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유치한 이름이네
"방금 지나간 저 사람이었다고?"
모건이 갑자기 핏대를 세우자.
체프먼은 옆에 서 있던 다른 가드에게 물었다.
그리고 나서야 상황이 파악되었다.
"저 별거 없어 보이는 허여멀건 한 도련님한테 힘 싸움으로 밀렸단 말인가, 모건? 푸하하하하! 저 도련님 힘이 엄청 좋은가 본데? 아니면 네가 예전 같지 않거나."
로한의 얼굴을 확인한 체프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비아냥 거리는 말투에, 모건은 더더욱 분이 터졌다.
"내가 예전이랑 다른지, 아니면 같은지 직접 확인시켜 줘?"
"어이쿠, 됐네. 이 사람아. 그리고 나는 원래 힘이 전문이 아니라 머리랑 기술로 싸우는 타입이라서."
체프먼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렸다.
그 말 안에는, '넌 멍청해서 머리랑 기술로 싸우는 건 못하지 않느냐.' 라는 기조가 깔려 있었다.
당연히 못 알아 들을 모건이 아니었기에 분위기는 한껏 험악해졌다.
"그 혀 적당히 놀려, 체프먼."
"어이쿠 무서워라."
그때.
방금 들어갔던 미녀가 다시 모건과 체프먼의 앞을 스쳐 지나가며 무도회장을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엇? 저 여인은 분명 그 로한이라는 작자한테 접근했었는데......?'
심지어는 혼자 나가는 게 아니라, 다른 여인과 함께 무도회장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사실 그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좀 어이가 없었다.
로한이라는 사내의 옆에는 이미 여인 하나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저 엘프 같은 미녀가 또 로한에게 다가갔다.
온갖 미녀란 미녀는 혼자 독차지를 하는 수준이 아닌가.
그에 배가 아프던 차였는데......
'뭐야? 왜 여인들이 돌려보내는......'
자연스럽게 모건과 체프먼이 고개를 돌려 내부를 살폈다.
그런데......그들의 눈앞에는 조금 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로한이라는 자는......미인 둘을 끼고 있던 걸로도 모자라, 그 둘을 내보내고 나서.
"리베카?"
"저건 좀 선 넘는데......"
이 필로렌 항구의 최고 미녀인 리베카에게까지 집적대고 있는 게 아닌가!
제아무리 잘생겼다고는 하지만, 여자 셋을 가지고 논다고?
그것도 동시에?
평소에는 그렇게나 서로 으르렁대던 모건과 체프먼은, 이날 처음으로 같은 생각을 하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체프먼이었다.
"조금 전에 알아봤는데......귀족은 아니라고 하더군. 기사 출신인데......안테아 대륙 기사라더라고."
"안테아 출신 기사라고 해봤자, 여기서는 아무 작위도 없는 거 아닌가?"
"맞는 말이지.
그에 모건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귀족이든 아니든 상관 없을걸? 어차피 얼굴은 가리고 움직일 거 아닌가."
"후후. 그건 그렇지."
* * *
"검은 왕국에 영광을."
나의 그 한 마디에.
리베카의 몸이 문득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와중에도 표정을 잘 관리하고 있었다.
하긴.
숨어든 아군을 만날 때마다 티를 크게 낸다면, 아마 진작에 멸종되었겠지.
그럴 만도 했다.
애초에 다크 엘프는 생각 자체가 뒤틀린 자들이었다.
악마와 계약을 한다는 것부터가 벌써 틀려먹긴 했지만, 그 면모를 깊게 잘 살펴보면 하나같이 역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행동들 역시 꺼림칙하기 그지없는 것들뿐이었는데.
납치, 살인, 저주는 기본이요, 인신 공양이나 악마 소환에도 여념이 없는 소위 빌런 집단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다크 엘프는 스스로 개체를 늘릴 수 없는 종족이었는데.
오로지 엘프가 악마에 의해 타락했을 때만 탄생하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그 두 가지 특성이 섞이니.
