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오늘은 여기까지
로제스타와 아펠리아를 본 오르헬은, 나를 쳐다보았다.
"뭐야? 쟤는 너희 쪽 애들 아니었어? 그래서 신경 안 썼는데?"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나 역시, 이 마을에 들어서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저들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
나름 숨는다고 숨은 채로 우릴 지켜보는 것 같던데......
그 정도로 내 제3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대충 성기사 쪽 사람이라고 예상은 했는데......'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뿐.
다만 이단 심문관과 일곱 기사단의 일원일 줄은.
차마 거기까진 예상을 하지 못했었다.
내 대답을 들은 오르헬은 입을 삐죽였다.
"그래? 우리 브라더랑 아는 애들이 아니란 말이지? 에이. 그럼 저렇게 건방지게 굴면, 안 되지. 그래선 안 돼."
"아는 사람이었으면 봐주려고 했고?"
"뭐, 어느 정도는?"
나와 오르헬의 대화를 듣던 로제스타와 아펠리아는,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 * *
"아펠리아 심문관. 이거 아무래도 저희가 우습게 보인 모양입니다."
"그러게요, 로제스타 경. 저희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로군요."
보통 일곱 기사단이나, 이단 심문관의 직책 그 둘 중 하나만 들어도, 웬만한 귀족조차 고개를 숙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또 아니었다.
특히 아직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가진 두 여인이 함께 다닐 때면.
도적 같은 막돼먹은 놈들은, 자주 저런 언행을 보이곤 했었다.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만만하게 보고 무시하는 작자들 말이다.
물론 언제나 그런 일이 벌어질 때면.
결국 자신들을 얕봤던 자들은 언제나 그렇듯, 그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참을 생각이었다.
상대가 그리 나쁜 놈들 같아 보이지도 않고......
이 이상한 마을은, 외지인에게 너무나도 가혹했으니까.
그나마 같은 외지인이라고는 저들밖에 없었다.
로제스타가 먼저 앞으로 나서서, 한 수 접어 주었다.
"지금의 무례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그 말에, 술주정뱅이같이 생긴 놈이 귓구멍을 새끼손가락으로 후비며 대답했다.
"무례는 이 시간에 예고도 없이 쳐들어온 너희들이 저지른 거고. 아 이것 참. 막 자라나는 새싹들을 밟을 수도 없고 진짜."
심지어 그 옆에 앉아 있는 자는, 오히려 그 술주정뱅이를 말리는 게 아닌가.
"모르고 그랬을 테지. 참아, 그냥."
어이가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굴 말린단 말인가.
오히려 참고 있는 것은 이쪽이었다.
술주정뱅이는, 손을 휘휘 흔들며, 말을 이었다.
"후......우리 브라더가 참으라니까 내 참기는 참는데, 어서들 나가. 들어오려면 다음에는 오른손과 왼손에 사이좋게 고급술이라도 한 병씩 들고 오던가."
기껏 참아주었는데도 저런 태도라니.
그 안하무인의 행동에.
결국 로제스타의 성격이 폭발하였다.
"분명히 처음에 말했을 텐데. 협조에 불응한다면, 험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고."
로제스타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변하자.
아펠리아가 그녀를 말렸다.
"로제스타 경.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잖아요?"
"말로 안 통하면, 무력을 행사하는 게 제일 빠른 길입니다."
그 모습을 본 술주정뱅이가 피식 웃었다.
"싸우려고? 누구랑 싸우게? 우리 쪽이 머릿수가 훨씬 많은데?"
그 웃음에, 로제스타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숫자? 많다고 유리하다 생각하나 본데. 그거 오산이다. 다 덤벼도 상대해 줄 수 있음이다."
"진짜 꿀밤 딱 한 방만 쥐어박아 버릴까?"
"할 수 있으면 해보시던가."
"저 애송이를 진짜......!"
"뭐, 뭣이? 애송이? 누가 애송이인지 가려주마!"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나가서 해! 이것들아!"
"......"
"......"
* * *
재미있게도.
결국 오르헬과 로제스타의 대련은 성사되었다.
나가서 하라는 말을, 진짜 하라는 뜻으로 들은 까닭이었다.
근데, 뭐......나도 재미있을 거 같아서 딱히 말리진 않았다.
죽고 죽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대련이니까.
그렇게 시작된 둘의 대련.
장소는 여관에서도 조금 떨어진, 후미진 공터였다.
물론 이 상황에서 제일 신이 난 것은.
앤드류였다.
"자, 자! 규칙은 간단합니다? 먼저 꿀밤 먹이는 사람이 승리. 무기는 쓸 수 없고, 먼저 맞으면 깔끔하게 패배 인정. 오케이?"
심판이랍시고 중간에 서서는.
양쪽 선수들에게 룰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오르헬과 로제스타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좋다."
어느샌가 앤드류의 흐름에 다들 말린 것 같았다.
이런 걸 보면 의외로 대단한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앤드류의 수신호를 기점으로.
"준비......시작!"
대련의 막이 올랐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졌음에도.
