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출항이다!
대양을 가로질러 대륙을 건너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이동 시간만 따져 보더라도 자그마치 개월 단위.
선장의 말에 따르면, 빨리 가더라도 석 달 정도는 걸릴 거라고 하였다.
항해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얼핏 생각하더라도.
식량에 식수에 갈아입을 옷가지들도 필요할 테고, 간단한 상비약도......
그 외에도 내가 모르는, 중요 물품들도 많지 않을까?
일이 그 정도로 커지다 보니, 개인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 되었다.
물론 이미 노이아 결사단이 어느 정도 준비해두기는 했지만......
'이걸로는 좀 위험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단위가 결사'대'의 수준이다 보니 그 한계가 명확했다.
그래서 나는, 내 인맥을 좀 써보기로 하였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써먹겠는가.
이제 다른 대륙으로 가면 볼 일도 없을 텐데.
그나마도 멀리 있는 인맥은 쓰기 힘들었기에, 가장 가까운 벤마이어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 것이었다.
'로제스타나 아펠리아. 그리고 거기 교구장한테는 호감도 맥스가 찍혀 있으니까.'
그렇게 나는, 최소한의 지원을 요청한다는 서신을 벤마이어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도착한 것은......
"로한 경! 로한 경! 하하하하!"
"......"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벤마이어 교구의 수장, 트라벤 대주교였다.
'아니......지원 물품만 보내라고......'
* * *
"여기서부터 저어어어기까지는 전부 식료품이고. 저쪽은 의약품. 저기는 간단한 지원금에......어디 보자, 저건 뭐였지?"
트라벤 대주교는 왠지 모르게 신이 난 채로 도착을 했다.
그 의문은, 오르헬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을 대신 하는 걸 보면.
"뭐가 그리 신이 났어?"
"하하. 오르헬 경과 로한 경을 만날 기회가 이렇게 생겼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소이까?"
"뭐?"
"이제 로한 경을 뵙는 건, 다섯 왕국에서는 이미 영광 그 자체가 되었소."
오르헬과 트라벤 대주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
트라벤 대주교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간 로한 경께서 이루어 오신 그 모든 과업. 로한 경의 발걸음보다는 늦게 도착했지만......결국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소."
그 말에, 오르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인정. 나랑 만나기 전부터 이미 악마니, 마녀니. 제9 군단 참모장 호라이크던에, 심지어는 악귀 대공 아크비톤과도 싸워 이겼다니까."
"미노타우르스도 있었다 하오, 오르헬 경."
"미, 미노......하. 이제 놀랍지도 않네."
그러고 보니, 내가 좀 거하게 휘젓고 다니긴 했지......
한데 사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적이 하나 더 있긴 했다.
'가장 처음 죽였던, 악마군단장 중 일인인 칼라림도 있는데.'
그건 가우리엘이 일부러 소문을 막았다고 들었다.
너무 큰 악마를 쓰러뜨렸다는 말이 떠도는 건, 오히려 내 앞길을 막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었다고 한다.
다른 악마들의 집중 타겟이 될 수도 있다고.
나도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기에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물론 그걸 제외하더라도 이미 내 명성은 결코 작지 않게 쌓인듯싶었다.
가우리엘도 이렇게까지 내가 저지를 줄은 생각 못한 게 아닐까.
"그런 로한 경을 뵐 수 있는 기회를, 어찌 저버리겠소?"
"그래서 직접 예까지 찾아온 거야? 브라더 보려고? 대교구장이 대교구를 버리고 말이지?"
"버리다니. 무슨 말을 또......아! 섭섭해서 그러시오? 물론 오르헬 경도 뵙고 싶었소! 하하하하"
"늦었어, 이놈아."
트라벤 대주교는 넉살 좋게, 팔꿈치로 오르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섭섭해 마시오. 내가 다 오르헬 경을 생각해서......귀한 와인도 짐 안에 챙겨둔 것 아니겠소."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 다 들린다.
에휴.
벌써 오르헬의 표정은 환하게 펴지고 있었다.
"귀, 귀한 거?"
"귀하다 마다. 솔직히 대주교라는 이름 때문에, 사치 부린다는 소문 날까 봐 힘들었을 정도의 물건이오."
"키야! 역시 우리 트라벤 브라더!"
뱀파이어 로드와 교단 대주교가 브라더라니......
그것도 와인 때문에.
코웃음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오르헬을 잘 구슬린 트라벤 대주교는, 내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일단......로한 경의 행보는 대외비로 치부하고 있소. 다른 대교구들과도 특별히 관리 중이고. 이번 레시아 대륙으로의 이동도......바깥으로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오?"
나는 잠시 생각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군."
"알겠소이다. 맡겨 주시오!"
"부탁하지."
"염려 놓으셔도 되오. 아, 그리고. 배는 구해두신 것이오?"
에이트럼이 분명 배를 구해 놓았다고 했었는데.
어디 보자......
나는 한 배를 가리키며 대답하였다.
"저기, 저 배인 것 같군."
내 손가락 끝에 걸린 배는, 중형의 배였다.
그래도 나름 이 항구 내에서는 큰 축에 속하는 배라고 할 수 있었다.
한데, 트라벤 대주교는 고개를 흔드는 게 아닌가.
"어허. 로한 경의 레시아 대륙 첫 행보인데, 이런 돛단배로는 안 되지 않겠소?"
"안 될 거까지야......"
"저 배는 어떻소?"
다음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하, 함선?......"
"함선까지는 아니고. 그냥 좀 쓸만한 배요. 교단의 지원이니 편히 쓰시오! 하하하하."
