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악마와 권좌를 빼앗긴 거신족
아라젠트 왕국의 최남단.
그곳에는 자그마한 항구 도시, 토르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노이아 결사대의 에이트럼 따라 토르슨 내부로 들어섰다.
이곳에 오고 나서는 처음 접하는 바다였다.
해안 특유의 짭짤한 바다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자, 마침내 이곳이 바닷가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느긋하게 바다 구경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바로 에이트럼이 이끄는 대로, 자그마한 은거지로 들어간 까닭이었다.
"이리로."
끼이이익.
낡은 문 경첩 소리와 함께.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가정집 같아 보이는데?'
영락없는, 근처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활을 하는 어부의 집.
딱 그 정도 느낌이었다.
바닥 한구석에는 엉킨 그물이 널브러져 있었고.
여기저기에 배 수리 도구나, 부품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짙은 생선 비린내까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에이트럼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뚜벅뚜벅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나 역시 그를 따라, 그 집의 안으로 따라 걸었다.
에이트럼은 가장 안쪽의 방문을 열고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들어오시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의 안내를 따라 방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당연히 예상했던 대로.
우리들 앞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문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뚝, 뚝......
주변이 바다이기 때문일까.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는,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자그마하게 울렸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복도를 더 걸었다.
선두에 선 에이트림이 중간중간 멈칫하는 걸 보아하니, 아마 함정들도 여럿 설치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끝의 방.
그곳에는 꽤 넓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체 이 지하에 어떻게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에이트럼은 그곳을 크게 돌아다 보며 말을 했다.
"이게 다 모르자돈의 괴수. 그 하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오."
"정성이 많이 들어갔군."
"하하. 그만큼 모르자돈의 괴수가 두려운 존재였다는 방증이 아니겠소."
그는 내게 의자를 권했다.
"협소하지만, 앉으시오."
"그러지."
마주 앉은 나와 에이트럼.
다른 이들 역시 적당한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하지만 에이트럼의 시선은 오로지 나에게로만 향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조차 감도 오지 않는 건 처음이오."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하도록 하지. 거신족이 왜 내 목숨을 노리는 거지? 아니 어떻게 내 존재를 알고 있는 거지?"
나는 저쪽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정도로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에이트럼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라이크던. 이 이름을 알고 계시오?"
"호라이크던이라면......"
기억났다.
이미 꽤 시간이 지난 일이었다.
나와 피코가 처음 만났던 곳이 바로 호라이크던의 레어이지 않았던가.
거기서 레바르센이 성수를 내게 줘서 피코의 알 위에 뿌렸고......
'녀석이 욕부터 하면서 태어났었지.'
벌써 먼 과거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마냥 짧지는 않았던 까닭이었다.
더군다나 밤이고 낮이고 함께 다들 붙어 있었으니 더더욱 그리 느껴진 것이리라.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
에이트럼은 말을 이었다.
"제9군단 소속 참모장 호라이크던. 그자는 세상에서 가장 언데드에 정통한 자들 중 하나였소."
"본인부터가 벌써 언데드였으니까."
"참모장이면서 망령 군단까지 거느린, 말도 안 되는 존재였지. 참모장이 그만한 군세를 거느린 건 오로지 그자뿐이었소."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놈이 달고 다니던 언데드의 물량은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로한 경의 손에 결국 해골로 돌아가긴 했지만."
에이트럼은 나를 보고는 작게 미소 지었다.
"어쨌든. 그자는, 거대한 유골 하나를 숨기고 있었소."
그의 말에, 레바르센이 설명을 보태었다.
"기억할지 모르겠네. 우리가 처음 함께 움직였던......"
"묘지기 몬스의 은신처. 기억하고 있다. 놈을 뒤쫓던 중, 지하에서 보았었지. 거대한 유골을."
"역시, 기억력 좋은걸?"
그게 설마......거신족?
내 짐작이 맞았다는 걸, 에이트럼이 바로 확인시켜 주었다.
"그 유골이 바로 거신족의 것이었소. 레바르센은 그걸 간파하고 바로 결사대에게 연락을 취해온 것이오."
그래서 갑자기 사라졌던 거구나.
이제야 앞뒤 상황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악마와 권좌를 잃은 거신족. 그들이 손을 잡았다는 걸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첫 번째 물증이었소. 그 말인즉, 로한 경에 대한 정보도, 악마를 통해 거신족에게 넘어갔던 것이 아닌가, 라는 게 우리 측 의견이오."
그런 경로라면......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론이었다.
하지만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내가 아는 미래에서는, 거신족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단지 악마가 이 중간계를 집어삼켰을 뿐.
"무엇 때문에 접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들이 손을 잡은 것이지?"
"아직은 그저 추측에 불과하지만, 한 가지 가설이 있소."
"가설?"
"그 두 존재들의 공통점이, 딱 하나가 있다는 거지."
나는 공통점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바로 에이트럼이 할 말을 간파하였다.
"지금의 신과 적대적이라는 점이군. 악마와 권좌를 빼앗긴 거신족 양쪽 다."
* * *
"정답이오."
에이트럼은 내 말에 긍정을 하였다.
"다만 양쪽 모두, 서로를 돕는 척하면서 다른 생각을 품었던 것 같소."
