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사기캐로 살아가는 법-121화 (121/194)

121화. 숨을 곳도 없이

속칭 흑백성.

오로지 검은색과 흰색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그런 별명이 붙은 저 고대의 성에 진입하기 직전.

우리는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한 마을에 잠시 들르게 되었다.

마지막 체력 안배 겸 보급을 위해서.

노이어 결사대의 인원까지 다 더해지니, 결코 작은 머릿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진입한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에이트럼은 에이트럼대로.

레바르센은 레바르센대로.

물론 나와 디아즈, 오르헬, 그렌델, 앤드류도 따로 돌아다니며 잠깐의 여가를 즐겼지만.

마을이 작기도 하거니와 어쩌다 보니 다들 한 주점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같이 한잔하시죠!"

그렇게 앤드류의 한 마디에.

우리는 전투 전 마지막 여유를 즐겼다.

그렇게 우리는 간만의 맥주 맛을 느끼기며.

직접 사냥해서 잡은 안주가 아닌, 남이 만들어 준 안주로 조금은 편안하게.

그때.

문득 음식을 날라주러 나온 주인장에게 앤드류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아저씨. 저기로 가려면, 어떻게 가는 게 제일 좋아요?"

그에 주인장이 음식을 테이블에 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어디? 어디 가시려고?"

"저기요, 저어어어기. 저 왕궁."

그 순간.

여태까지 친절하던 주인장의 말투가 갑자기 싹 바뀌었다.

"저길 가려고? 당신들 미쳤수?"

첫 질문부터 다짜고짜 욕부터 박고 보는 상대방에, 앤드류가 당황했다.

"아, 아니. 왜요?"

"저기가 어딘지 몰라서 가는 길을 묻는 거요? 아니면 알고도 가고 싶어서 가는 길을 묻는 거요?"

"일단은 알고 묻는 건데요?"

"꺼지쇼."

"예?"

앤드류의 되물음에.

주인장은 차려진 안주들을 도로 들고 들어가려 하였다.

깜짝 놀란 앤드류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 어? 왜 그래요?"

"아, 꺼지라고."

"그냥 길만 좀 물은 거잖아요."

"저기 가는 길 내가 알려주면? 가서 뒤지면, 내 꿈자리만 뒤숭숭할 거 아니오? 뒤질 줄 뻔히 아는데 내가 그걸 알려주겠소?"

"에이. 우리 안 죽어요. 다 나름 한 가닥 하는......."

"당장 나가시오들! 에이, 짜증만 나게. 그렇지 않아도 찝찝해 죽겠는데."

그렇게 우리는 예상치 못한 축객령을 받았다.

생각보다도 뭔가 예민한 반응에.

앤드류 뿐만 아니라 모두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 *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나는 조금 전 주점 주인장의 말을 곱씹었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나의 그 말에, 디아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씀이십니까?"

"아까 그 주점 주인의 말투가 뭔가 걸려."

"예?"

"꼭 얼마 전에도 누군가가 저 왕궁으로 향했던 것처럼 말을 하는 것 같더군."

그에 오르헬이 동의를 하였다.

"브라더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그렇게 느꼈는데."

그러고 나니 마을의 분위기가 더 눈에 들어왔다.

전반적으로 마을 전체가 굉장히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마치......

"전부 이사를 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디아즈가 마침 딱 내가 생각하던 걸 입 밖으로 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렇다. 다들 짐을 잔뜩 싸 놓은 것 같군. 당장에라도 떠날 듯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있던 그 주점도, 거의 폐점 직전의 느낌이 농후했지."

그렌델 역시 인상을 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두 집도 아니고 말입니다. 이렇게 동시에 이사를 한다는 건......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반증인듯싶습니다."

아무래도 이곳 역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중인듯싶었다.

괜시리 부는 스산한 바람이, 소름을 돋게 만들고 있었다.

* * *

조금 더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된 것은.

에이트럼 덕분이었다.

"얼마 전, 왕실 직속 부대가 저 흑백성으로 돌입한 모양이오."

나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왕실 직속 부대?"