아니 진짜 갤리온 함선 수준인데.
심지어는 함포도 달려 있었다.
"그래도 해적 같은 놈들에 대항하기 위해 기본적인 무장 정도는 되어 있으니, 장거리 항해하시는 데에 걱정하실 것은 없을 것이오."
기본적?
저게 기본이면, 본격적으로 하면......항공모함이라도 나오려나?
나는 그 말은 삼키며, 그저 감사의 표시만 했다.
"고, 고맙군."
트라벤 대주교는 손을 살짝 들어 입을 가리고는, 속닥속닥 거렸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또한 로한 경의 이름은 전혀 없이, 대교구의 대륙 간 교류 차원에서 출항을 한다고 전달해두었으니, 추적당할 걱정도 전혀 없소."
"으, 으음."
역시 대교구급 지원은......화끈했다.
* * *
그렇게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
대교구장이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를 하니.
숨어서 움직이는 집단인 노이아 결사대가 일 처리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야말로 일사천리.
무엇 하나 막히는 것 없이 진행되었고.
에이트럼이 직접 나섰을 때도 쉽지 않던 몇몇 가지의 행정 처리도 그냥 프리패스 수준으로 통과가 되었다.
"......인맥이 참 대단하시오."
내 옆에 서서 헛웃음을 짓는 에이트럼.
그는, 처음엔 모든 일들의 중심에 서 있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구경꾼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오히려 손을 대었다가는 방해나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덕분에 시간이 남은 그는.
일전에 하던 말을 다시 물어왔다.
"스승님과는, 원래부터 알고 지내신 것이오?"
나는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내 말을 의심해서 질문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고......
그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 오는 것 같았다.
"스치는 인연 정도였다. 나는 그저 방관자였으니까."
"방관자라면......"
내 말의 의도를 눈치챈 것 같네.
나는 원작 스토리에서 짧게 등장했던 한 인물인 척하기로 하였다.
이름 없는 방관자.
노이아 결사대가 아직 창단하기 전.
악마들과 싸웠던 엘프들을 도왔던 한 사람이 존재했다고 한다.
자세한 기록이 없던 그 존재는, 아는 사람만 아는 자라고 하는데......
원작을 플레이 하다 보면, 에이트럼이 그런 대사를 친다.
[스스로를 방관자라고 비하했던 위대한 존재가 계셨소. 그분 덕분에 몇 번이고 내 스승님이 목숨을 건졌다고 하셨지. 당신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소.]
레바르센으로 플레이하게 되면 꼭 마주하게 되는 대사였기에 분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해서 나는 그 설정을 내가 챙기기로 한 것이었다.
'어차피 엔딩까지 가도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다음부터는 내 정체 가지고 왈가왈부하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노이아 결사대의 사람들 중에서도 극소수였으니......
에이트럼은 꼼짝없이 내 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 세대의 영웅을 몰라 뵈었습니다!"
그에 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세우며 작게 대답했다.
"그 사실을 퍼트리고 싶었다면, 내가 직접 했을 테지. 그때의 일은 그저 덮어두고 싶다."
"하, 하긴......"
"그리고 말투도 이전과 똑같이 해줬으면 좋겠군."
"그, 그렇지만......"
"물어오기에 대답은 해주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원치 않는다."
"......"
혹시나 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진짜가 나타날 지도 모를 일 아닌가.
조심을 해서 나쁠 건 없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그래도 안 나타날 거 같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고.
결국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한데, 그 전에......하나만 더 여쭈어도 되겠소?"
"무엇이지?"
"스승님께서는......이 반지를 왜 내게 넘기신 것이오? 그저 액세서리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에이트럼은 상의 안쪽으로 넣어두었던 반지를 꺼내며 내려다보았다.
나는 황당했다.
'뭐야? 저게 뭔지도 모르는 건가? 아직도?'
음......불가능한 일은 아니긴 했다.
원작의 에이트럼은 저 반지, 찬란한 눈물을 아주 자유로이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으로부터 미래의 일.
아직은 저 반지의 진가를 모를 수도 있긴 하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의심도 완전히 지워버릴 겸.
그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마나를 한 번에 주입하지 말고, 나누어서 주입해 보았나?"
게이머에게는 흔히 마주하는 3타 추가 데미지 공격.
그게 바로 저 찬란한 눈물의 비밀이었다.
나는 손바닥을 내밀어 주었다.
"타격과 동시에. 세 번."
"그런 게......존재 할 리가......"
의심을 하면서도 에이트럼은 내 손바닥을 두 번 툭툭 쳤고.
마지막 세 번째 공격은, 옆에 세워져 있던 작은 나무 상자를 두드렸다.
그런데!
콰당탕탕!
찬란한 눈물에 잠재되어 있던.
바람 계열의 추가 데미지가, 강하게 뻗어 나갔다.
그 광경을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에이트럼은.
입을 떡 벌린 벙찐 얼굴로 나를 스르륵 돌아보았다.
"이, 이게......몇 백 년 동안 몰랐는.......돼, 됐.......진짜, 돼, 돼......"
끝까지 말을 잇지도 못할 만큼 놀란 채로.
나는 그를 보며 슬쩍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때.
우리가 탈 배의 선장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 준비가 다 되었소! 승선들 하시오!"
그 신호를 시작으로, 하나둘 인원들이 배에 오르기 시작하였고.
"닻을 올려라! 돛을 펴라!"
우리를 실은 배가, 항구를 벗어나.
"출항이다!"
대양으로 힘차게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