어찌 만인의 적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 개체 수마저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이렇듯 리베카처럼 개별적으로 움직이거나 점조직의 형태로 일반적인 사회 속에 숨어서 좀 먹는......벌레와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특히 악마에 대한 증오심이 맥스까지 올라가 있는 나로서는.
'당장에라도 목을 치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만약 불을 삼키는 그림자를 추종하는 추종자가 리베카가 전부가 아니라.
더 많은 인원이 남아 있다고 친다면?
리베카를 죽일 경우, 놈들은 자취를 감추고 뿔뿔이 흩어지며 자취를 감출 게 뻔했다.
최종적으로는 그들을 뿌리까지 뽑아내는 게 매우 어려워지겠지.
내가 충동을 억지로 누르고 있던 그때.
그제서야 상황이 파악된 리베카가, 나의 인사에 맞인사를 해왔다.
"검은 왕국에 영광을."
그러면서 싸악 웃는 게 아닌가.
'쪼개기는......'
나는 그런 속내를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약간은 가면스러운 미소를.
"괜찮다면,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나의 그 제안에.
"이럴 수가. 마침 저 역시도 같은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말이죠. 크라켄과도 싸워 이기신, 로한 경의 멋진 모험 이야기......저도 궁금하던 차였거든요."
리베카는 환한 미소와 함께 대답을 하였다.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기는 했으나.
"저 사람이 크라켄을 잡은 안테아 대륙의 기사라고?"
"생각보다 훨씬 여리여리해 보이는데......"
"모르지 실력은 또 대단할지도."
"하긴, 그 크라켄이 아니던가. 나도 실제로 봤는데, 덩치가 장난이 아니던데."
나는 그들의 평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일 밤. 저희 주점으로 오시지요. 아이들에게 일러, 비싼 술을 준비해두겠습니다."
"기대하지."
어떻게 저 입에서, 많은 정보를 캐낼지가 유일한 관심사일 뿐이었다.
* * *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숙소에는 모든 인원이 다 모여 있었다.
아마 다크 엘프의 예상치 못한 등장이 그 이유인듯하였다.
특히 노이아 결사대의 구성원들은 모두 엘프들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더더욱 다크 엘프에 대한 적개심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결사대 단장 에이트럼 역시도 그러하였고.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해졌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로 레바르센이었다.
"어, 어떻게 됐어? 리베카는......"
아. 그러고 보니, 리베카를 알아본 건 레바르센이었지?
그것도 보통 사이도 아닌 것 같았고.
그러니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하겠지.
"내일 밤. 따로 접선을 하기로 하였다."
"그 녀석......다크 엘프가 된 이후로 얼굴을 본 건 처음이네......하하."
레바르센은 굉장히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어떻게 할 셈이야?"
애석하게도 나는 사실대로 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그림자에 대해서 캐내 봐야지. 불을 삼키는 그림자. 그리고......그녀 외에도 추가적인 인원이 있는 거라면......"
나는 레바르센을 똑바로 보며 대답하였다.
"이번 기회에 모조리 다 죽인다. 후환을 남겨두고 싶진 않으니까. 예외는 없을 것이다."
그에 레바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맞는 거겠지. 그래. 진작에 그렇게 돼야 했었을 일이니까. 수십 년 만에 만났는데, 서로 칼을 겨누게 되겠네......"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들, 이대로 멈출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그걸 깬 것은.
"아니, 그런데 말이야. 브라더."
오르헬이었다.
"대체 어떻게 다크 엘프를 속인 거야?"
"그들끼리 서로를 알아보는 암호가 있다. 그걸 내뱉으니, 바로 속아 넘어가더군."
"그런 게.....있었어?"
오르헬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오르헬조차도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몰랐던 건가?
그에 나는 에이트럼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 이거......잘못하면 의심받는 거 아닌가?'
잠시 걱정을 하던 그 순간.
