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왕국에 영광을
슬로프 기사단 출신 가드, 모건은 요 며칠 사이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어이, 모건. 오늘은 팔 좀 괜찮나? 하하."
"닥쳐."
지금껏 쌓아온 최강자로서의 이미지.
그것에 금이 간 까닭이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은 세상에 차고 넘친다는 걸.
당장 슬로프 기사단만 하더라도, 그 안에서 모건은 하위권에 불과했다.
그래서 온 곳이 바로 이 항구 도시 필로렌이었다.
용의 꼬리로 사느니, 차라리 뱀의 대가리가 되겠다!
그런 각오였던 것이다.
이 도시 정도에서는 감히 모건에게 무력으로 대항할 자는 없었으니.
이후 함께 슬로프 기사단에서 지내던 체프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지금 팔 걱정을 해주는 척하며 나타난 저 인간.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저 인간이 바로 체프먼이었다.
슬로프 기사단에 있을 때부터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실력에.
골치 아픈 경쟁자였는데......
'하필 놈의 고향이 이곳이었을 줄이야.'
기사단을 탈퇴하고 나서도 여기서 마주친 게 아닌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반가웠을 수도 있을 터였다.
제아무리 하위권이었다 하더라도 슬로프 기사단의 기사 둘쯤 한마음으로 뭉친다면.
이런 항구 도시 하나의 실권을 먹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체프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심지어 저쪽은 이 도시가 고향이라, 기존의 인맥까지 있다 보니......
모건에게는 굉장히 불리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창피까지 당하고 나니.
"팔 아프면 하루 정도 더 쉬고 오라고. 내가 대타 서 줄 테니까. 푸하하하!"
"크윽......"
체프먼의 사기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중이었다.
모건은 이를 갈았다.
'내 팔을 꺾은 그 새끼. 분명히 처음 보는 면상이었는데......한 번만 더 내 눈앞에 나타나 봐라. 둘로 찢어줄 테니까!'
이 모든 상황이 전부 며칠 전 그 사내 때문인 것만 같았다.
그때 역으로 당하는 일만 없었더라도!
창피만 당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이 치욕을 당할 일은......'
한데, 그때.
"어? 어어? 네, 네놈이 왜?......"
모건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제 알짱거리던 그놈이......
'뭐야?'
마치 귀족처럼 잘 차려입고,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 *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디아즈와 나는, 항구 도시이자 휴양지이기도 한 필로렌의 대로를.
더스템 시장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함께 걸어나갔다.
무도회장으로 향해서.
그런데 무도회장의 입구에 다다르자.
어제 마주쳤던 그 가드가 보이는 게 아닌가.
어제는 분명 거침없이 달려들었는데.
오늘은 처음부터 주춤 물러서는 게 보였다.
그리고 옷차림을 보더니 한 번 더 주춤.
나와 가드의 눈빛이 마주치는 걸 본 더스템 시장이 물어왔다.
"아, 저희 도시 제일가는 호위 중 한 명입니다. 슬로프 기사단 출신인데, 들어보셨는지요?"
"잘 모르겠군."
"하하. 대양 너머에서 오셨으니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 아티아르 왕국 내에서는 슬로프 기사단만큼 유명한 전사들은 드물답니다."
"그런가?"
나는 그리 되물으며, 가드를 보고 슬쩍 웃었다.
정말 그리 대단하냐는 뉘앙스로.
더스템 시장은 그 비아냥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지만......
"물론이지요!"
가드는 내 의도를 알아챈 듯 보였다.
머리에 핏대가 서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가드를 위아래로 스윽 훑어보고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지."
"그러시지요."
그렇게 우리들은 무도회장 내부로 들어섰다.
무도회장은 이미 한창 파티가 진행이 되고 있는 중이었다.
여러 귀족들이 각자 삼삼오오 모여 손에는 와인을 들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디아즈가 작게 속삭였다.
"거신족이 세상을 뒤집어엎으려는 이 와중에......아무것도 모르고 저리 희희낙락거리는 모습이라니."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사실을 알려봤자 크게 득 될 것도 없었다.
힘이 없는 자들은, 도움도 되지 않은 채 괜한 혼란이나 야기할 것이고.
최악의 인간들은, 오히려 거신족 쪽에 붙어 간신배 짓이나 하며 방해나 할 테니까.
때문에 이런 불특정 다수에게 진실을 밝히는 건, 마이너스 요소가 될 뿐이었다.