"그렇소.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티아르 왕국 측 정예 기사단이라고 했다던데......진입한 지가 벌써 일주일은 되었다고 하더군."

"그 말은......실패란 건가?"

에이트럼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겠소? 이미 몰살......당하지 않았나 싶소."

그 암울한 예측에.

모두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

"......"

"......"

나는 그 일에 대해 조금 더 캐물었다.

"다른 이야기는 더 없었나?"

"실은, 최근 몇십 년 정도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오."

"그림자가......그럼 예전에는 보였고?"

"실종되어 죽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더군. 그림자가 사람을 끌고 가는 모습을 봤었다던 증언도 있던 모양이었소."

"직접 봤다고?"

"수백 년 전 이곳에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이 했던 소리라고 하더이다. 지금은 다 죽어서 없다고 했소. 그러니 그저 옛날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지."

"그 옛날 사람들은 용케도 여기서 터를 잡고 살았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갈 곳이 없는 이들이라더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기 살았던 거고.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그때랑은 달라졌으니, 이제 떠나려고 한다 하였소."

턱을 쓰다듬으며, 나는 대답을 했다.

"떠나기 전 마지막 보루가 왕실 직속 부대였겠군."

"정확하오. 어차피 그런 그림자 괴물이 존재하는 건 왕실로서도 신경이 쓰였을 테니, 처리하려고 한 모양이오. 그런데......마을 사람들 말로는 오히려 그게 더 큰 화가 되었다 하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왕실 직속 부대의 사람들이 결국 돌아오지 않은 후. 더 많은 그림자들이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오."

"잠깐만......설마......"

나는 문득 에이트럼의 말을 듣다가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한데 그 불안한 예감은......틀리지 않았다.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구려."

"놈들이......살아 있는 인간으로 개체 수를 늘린다는 소리인가?"

좀비처럼?

그 물음에 에이트럼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걱정하는 부분도 바로 그것이오. 불을 삼키는 그림자 단 하나만 처리하면 될 줄 알았는데......그게 아닌 모양이오."

그리고는 자신의 의견을 하나 더하는 에이트럼이었다.

"추측건대, 아마 강인한 영혼을 먹으면......그것들을 휘하 그림자로 부릴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소."

그의 생각을 들은 내 뇌리에, 앤드류가 책을 보며 읊었던 문구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감히 왕에게 거역하는 무리들조차 자비로 받아들여, 그림자의 왕국을 쌓아 올림에."

에이트럼 역시 이 문장을 기억하는 듯하였다.

"아마도 불을 삼키는 그림자는, 다른 이들을 새로운 그림자로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 같소."

"그림자의 왕......이게 그런 의미였군. 그냥 허무맹랑한 헛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하나 그럼에도 나는 의문이 들었다.

"이상하군. 그림자를 더 만들 수 있다니. 그럼 왜 지금까지는 모르고 있었지? 모를 수가 있는 건가?"

내 말에, 오르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네. 그런 힘이 있다면 군단을 만들었어도 진작에 만들었겠지. 왜 그런 군단이 없는 거지?"

"듣고 보니......희한하기는 하오."

오르헬과 에이트럼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들의 의문 가득한 얼굴과는 달리.

나는 뭔가 느낌이 온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눈치가 빠른 그들은 벌써 감을 잡은듯했다.

"설마......!"

"오?"

앤드류만이 눈을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뭔데요? 나도 알려 줘요! 뭔데요, 대체?"

그에 내가 대답을 하였다.

"다른 그림자 괴물을 만들 수 있음에도 군단이 되지 못했다는 건......그 그림자 괴물을 죽일 방법이 있다는 뜻이지."

"죽일 수 있다? 그렇겠네요. 죽여서 숫자가 줄어야지만, 군단이 되지 못할 테니까."

나는 턱짓으로 앤드류의 수첩을 가리켰다.

그가 가지고 있는 수첩에, 우리가 수집한 모든 정보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허무맹랑해 보이더라도, 단서가 될만한 것이 없었나?"

"단서......단서......"

저리 봬도 앤드류는 의외로 기억력은 좋은 편이었다.

