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하긴 했었지
모르자돈의 괴수 목이 날아가고.
평소대로였다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해야 했지만......
휘익!
나는 놈이 죽은 것만 확인한 후.
바로 몸을 돌려 오르헬에게로 향했다.
오르헬이 쓰러졌던 그곳에는.
바닥에 흥건히 피가 흩뿌려져 있었고.
"......"
"......"
"......"
모두들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누운 오르헬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샌가 디아즈의 품에서 빠져나온 피코는.
가까이 온 나를 보더니 작게 말을 걸어왔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삐약."
피코마저도 고개를 저었다.
나는 천천히 오르헬에게 다가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드르렁......"
"......?"
죽은 놈이 왜 코를 골아......?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에 피코가 말을 이었다.
"멀쩡한데 뭘 하라고? 삐약."
"멀쩡?......분명히 옆구리가 절반은 날아갔는데?"
"저놈이 뭔지 까먹었어? 저거 뱀파이어 로드라고. 삐약."
"......"
그래, 그랬지.
저거 맨날 술주정해서 잊어버리곤 하는데......뱀파이어 로드였지?
그 정도 상처로는 죽지 않는다는 건가?
'다행......'
"드르러러러러렁!"
빠직.
순간 내 이성이 잠깐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걱정한 게 아까워진 기분이었다.
나는 애달픈 눈으로 한 발 더 다가가.
빠악!
오르헬의 이마를 한 대 후렸다.
* * *
"아니, 안 죽는다고 분명히 말 해줬잖아, 브라더."
그래, 뭐......그 말을 하긴 했었지.
"그러게나 말이지. 나도 몰랐는데, 내가 속고만 살았나 보군."
오르헬은 손바닥 모양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문지르며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에이, 무슨 말을 또 그렇게 섭섭하게 해? 그래도 진짜 위험하기는 했다고. 아무리 나라도 반 토막 난 몸을 다시 붙이지는 못하니까."
실제로 거의 죽을 뻔하기는 했다.
그게 오르헬의 설명이었다.
물론 거짓말은 아닐 터였다.
"우와, 근데 모르자돈의 괴수 그 놈. 발톱 진짜 살벌하데? 부슨 베이는 느낌도 들기 전에 벌써 베여져 있어?"
모르자돈의 괴수가 가진 발톱은 정말이지 날카로웠다.
놈의 발톱이 근처에 오기만 해도, 내 제3의 눈이 격렬하게 위험 신호를 알려왔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잘 피하긴 했다만......
"이건 더 수리라도 좀 해야겠군."
아쉽게도 내 검, 라스칼론은 치명상을 입어 당장은 사용이 힘들어 보였다.
모르자돈의 괴수 발톱이 검신을 반쯤 잘라버린 까닭이었다.
겨우 칼날이 붙어 있는 느낌.
물론 공간 베기 권능을 쓴다면, 아직 부러지지는 않았으니 벨 수는 있겠지만......
휘두르가다 부러져 버리면 내가 위험에 처하는 순간이 닥칠 수도 있었다.
일단은 임시로 검을 구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내가 검을 살피는 사이.
"그건 그렇고."
오르헬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여기서 모르자돈의 괴수 놈이 잠복하고 있었다는 건......근처에 진짜 가우리엘의 날개가 있다는 소리 아니겠어?"
나는 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오르헬은 품에서, 가우리엘의 날개 위치가 기록된 지도를 꺼냈다.
붉게 변한 지도를.
"에잉. 피 묻어서 엉망이 됐네. 어디 보자......"
그러나 이미 피에 푸욱 젖은 그 지도는,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오르헬은 눈동자만 살짝 들어, 내 눈치를 살폈다.
"......크, 큰일인데?......이거 다시 돌아가서 지도를 만들어 와야......"
그리고는 갑자기 아픈 척을 했다.
"어후. 피를 많이 뺐더니 정신이 혼미하네......아이고 머리야......"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아픈 척도 아니고, 눈치 보는 것도 아니고.
그 어설픈 행동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하긴, 어디 뱀파이어 로드가 누구 앞에서 연기를 해봤겠나.
게다가 진짜 피를 빼긴 빼서 그런지 약간은 수척해진 것 같기도 하고.
오늘 하루만큼은 그냥 넘어가 주기로 한 나였다.
"어쩔 수 없지. 벤마이어로 복귀해서 재정비하고, 다시 오도록 하지."
"휴, 휴우......"
오르헬이 고개를 돌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던 그때.
갑자기 앤드류가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킁킁! 어어? 잠시만요! 잠시만!"
그러더니.
강아지처럼 코를 땅에 박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애가 미쳤나 싶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뭔가 그냥 헛짓거리하는 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킁킁! 냄새가 나는데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냄새?"
"천......사? 천사의 그, 뭐라고 해야 하지......환한 냄새요?"
세상에......환한 냄새가 대체 뭐야.
빛도 냄새가 있나?
앤드류는 코를 벌름거리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비슷한 자리를 맴돌기만 하더니......
"여기다!"
마침내 한 자리에 멈춰 서는 게 아닌가.
그대로 주저앉아 양손으로 파파파팍 땅을 파는 앤드류.
그 황당한 모습에, 나머지 인원들은 얼어붙어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데......
"미친......"
땅을 파헤치던 그의 옆에서.
나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직접 직관하게 되었으니.
"찾았다!"
정말 냄새만으로 가우리엘의 날개를 찾아낸 앤드류였다.
* * *
"코가 좋다는 거 알고는 있었는데 말이지......"
중얼거리는 오르헬을 보며 내가 물었다.
"어떻게?"
오르헬은 턱짓으로 앤드류를 가리켰다.