"스승님과 인연이 있으시니......다크 엘프에 대해서는 로한 경도 잘 알고 계신 것 아니겠소? 스승님께서 열과 성을 다해 제자들을 키우셨지만......그 제자들 중에서도 다크 엘프가 나왔으니 말이오. 스승님께서는 다크 엘프가 된 그를 평생에 걸쳐 쫓으셨소. 그러니 로한 경도 알고 계실 수밖에."
"아, 그런 거야? 하긴. 이젠 뭐 놀랍지도 않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으, 으음."
아무래도 쓸데 없는 걱정인듯했다.
생각보다 나에 대한 신뢰도가 굉장히 높아져 있는 듯 하였다.
"그래서......이제 어쩔 거야, 브라더?"
"방법이 뭐 다른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겠지. 내 발로......"
그래.
역시 가장 확실한 방법은......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것뿐이었다.
* * *
다음 날 밤.
나는 준비를 끝마치고 유유히 숙소를 빠져나와.
리베카의 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필로렌에서 리베카의 주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가장 큰 대로를 따라 대충 걷기만 해도.
"여긴가?"
금방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밤의 필로렌에서, 이곳만큼 사람이 많이 모여든 곳은 드물었으니.
[항구의 이슬]
'유치한 이름이네.'
항구의 이슬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주점으로 발을 들이자.
한 사내가 내게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환영합니다 손님. 항구의 이슬에 방문해주신 것을 매우 감사드립니다. 저희 주점은 완전 예약제로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약이 되어 있지 않으시면 추후 다시 예약 후 방문을 해주셔야 합니다. 예약이 되어 있으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베카와의 약속이 잡혀 있다."
"아, 리베카 님과의 약속이라면......혹시 로한 경 되십니까?"
"그렇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최귀빈층으로 모시겠습니다."
"음."
그렇게 나는 접객원의 뒤를 따라, 윗층으로 그리고 또 윗층으로 올라갔다.
마침내 최상층에 도달하자.
접객원은 허리를 깊게 숙이며, 손을 뻗어 내가 가야 할 방을 가리켜 주었다.
"저곳입니다. 워낙에 보안이 중요한 곳이다 보니, 저도 여기까지만 안내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 방향의 끝에는 딱 하나의 문만이 존재했다.
안내가 없더라도 헤맬 일은 없어 보였다.
"괜찮다."
"그럼,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접객원도 아래층으로 사라지고.
이제 나는 혼자 복도 끝의 문을 향해 다가갔다.
'확실히......보안이 철저하네.'
외관상으로는 별다른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으나.
실은 이 건물의 크기에 비해 최상층은 매우 좁은 구조였다.
저 벽들이 전부 두껍게 제작된 까닭일 터였다.
어디서도 도청을 할 수 없도록 말이다.
'그리고 쳐들어오기도 어렵겠군.'
이 상층은 거의 요새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나는 문 앞에 도달을 했고.
똑똑똑.
가볍게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어제 보았던 그 아름다운 여인이 나를 반겼다.
리베카였다.
"로한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늦진 않았나 모르겠군."
"아닙니다. 다른 분들도 이제 막 도착하셨습니다."
다른 분들?
독대가 아니었던가?
나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다른 세 명의 인원이 보였다.
'이거......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그때.
리베카가 나의 옆에 나란히 서며 입을 열었다.
"이쪽이 앞서 말씀드린 로한 경이십니다. 크라켄마저 꺾지 못한 최강의 기사이시자, 동시에......우리 검은 왕국의 영광을 함께 기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녀의 소개말이 끝나자.
세 명의 인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갑자기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짝짝짝짝짝!
"하하하! 드디어 우리 측에도 진짜 강자가 합류하는군!"
"반갑소, 반갑소! 무한히 환영하는 바이오, 로한 경!"
"바다 한가운데서 크라켄을 죽이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이란 말인가! 검은 왕국의 영광을! 후하하하하!"
그들이 나를 찬양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