀어붙였는데......
'어찌어찌 되긴......됐네.'
한숨을 돌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디아즈, 그렌델, 앤드류, 오르헬을 비롯한 결사대가 아직 남은 그림자 괴수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잔당이 조금 남은 것뿐이라 생각했었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저 정도야 이제 알아서들 해주겠지 싶은 수준의 잔당이었다.
한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왕궁의 저 안쪽에서부터 시커멓게 그림자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뭐, 뭐야? 저 물량은?'
제3의 눈은,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많은 숫자의 그림자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경고해 주고 있었다.
'설마 저게 본대이고, 지금까지 상대했던 건......선봉대에 불과했던 것인가?'
물론 우두머리인 불을 삼키는 그림자가 사라진 탓에, 이제는 놈들이 더 늘어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놈들의 머릿수는 과하게 많았다.
당장 지원을 하러......
'엇?......'
발을 떼려던 그때.
나는 순간 머리가 핑 돌리는 것을 느끼며.
털썩.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쭉 풀려버려,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버렸다.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다.
특히나 연금술로 만든 불사조의 포션을 먹고 난 이후에는 체력이 달린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이 정도로 진이 빠질 줄이야.
그때였다.
"스스스스......"
어느샌가 내 주변으로도 그림자 괴물들의 추가 병력들이 속속 접근하기 시작했다.
제3의 눈이, 내 등 뒤의 방향에서 위험이 있다는 걸 알려온 것이었다.
나는 빙글 몸을 돌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핑......
'젠장!'
아직 회복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 몇 놈의 그림자 괴물들이 그림자를 넘나들며, 은밀하게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당장 다시 불을 피워내기는 힘들 것 같다......!'
나는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한편.
디아즈 역시도 내가 뭔가 평소와는 다르게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는지.
다급하게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와 주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로한 님! 괜찮으십니까? 혹시 어디 다치신 겁니까?"
그녀를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건 아니다. 다만, 조금 과하게 힘을 쓴 것 같군.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다, 다른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시지요?"
"괜찮다. 단지 시간을 조금 벌어야 할 것 같다. 기력을 회복할 시간을. 지금은 불을 피워내기도......어려울 것 같군."
내 몸에 혹여나 상처가 있는지 살피던 디아즈는.
정말로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나는 눈동자를 돌려, 적의 방향을 공유하였다.
"저쪽에서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적이 접근 중이다. 그림자 괴물 놈들의 특성은 봐서 알겠지만......작은 그림자에도 많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방법은 단 하나.
"놈들이 그림자 밖으로 튀어나오며 날아드는 그 순간. 그 순간을 정확히 노려 단 일격에 처리하는 것뿐이겠군."
우리에게 주어진 횃불은, 디아즈의 손에 들려 있는 단 하나.
나야 원래는 직접 불을 피울 수 있었기에 횃불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그게 조금 후회되긴 하였다.
조금이라도 불빛이 더 없는 게 아쉬운 느낌이었기에.
그러나 그 후회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온다!"
나와 디아즈는 조용히 손에 쥔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파앗! 파바밧!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그림자 괴물 놈들이 암살자처럼 날아들었는데.......
화르르르륵!
갑자기 놈들이, 강렬한 불길에 홀라당 타버리는 게 아닌가?
분명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키에에에엑!"
그림자 괴물 놈들은, 죽어나가고 있었다.
* * *
나와 디아즈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제3의 눈을 온통 그림자 괴물에게 집중하고 있느라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온 것을 놓친 모양이었다.
그 자의 인기척 자체도 워낙 조용하기도 했고.
물론 제아무리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 수준의 은신술이라니.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의문의 존재를 노려보았다.
그자는, 후드를 덮어쓴 채로 손에 붙은 불을 휘둘러 끄면서.
휘익......
천천히 우리에게 걸어서 다가왔다.
"걱정하지 말고 앉아서 조금 휴식을 취하고 있으시게. 아직 어지러울 게야."
처음에는 화염을 쓰기에, 혹시나 크뢰이튼이 대양을 건너 여기에 나타난 것인가 했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크뢰이튼도 아니라는 것을.
그의 마법과도 비슷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뭔가 미묘하게 달랐던 까닭이었다.
디아즈는 나의 앞을 몸으로 가로막으며.
중년의 그 사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그러나 그는, 디아즈의 질문을 그냥 무시해버렸다.
의문의 인물은, 디아즈의 어깨너머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대가 로한인가?"
디아즈는 다시 몸을 움직여 나를 가렸고.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결국 의문의 인물은 디아즈를 쳐다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누구냐고? 어려운 대답은 아니지. 다만, 방해꾼들부터 먼저 처리 좀 하겠네. 자꾸 말을 끊어 먹어서,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시간이 좀 들 것 같으니."
"......"
그는 그 말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 사이 이미 그림자 괴물들은 2차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나보다는 저 의문의 사내가 더 큰 위협이라 생각했는지.
저쪽으로 먼저 날아드는 그림자 괴물들.
사내는 제대로 그림자 괴물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팔을 휘둘렀고.
화르르륵! 화륵!
그림자 괴물 놈들의 몸이, 동시에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금 전 봤던 것과 동일한 수법이다.'
나 역시 화염을 다루는 입장이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목표물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다중의 타겟에게 동시에 화염을 일으킨다?
대체 어떻게 했는지도 알지 못할 정도의 고위 테크닉이었다.
당연히 불이 붙은 그림자 괴물들은 재도 남기지 못하고 빠르게 소멸해버렸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건 바로 그다음이었다.
그의 팔이 한 번 더 지휘자처럼 허공을 가르자.
펑! 퍼퍼펑! 화르르르륵!
그림자 괴물들을 타고 불길이 연쇄적으로 폭발과 함께 이어지는 게 아닌가!
그 폭발은 우리 근방의 그림자 괴물을 몰살시키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그리고는 노이어 결사대의 전장까지 닿아.
퍼퍼펑! 화륵! 퍼퍼퍼퍼펑! 화르르르륵!
저 멀리에 있는 그림자 괴물까지 전부 집어삼키고 있었다.
저렇게 단순한 움직임으로,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이끌어 내다니......
덕분에 순식간에 그림자 괴물의 본대마저도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경이롭게 쳐다보았다.
가히 화염 마법에 한해서는, 그야말로 극도의 경지에 오른 실력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그 연쇄 폭발로 인해 불길이 어느 정도 사방에 피어오르자.
사방이 밝아지며, 내가 불을 삼키는 그림자를 터트려버리며 만든 크레이터도 눈에 들어왔는데.
의문의 사내는 그 자리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하하. 이렇게 무작스러운 방법으로 불을 삼키는 그림자를 해치우는 자가 나타날 줄이야. 이런 건 나조차도 생각도 해 본 적 없었군......아무리 내 힘을 가졌기로서니 말이지."
"......!"
나는 그의 한 마디에.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반갑네. 마그마로스, 라고 하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불의 정령왕이......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