"저 녀석. 저녁마다 사냥 나갈 때, 코로 사냥감 찾는다니까? 심지어 멧돼지인지, 토끼인지, 늑대인지도 구별하더라고......근데 저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지."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앤드류는,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어서 잡아봐요! 어서!"
가우리엘의 날개를 가리키며.
약간은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저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 건지, 옆에서 지켜봐서 잘 알면서......
내가 뭐라고 자기가 찾아놓고는 저리 흔쾌히 넘긴단 말인가.
'얼마든지 뒤통수 칠 만큼 가치 있는 힘인데......저 정도의 힘이라면, 뒤통수 치고도 남을 인간도 차고 넘칠 텐데......'
궁금했다.
어떤 생각으로 저걸 내게 넘기는지.
"네가 찾지 않았나?"
앤드류는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코를 스윽 문질렀다.
"헤헤. 그러니까요! 나도 할 땐 한다니까요? 이게 꼭 고기 찾는 데만 쓰는 능력이 아니라는 건, 방금 깨닫기는 했지만."
"네가 차지할 생각은 들지 않나?"
"제가요? 에이. 저거 가져서 뭐해요. 어차피 제대로 쓰지도 못할 거. 원래 음식도 힘도, 분에 넘칠 만큼 가지면 체하는 법이에요. 그리고 저는 제 분을 정확히 알고 있죠!"
음식이랑 동급에 놓다니......
좀 이상하긴 하지만, 나는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래서, 넘기는 건가?"
"어차피 모르자돈의 괴수도 로한 경이 아니었으면 우린 그냥 몰살당했을 거고. 그 전에 이 위치를 찾아낸 것도 로한 경이 아라크네를 잡았으니까 된 거잖아요? 당연히 로한 경 거지."
"......"
다시 한 번 느꼈다.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믿을만한 사람들인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고맙게 받도록 하지."
나는 바닥에 떨어진, 뜯긴 날개에 손을 가져다 대었고.
파아아아앗!
거대한 빛과 함께, 화염의 기운이 몸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처, 첫 번째 것 보다 기운이 좀 센데?'
화염의 정령왕과의 계약이 새겨진 날개라 그런 것일까?
불사조의 포션과 만티코어의 내단, 드레트노어의 독혈 등등......각종 버프를 받고 강해진 몸임에도 내부가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피코조차도.
"불의 기운이 생각보다 더 강하다, 삐약! 정신 똑바로 차려라, 삐약!"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을 해주었다.
그래도 몸 안이 상할 때마다, 피코의 기운이 다시 불사조의 불꽃을 일으키며 즉각 회복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피코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끊임없이 타고, 또 회복하는 동안의 그 고통.
그것은 오롯이 내가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크으으윽......!"
악문 입 옆으로, 고통으로 인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 * *
버티는 것.
그것 외에는 다른 건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게 끝날 때까지 버티고 또 버텼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숨을 고른 나는, 마침내 다시 눈을 떴다.
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달빛이었다.
분명 해가 떠 있을 때 가우리엘의 날개를 손에 넣었건만.
벌써 해는 완연히 종적을 감춘 후였다.
다음으로 보인 건, 내 주변이었다.
시커멓게 타들어 간 바닥과.
잘려진 잡초들.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마 내가 버티는 동안, 몸에서 열이 피어올라 주변의 풀에 불길이 일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 주변을 지키던 오르헬, 디아즈, 그렌델, 앤드류가 그 잡초를 베어내어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고.
또 진압한 흔적이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항상 전투에서는 내가 활약한다지만, 실상 이렇게 전투 외의 부분에서는 저들이 내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들을 믿고 내가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다시 눈을 떴다는 걸 깨달은 디아즈는, 바로 다가왔다.
"로한 님! 괜찮으십니까?"
그녀의 그 말을 신호로, 모두 내가 가우리엘의 힘을 진정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브라더!"
"로한 경!"
"깨어나셨습니까?"
한달음에 내 주변이 사람들로 가득 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괜찮다."
그 말에, 다들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앤드류는 혀를 내둘렀다.
"열기가 너무 강해서, 무슨 일 나는 줄 알았다니까요? 어후, 내가 가졌으면 타죽을 뻔했겠어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랬으리라.
당장에 나도 피코의 힘이 아니었다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테니까.
그래도 어찌어찌 잘 넘긴 것 같기는 했다.
이어서 오르헬이 입을 열었다.
"근데, 브라더. 뭐 어떤 느낌인데? 나도 정령왕의 힘은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굉장히 궁금하단 말이야."
"흠......"
하지만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이제 막 힘을 진정시킨 것에 불과할 뿐.
도대체 무슨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모르기는 오르헬이나 나나 매한가지라는 소리였다.
그에 오르헬이 힌트를 하나 주었다.
"그러면, 손바닥 위에 불의 기운을 자그마하게 한 번 올려보는 어때? 이미지화하기도 쉬울 거고."
"손바닥에? 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왼손 위에, 불의 기운을 끌어 올리고자 하였다.
'작게......작게.'
연습용이니까 최소한의 힘으로......
그렇게 집중을 하자.
화르르르륵!
한데, 이거......너무 크다?
주먹만한 사이즈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불덩어리는 점점 커져서 거의 소형 자동차만 하게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힘이 넘쳐 흘러 주체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오르헬이 그걸 보고선 기겁을 했다.
"야! 야! 브라더! 작게 하라고! 작게!"
앤드류도 깜짝 놀라며 뒤로 엎어졌고.
"우, 우와아아아악!"
그 거대한 불덩이가, 마치 작은 태양처럼 야밤의 살라리온 고원을 훤히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