"악마야 속이 시커멓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거신족도 크게 다를 바 없었소. 그들은 악마들이 혼란을 야기하여, 천사를 비롯한 천상계의 존재들과 전쟁이 벌어지게 한 후, 그 틈을 이용해 악마와 천계, 모두를 멸망시킬 생각을 했던 것 같소. 로한 경 덕분에 악마들의 계획은 전부 물거품이 되었지만 말이오."
"......모두를?"
"그렇소. 물론, 그 모두에는......우리들도 포함이오. 인간, 엘프, 드워프 그리고 정령들까지 전부."
"그게 뭐야? 아예 중간계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인가?"
"비슷하오. 정화 계획. 지금의 신을 따르는 존재들은 더 이상 갱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소. 그래서 전부 쓸어버린 다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생각으로 보이오."
더할 나위 없이 극단적인 결단이었다.
어찌보면 악마 놈들이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로.
"신화의 괴물들, 아니면 오크, 트롤과 같이 지금의 신들에게 반감을 가진 종족 몇몇 정도만 살아남지 않을 테지. 그 외에는......말 그대로, 대심판."
"......"
에이트럼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갑자기 내 머릿속에서 그 모든 것들이 정리되어 갔다.
내가 알던 미래에는 거신족이 없었고.
지금은 거신족이 활개를 치는 이유.
아마 악마들 역시 거신족의 저런 속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알고도 묵과했겠지.
대침공을 위해서.
그리고 대침공이 성공한 후, 원작의 스토리에서는 결국 거신족도 악마들에게 패배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악마들도 거신족의 배신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면 대책도 세웠을 테니까.
다만 지금의 시점에서는 원작과 다르게 '나'라는 변수가 튀어나와버린 것이었다.
그 새로운 변수에는 대처를 하지 못해 대침공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 버렸고......
그 반등으로 거신족이 활개를 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대침공이 사라지면서, 미래의 큰 물줄기 자체가 변해버린 듯 하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내가 있었다.
"모르자돈의 괴수가 죽는 그 순간, 생존한 거신족들이 귀하의 위치를 파악하였소. 다만 거기서 살아남아 위치를 옮겼으니......당분간은 찾지는 못할 것이오."
"그렇군. 모르자돈의 괴수가 죽었기 때문에......"
"결론은, 우리가 힘을 합쳐 거신족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오.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대심판의 희생양이 될 뿐이니. 악마를 물리치니 거신족이라......하하. 이게 뭔가 싶소, 나도."
에이트럼은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나 역시도 어이가 없기는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내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약간은 흥분되는 기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새로 얻은 화염의 힘......써 볼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미묘하게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그 검. 더 이상 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소만."
에이트럼의 말에, 나는 내 옆구리에 채워진 검을 내려다보았다.
화염구의 화력에 이제는 검집에서 뽑히지도 않게 녹아 버린 검.
여태 유용하게 잘 썼는데......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검을 구할만한 곳이 있는가?"
"흔한 검은 쉬이 구할 수 있겠지만......귀하께서 지금 가진 그런 수준의 검은 구하기가 힘든 게 사실이오."
역시.
나름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특별히 만들어 준 녀석인데.
이만한 게 흔할 리가 없지.
'일단은 대충 아무거나 라도 써야 하나......'
그렇다고는 해도, 본격적으로 쓸만한 검이 필요하기는 했다.
계속 일회용 수준의 검을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물론 어느 정도 비싼 검을 구매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돈으로 살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특히 강한 화력에도 잘 버틸 수 있는 놈이.'
앞으로는 화염에 노출될 일이 잦을 테니까.
그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에이트럼이 말을 걸어왔다.
"실은, 바다 너머 대륙에 유명한 드워프 한 명을 알고 있소."
"드워프?"
나는 그 종족의 이름에 혹했다.
드워프는 다른 게임이나 소설에서도 이미 대장장이로서는 경지에 오른 종족이었다.
파오갓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원작 속에서 등장하는, 고위 존재들이 쓰는 검들도 전부 드워프제가 아니었던가.
나도 드워프제 검이라면......하나 정도는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한 경. 우리 정보망에 따르면, 이번에 로한 경에게 거대한 창을 날린 거신 또한 대양 너머 레시아 대륙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이오."
"레시아......?"
설정집에서는 본 것 같은데.
원작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당연히 내게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미지의 세계와 다름이 없는 곳이었고.
"함께 레시아 대륙으로 가시지 않겠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드워프의 검을 귀하의 눈앞에 내어드리리다. 대신, 우리를 좀 도와주시오. 대심판은......막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
잠시 고민하는 척 대답을 미루긴 했지만.
사실 내 입장에서도 답은 하나였다.
어차피 막지 않으면 나도 죽는 거 아닌가?
그럴 바엔 드워프제 검이라도 한 번 휘둘러나 보고 죽는 게 나았다.
물론 안 죽는 게 최고겠지만.
나는, 다시 고개를 들며 에이트럼을 쳐다보았다.
"배는 준비되어 있나?"
"......! 그, 그 말씀은......!"
"다른 대륙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긴 하군."
"숭고한 결단! 고맙소!"
그렇게 우리는......원작에서도 본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대륙으로의 발걸음의 시작을, 지금 내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