"차라리 저리 희희낙락거리며 가만히 있는 게 도움되는 것이다. 우리는 알려도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잘 구별해, 우릴 서포트 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진실을 알리고 움직이는 게 최선이다."
"한편으론 씁쓸하네요."
"하지만, 언젠가는 다 알게 되겠지. 저들도. 결국 우리가 치러야 하는 일의 끝은, 거신족과의 전쟁이니......모를 수가 없을 테지."
"그때가 되면 다들 로한 님의 노고를 알아주겠죠."
"그런 건 관심 없다."
진짜 관심 없었다.
나는 누가 내 힘듦을 알아주고 말고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 끝에서 잘 먹고 잘 살 수만 있다면 되는 거지.
사실 어느 정도 잘 먹을 수 있는 배경은 만들어져 있었다.
안테아 대륙에서의 내 명성은, 어디를 가더라도 편히 살 정도는 되니까.
단지 잘 먹을 수는 있는데, 살 수가 없게 될까 봐 움직이는 것이지.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진짜 발 뻗고 편하게 살겠지? 돈 걱정도 없고, 굶어 죽을 걱정도 없이. 떵떵거리면서.'
해피엔딩을 떠올리자.
빨리 거신족 놈들을 박살 내고 즐거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 치솟았다.
그에 내 눈은, 날을 세우고 무도회장 내부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어제의 그 여인......설마 오늘은 안 온 건 아니겠지?'
악마의 악취를 풍기던 그 여인을 찾기 위해.
몇 분 정도 파티장을 돌아다니던 나는.
마침내......
씨익.
'찾았다......요 쥐새끼.'
입꼬리를 올렸다.
* * *
한편, 레바르센은 별도로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로한, 디아즈와는 일행이 아닌 척하며, 무도회장으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로한이 챙겨준 이 초대장이면......문제 없겠지.'
그녀는 익숙하게 귀족 행세를 하며, 가드에게 초대장을 내비쳤다.
초대장은 더스템 시장에게 부탁해 로한이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기에, 당연히......
"들어가시지요."
가드는 초대장을 확인하고는 다시 레바르센에게 돌려주기 위해 내밀었는데......
"음?"
초대장을 놓지 않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뭔가 일이 잘못된 건가 생각을 한 레바르센이었다.
그러나 가드의 얼굴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
'......이거......고백 공격하기 직전의 얼굴인데?'
나름 피의 절반은 엘프인 레바르센이었기에.
이미 이런 쪽의 눈치는 백 단이 넘어가는 그녀였다.
항상 어딜 가든 눈에 띄는 편이었다.
그래서 얼굴을 자주 후드로 가리고 다녔는데.
이번에는 장소의 특성상 간만에 모습을 그냥 드러내고 나타난 것이었다.
파티장에 얼굴을 가리고 나타나면 그게 더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더불어 최근에는 로한과 같이 다니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어렸을 적부터 이랬다.
잠시만 눈을 마주치면, 금세 헤벌레해서는 들이대는 인간 남자들.
'그래서 남자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반면에 로한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이런 눈빛을 보낸 적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말이지......'
그 때문에 이런 골 아픈 상황이 간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랜만이라고 해서 대처법까지 다 잊은 건 아니었으니.
레바르센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틱.
초대장을 뺏어버렸고.
"그럼, 이만."
가드의 눈앞에서 빨리 사라졌다.
이럴 땐 무시가 상책이었다.
* * *
나는 목표에 조용히 눈동자를 고정한 채.
입으로는 와인을 마셨다.
"오르헬이 왔었으면, 할 일도 다 잊어버리고 이거만 퍼마셨겠네."
별로 술을 즐기지는 않는 나였지만.
그럼에도 이곳의 와인은 그 향기부터가 남달랐다.
"맛있긴 하네요."
디아즈 역시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정말이지 색다른 맛이었다.
아예 안테아 대륙에서는 비슷한 것도 찾기 힘들 정도로.
이런 걸 보면 정말 다른 대륙에 온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온전히 이 와인을 즐길 수가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접근하는 게 어색하지 않고 좋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후우......"
그냥 막 들이대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게다가 우리는 그저 친목 도모가 아니라, 그 뒷면에 가려진 것들도 캐내야 했으니.
확실한 한 방이 필요하긴 했다.
아직까지도 적당한 건수가 떠오르지 않고 있던 그때.
"뭐 하고 있어?"