검술을 잘 쓰는 것도, 전투를 잘하는 것도 머리가 좋아야 했으니.

재능충인 앤드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머릿속을 스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아! 이런 구절이 있었어요!"

그는 집게손가락을 세우고, 말을 이었다.

"빛이 있음에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나. 그림자조차 숨을 곳을 찾지 못할 정도로 셀 수 없이 많은 빛은, 결코 어둠이 존재할 수 없다."

앤드류는 기억을 더듬으며 계속해서 구절을 내뱉었다.

"겁을 집어먹은 채 홀로 남은 나약한 빛은, 어둠을 키울 뿐임에. 두려워 말라, 그리고 홀로 두지 말라. 더 밝은 빛이 그대를 지킬 것이다. 그리고 어둠을 참할 지어다."

앤드류는 말을 끝내고도 이게 맞는지 아닌지 헷갈려 하였다.

"그림자가 나오는 구절은 이게 가장 가깝긴 한데 말이죠. 애매하네요."

하나 나는 그것으로 눈치를 챘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한 현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라하이나의 정오. 지구에서 그런 현상이 있었지.'

적도의 회귀선 사이에 위치한 지역은 태양과 지상이 정확히 90도가 되는 순간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 되면 아예 그림자가 사라지는 일이 있었는데.

'실제로 본 건 아니지만, 사진으로는 본 적이 있어.'

앤드류의 말을 듣고 그게 떠오른 이유는 하나였다.

'그림자가 아예 숨을 곳도 없이 환하게 빛을 비추어 버린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림자 괴물도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어쩌면 베어낼 수 있을지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찾은 것 같다."

"예? 정말요?"

"그래."

나의 확신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에이트럼은 답답한지, 한 발 앞으로 다가오며 물어왔다.

"무엇이오? 무엇이 그림자 괴물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인 것이오?"

"빛."

"......빛?"

"그림자도 생길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서 동시에 비추는 빛."

"......!"

나의 대답에, 에이트럼의 눈이 번뜩였다.

* * *

"횃불에 불을 올려라!"

노이어 결사대의 수장 에이트럼의 그 외침과 함께.

우리는 흑백성 안으로 진입을 시작하였다.

일부러 시간대를 해가 중천에 뜬 정오에 가깝게 잡았건만......

"더럽게 어둡네."

오르헬의 말대로, 왕성 내부는 생각보다도 더 그림자가 많이 지는 구역이었다.

"딱 그림자 괴물 놈들이 지내기 좋겠어."

그리고 침묵으로 진행된 전진.

횃불을 들어 올린 우리는, 최대한 그림자를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한데 뭉쳐 있었다.

그림자가 있는 지역에서는 언제든 적이 갑자기 튀어나올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의외로.

"생각보다......잠잠한데요?"

앤드류의 말마따나, 이곳은 조용했다.

지나치리만치.

그에 사실 모두의 신경이 상상 이상으로 날카로워진 상태라 할 수 있었다.

모두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습격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채였으니까.

그렇게 점점 더 깊이 들어가던 그 순간.

"신원 미상 인원 발견했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고.

바로 나와 에이트럼이 함께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우리 시선의 끝에는.

"끄으으으으......!"

바닥에 널브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가장 먼저 그자를 발견한 결사대원이 조심스레 의견을 내밀었다.

"아무래도......일주일 전에 들어왔다던 왕실 직속 부대의 기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모습이 딱 그러했다.

저만치 잘 정비된 갑옷은, 아무나 쉽게 구해 입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가장 최근에 이 왕성으로 돌입한 것도 왕실 직속 부대였고.

충분히 납득 가능한 추론이었다.

그에 에이트럼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내렸다.

"소리를 내는 걸 보니 아직 생존한 것 같군. 안전지대로 끌고 와서 상태를 확인해보자고. 구조를 시작한다. 목표 주변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한데 나는 뭔가 싸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는 팔을 들어 에이트럼을 붙잡았다.

"잠깐만."

"왜, 왜 그러나?"

"......"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둔 채.

눈동자를 천천히 굴리고는......미간을 찌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