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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사기캐로 살아가는 법-112화 (112/194)

112화. 반가운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드워프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그런데 그 첫 만남이 썩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어 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지독한 상처들 때문에 신음을 하고 있었으니까.

"으으윽......!"

그런 그를, 에이트럼이 부축을 하며 벽에 기대어 앉을 수 있게 도왔다.

"훔카리안.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오?"

"분명히......분명히 프로토테우스. 그 작자의 짓이다......태초 불씨의 거신."

"프로토테우스라니......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아무 일도 없지 않았소? 주변에도 우리 결사대의 인원들이 전부 지키고 있었는데......거신족이 왔었다면......"

그 말을 하며 에이트럼은 자신의 부관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이곳으로 오는 길에도 분명 레바르센과 에이트럼의 부관은, 주변을 감시하고 있다 하였다.

그런데 그 감시망을 뚫은 것도 모자라......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렇게 초토화를 시켜버리다니.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기척은 확실히 없었습니다. 단장님."

에이트럼인 이어 레바르센을 쳐다보았으나.

그녀도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에, 훔카리안은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보았다. 그림자, 그래. 그림자였다. 불을 삼키는 그림자. 어둠 속에서 그놈을 분명히 보았다. 놈이 불을 삼키며 점점 커지는 것을!"

"그림자라니......그 놈의 그림자를 보았다는 말이오?"

"아니! 그림자 그 자체였어."

"그, 그럼 그림자가 이 사달을 일으켰단 말이오?"

에이트럼이 알아듣지 못하자.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오르헬이 한마디 거들었다.

"불을 삼키는 그림자라면......과거 신들의 전쟁에 사용되었던 병기이지. 프로토테우스가 직접 창조한 놈이다. 내가 알기로는 전쟁에 패한 후, 그 그림자도 심연의 아래에 처박힌 걸로 아는데......"

"그런......!"

훔카리안은 시뻘게진 얼굴로 에이트럼의 멱살을 비틀어 쥐었다.

"심연의 아래에 꼴아 박혀서 다시는 나오지 못했어야 할 그 전쟁 병기가! 그게 우리 대장간을 덮쳤다고!"

그는 분노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약속했잖아! 거신족의 무기를 만들어달라던 그 부탁을 거절하던 그 순간부터, 우리를 지켜주겠노라고! 그렇게 약속을 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네들 결사대에 여태껏 얼마나 많은 무기를......쿨럭! 쿨럭!"

훔카리안은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한 채 피가 섞인 기침을 토했다.

"허억......허억......!"

겨우 말을 멈춘 훔카리안을 보며.

에이트럼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오. 우리의 불찰이오."

"흥! 이래서 엘프 놈들이란......불 같은 면이 이리도 없어서야 어디다 쓴단 말인가! 열불 낸 나만 쓰레기가 되었군."

"......"

훔카리안은 한숨을 돌리며 등을 벽에 기대었다.

"후우......내 성격 지랄 맞은 거야, 한두 해 본 것도 아니고. 이해해. 열이 받쳐서 흥분 좀 했다네. 애초에 나도 결국 너희들 의견에 동의를 한 책임이 있기도 하거니와."

"훔카리안......"

에이트럼은 그저 그의 이름만 내뱉을 뿐이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족을 잃는 슬픔을.

그리고 오늘......훔카리안은 모두를 잃은 채였다.

무슨 위안을, 무슨 사과를 어떻게 하겠는가?

이미 모두 죽어버렸는데 말이다.

하지만 훔카리안은 이 지독한 현실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갈 뿐.

"그렇다고 해서 화가 안 나는 건 아니야. 복수해야지. 보여 줘야지! 드워프의 복수가! 분노가! 어떤 건지 내 친히 보여주고야 말 것이야!"

그는 무릎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한쪽 벽장을 향하더니.

덥썩.

병 하나를 집어 들고는 뚜껑을 열어 입에 쏟아 부었다.

세한 알콜 향이 풍기는 걸 보니, 아마도 술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꽤나 독하고 오래된, 또 귀한.

잘 모르는 내가 느끼기에도 그 냄새는 퍽 강렬했기에.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훔카리안은 그 술을 즐기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 눈앞의 상황이 엿 같았기에 들이켜는 것일 뿐.

때문에 모두 조용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훔카리안의 옆에는 오르헬이 서 있었다.

그는 술을 들이붓다가 깜짝 놀라 사레가 들렸다.

"컥! 컥! 쿨럭. 뭐, 뭐요?"

오르헬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턱짓으로 술병을 가리키며 손을 내밀었다.

훔카리안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오르헬에게 술병을 건넸고.....

"꿀꺽! 꿀꺽!"

오르헬은 그걸 받아 마셨다.

"크하! 술맛 좋네. 이 좋은 걸 혼자만 먹으려고 그랬나?"

"......"

"같이 마셨으니, 술값 정도는 해주지."

"뉘시길래......"

"나? 오르헬. 아니면, 뱀파이어 로드라고 설명하는 게 더 빠르려나?"

"......!"

오르헬은 술병을 흔들며, 말을 덧붙였다.

"어디 보자......이 정도 귀한 술이라면, 대가로 뭘 주면 좋으려나......아! 이건 어떤가?"

"뭘......"

"불을 삼키는 그림자. 그놈을 찾을 방법 말이야."

"그런 게......있단 말이오?"

오르헬의 그 말에, 훔카리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 * *

오르헬은 벌써 그 술을 다 마시고는, 마지막 한 방울을 입안에 떨구는 중이었다.

똑.