한껏 차려입은 레바르센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미 디아즈만으로도 좌중의 시선이 은근슬쩍 몰려 있었는데.
레바르센까지 나타나니.
"우와......"
"저분은 대체 누구 신지?"
"신사분이 능력이 좋으시구만......."
"부럽다, 부러워."
"어디 부잣집 도련님이신가?"
사방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3의 눈의 예민한 감각 덕분에, 소곤 거리는 것까지 다 들리는 나는.
뻘쭘함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다만 문제는 뻘쭘함이 아니었다.
그런 것보다도, 시선의 집중이 너무 심했다.
이대로는 너무 주목도가 높다 싶었기에.
나는 안광에 약간의 살기를 담고 주변을 훑었다.
스윽.
"헉!"
"크, 크흠."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덕분에 여유가 생긴 레바르센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목표는 어디 있는데?"
나는 턱짓으로 살짝 방향만 알려주었다.
"저쪽? 어디 보자......"
그런데.
"......!"
레바르센의 얼굴이 갑자기 급격하게 얼어붙는 게 아닌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나?"
"......있는 것 같네."
"뭐?"
"아는 얼굴이야."
이번엔 내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악마의 내음을 풍기는 여인이, 레바르센과 아는 사이라고?
"어떻게 아는 사이이지?"
"우리 둘 다, 하프 엘프였거든."
"하프 엘프라니......"
그런데 말이 조금 이상했다.
하프 엘프였었다니.
과거형이 아닌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은 하프 엘프가 아니라는 뜻인가?"
"눈치가 빠르네. 맞아. 저쪽은 지금 하프 엘프가 아니야."
"그러면......?"
"하프, 다크 엘프. 자연의 축복을 포기하고 악마와 계약한 엘프. 다크 엘프로 변절하였어."
"......!"
다크 엘프라니.
생각치도 못한 변수가 튀어나온 것 같았다.
'잠깐만......이거 그러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레바르센이 갑자기 홱 돌아섰다.
나는 레바르센이 돌아선 이유를 알았다.
다크 엘프가, 이쪽을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시선이 끌린 게 원인인 모양이었다.
해서 나는 결단을 내렸다.
"디아즈, 레바르센. 너희 둘은 일단 빠져나가. 나 혼자 상황을 통제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예?......로한 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 어떻게 하려고?"
나는 그녀들을 향해 대답을 해주었다.
"걱정 마라. 다 방법이 있으니까. 다만, 레바르센. 특히 네가 나와 함께 있다는 걸 들키면 다 물거품이 될 거다. 빨리 빠져나가 주면 좋겠군."
"아, 알겠어."
"그럼, 저와 함께 가시죠."
그렇게 레바르센과 디아즈는, 아름다운 옷을 몇 시간 뽐내지도 못한 채 파티장 밖으로 사라졌고.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것을 확인한 나는.
더스템 시장에게 다가가, 인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 부탁을 했다.
"하하. 역시 로한 경도 리베카에게 관심이 가십니까? 그녀는 아름다우니까요. 인사 정도야 물론 어려울 것 없지요! 따라만 오십시오."
그렇게 더스템 시장과 함께 천천히 걸어가.
인사와 함께 본심을 감춘, 미소 띤 얼굴로.
"리베카."
"아. 더스템 시장님."
"바쁜가요?"
"아닙니다. 시장님이 찾으신다면, 바빠도 시간을 내어야지요? 후후."
리베카는 고풍적인 미소와 함께 우리를 맞이했다.
그에 더스템 시장이 나를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로한 경입니다. 아주아주 실력이 좋은 기사분이시지요. 우리 리베카 양과 인사라도 한번 하고 싶다 하시길래 말이지요."
"새로운 인맥은 언제나 환영이죠. 처음 뵙겠습니다, 로한 경. 저는 이 필로렌 시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리베카라고 합니다."
"어이쿠, 작기는. 로한 경. 리베카 양이 운영하는 주점이 우리 필로렌 시에서 가장 큰 곳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건배를 권했다.
"처음 뵙겠소, 로한이라 하오."
짠.
우리 둘의 잔이 부딪치고.
거리가 가까워진 틈을 타.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살며시 입을 열었다.
"검은 왕국에 영광을."
그것은 다크 엘프들만의, 서로를 파악하기 위한 비밀 사인이었다.
그 말을 들은 리베카의 얼굴이.
"어, 어떻게......?"
순간 놀라움과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