그리고 완전히 술병이 바닥나자.

다시 하던 말을 이었다.

"불을 삼키는 그림자. 그 녀석, 효율이 굉장히 나쁜 놈이란 말이지."

"그게 무슨 뜻이오?"

훔카리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마 지금 세상 전체를 통틀어, 불을 삼키는 그림자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자는 바로 훔카리안일 것이었다.

"그 녀석. 연료가 필요하단 말이야. 연료가. 그 정도 능력을 가진 병기가 움직이는데 설마 아무것도 필요 없겠어?"

"연료라......그럼, 마나라도 퍼먹는단 말이오?"

"아니지. 거신족이 쓰는 전쟁 병기인데, 그런 흔한 것으론 안 돼."

"그럼 도대체가 뭐로 움직인다는 말이오? 알아 듣게 설명 좀 해주시오!"

오르헬은, 무게를 잡으며 입을 떼었다.

"아무리 타올라도 꺼지지 않는, 끝도 없이 타오르는 것."

"끝도 없이 타오르는......? 그런 게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훔카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오르헬은 자신 있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럼. 존재하지. 존재하고 말고."

그러나 훔카리안은, 팔짱을 끼며 아직 의구심을 풀지 못했다.

"내 평생 대장장이 노릇을 하며 수 많은 불들을 보아왔소이다. 정령이 피운 불도 다루어 보았고, 하늘에서 떨어진 낙뢰가 만들어낸 불도 다루어 보았지.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끝도 없이 타오르지는 못했소. 심지어는 정령의 불도 언젠가는 꺼지기 마련이니까."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구만."

"허, 허허......어리다니......"

감히 누가 훔카리안에게 어리다는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이지 오랜 세월만에 들어본 말인 것 같았다.

하나 반박할 수도 없었다.

저쪽이 뱀파이어 로드라면......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으니까.

그에 훔카리안은, 다시 물었다.

"그럼, 그 끝도 없이 타오르는 것이 대체 무어란 말이오?"

"욕망. 강력한 자아를 가진 자들의 지독한 욕망."

"......!"

오르헬의 힌트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그 불을 삼키는 그림자는, 연료를 구하기 위해 움직여야겠군."

오르헬이 고개를 주억였다.

"하지만 대놓고 움직이진 못하겠지. 그런 특이한 존재는, 너무 눈에 띌 테니까."

"조력자......"

"역시, 브라더. 내 생각도 그래. 조력자가 있다. 분명히."

우리 둘의 대화를 듣던 훔카리안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부디! 부디 도와주시오! 도와만 준다면......내 모든 전력을 다해, 원하는 건 무엇이든 만들어 주겠소! 대장간에서 만들 수 있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훔카리안은 오르헬을 쳐다보며 읍소하였다.

그의 시점에서는, 이 자리에 가장 강자가 뱀파이어 로드인 오르헬일 터이니.

"나는 뭐 필요한 건 없고. 우리 브라더한테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데."

그러면서 오르헬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술 값 받은 김에 좀 도우려는데, 브라더는 어떻게 생각해?"

나의 의견을 묻는 오르헬에, 훔카리안은 의구심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감히 누가 뱀파이어 로드의 의견을 좌지우지한단 말인가?

딱 그런 표정으로.

그에 에이트럼이 대신하여 대답을 하였다.

"부탁했던 검 있지 않소이까. 이분을 위한 것이었소."

"검이라고? 그 정령왕 불꽃에도 녹지 않는 검?"

"그렇소."

"호오. 도대체 누가 그런 검을 필요로 하는가 싶었는데......이 젊은 청년이?"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는 마시오. 내 스승님과 같은 연배이시니까."

"뭐, 뭣이?"

"아, 그리고.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바로 이 분이 크라켄을 죽이신 장본인이시오."

"......!"

그제서야 훔카리안은, 오르헬이 왜 내 의견을 물었는지.

이해가 된 모양이었다.

* * *

항구 도시 필로렌.

나는 그 전경을 눈에 담았다.

얼핏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 어딘가.

인간의 지독한 탐욕을 노리는 괴물이 숨어 있을 터였다.

그렇게 추론하는 게 타당했으니까.

'훔카리안의 대장간과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욕망에 찬 영혼을 구할 수 있을 만한 곳. 역시 이 도시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밖엔 없군......'

하지만 그 조력자를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한다는 것인지가 문제였다.

나 이외에 다른 이들 역시 같은 생각인듯하였다.

앤드류가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 걸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데. 어디부터 뒤져야 해요?"

오르헬도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게. 호기롭게 돕기로 하긴 했는데 말이지......"

나라고 별다른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내 답답한 심정을 느꼈는지.

디아즈와 그렌델은 그저 눈치만 보며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때.

'......음?'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춰 세웠다.

덩달아 내 뒤에 바짝 따라오던 디아즈와 그렌델이 깜짝 놀라며 멈췄다.

"로한 님?"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귀족들의 모임이 이뤄지고 있는, 한 파티장을 쳐다보았다.

바깥에서도 내부의 호화찬란한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은, 그따위 것이 아니었다.

먼저 앞서 걷던 오르헬과 앤드류가 뒤늦게 내가 멈춘 걸 보고 돌아섰다.

"브라더. 배고파?"

"배고플 시간 되기는 했죠."

하나 내가 그쪽을 바라보는 이유는......

'익숙한......구린내가......나는군!'

간만에 느낀 악마의 냄새 때문이었다.

이거 잘하면......조금 편하게 일이 풀릴 지도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씨익.

이 냄새가 반가운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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