둘 모두 굉장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오르헬은 코를 후볐고.
로제스타 역시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오르헬이었다.
"드루 와."
"그래? 그럼 사양 않고, 선공하도록 하지. 참고로......"
핏!
순간 로제스타의 신형이 흐려지더니.
벌써 오르헬의 뒤통수를 먼저 선점하였다.
그녀는 일격 만에 승기를 확신하며 목소리를 내었다.
"내 꿀밤은 좀 아플 것이다!"
그러나......
'그거론 안 될걸?'
오르헬은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만 살짝 비틀어 피해버리고는.
부웅......!
허공을 가르는 로제스타의 팔을 붙잡고.
덥썩, 휘익!
자신의 앞으로 다시 던져버렸다.
콰앙!......타닷!
그녀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지만, 바로 몸을 튕겨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균형이 무너졌음에도 다시 회복하는 속도가 제법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사실 나는 시작도 전에 이 승부의 결과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야 오르헬이 찬밥취급도 받고, 앤드류가 놀리기도 한다지만......
명색이 그는 뱀파이어 로드였으니 말해 뭐하겠는가.
"내가 한 번 참아줬는데도 구우우우욷이 이 사달을 만들고. 엉?"
"......"
"또 드루 와. 계속 드루와. 넌 오늘 뒤졌어.
* * *
오르헬은 꿀밤을 때리지 않았다.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꿀밤을 때리면 대련이 끝이 나는 것이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꿀밤을 때리기 전까지는, 이 대련은 끝이 나질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걸 이용해서 계속 업어치기만 할 뿐이었다.
쿵!
"크흡!"
쿠웅!
"윽......!"
콰앙!"
"커헉?"
당하고 있는 로제스타야 당연히 진작에 수준의 차이를 절감했을 것이고.
지켜보던 아펠리아 역시도 점점 표정이 굳어갔다.
관전하던 입장에서야, 단박에 둘의 차이를 체감하기는 힘들 테니 아마 처음엔 그저 우연이라 생각했겠지.
그럴만 했다.
로제스타는 일곱 기사단이었으니까.
약 30분쯤 시간이 흐르고.
계속 같은 장면이 반복되자, 나는 그만 앤드류에게 눈짓을 주었다.
여기서 그만 끊으라는.
내 의도를 잘 읽은 앤드류는, 그 둘의 사이로 타이밍 좋게 샤샥 치고 들어갔다.
"자! 끝, 끝! 오늘은 여기까지!"
그 움직임조차도 예사롭지 않다는 걸, 로제스타는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대체......"
그 와중에도 오르헬은 아직 화가 좀 덜 풀린듯하였다.
"왜? 벌써 그만하라고? 이제 시작인데?"
오르헬의 그 말에, 로제스타는 흠칫 놀랐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지옥 같은 30분을 느꼈을 테니까.
체감상은 30분이 아니라 30시간 같았겠지.
나는 최대한 놀라는 걸 감추려는 그녀를 보며.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갑자기 앤드류가 끼어든 탓에, 오르헬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오르헬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마지막으로 로제스타에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흐유......넌 브라더 아니면 진짜 호오오오온 났어. 알아들어?"
처음에는 반박을 하더니.
이제는 입을 꾹 다무는 로제스타였다.
아마 자신도 절절히 느꼈을 터였다.
자기 자신과 오르헬 사이의 그 벽을.
이 대련을 보고 나니, 나는 의외로 앤드류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앤드류였다면......저것보다는 그래도 오르헬을 귀찮게 만들었을 텐데.'
최연소 일곱 기사단이라고 했던가?
역시 재능충은 재능충인 모양이었다.
이대로 쑥쑥 실력을 잘 키우기만 해도......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일곱 기사단의 기사들보다 최강이 되겠어.'
특히 최근에는 오르헬이 시간 날 때마다 무술 수련도 봐주는 것 같더니.
근래 들어 포텐셜이 팍팍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 대련을 중간에 끊고 끼어들어 가는 타이밍도 그렇고 말이다.
여하튼.
결론적으로 나는 로제스타에게 약간의 실망을 했다.
앤드류, 크라우스, 모르돈......
내가 봐왔던 일곱 기사단의 기사들 중에서는 최약체였다.
그녀의 시선과, 내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자신은 상대조차 되지 못한 오르헬을, 나는 말 한마디로 멈춰 세우는 걸 본 이후부터 계속해서 그녀의 눈동자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듯싶었다.
나는 딱히 뭐라 말하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 그래도 디아즈가 로제스타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오르헬도 쉬엄쉬엄 상대했던지라 크게 다친 곳은 없을 테니, 로제스타는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나마 살갑게 대해주는 디아즈에게 물었다.
"당신들......도대체 누구십니까?"
"저희 말입니까?
디아즈는 로제스타를 일으켜 세워주며.
그 물음에 대답을 해주었다.
"저는 일곱 기사단의 기사를 모시는 부관, 디아즈입니다."
"디, 디아즈 경? 디아즈 경이라면, 레아노아 경과 함께 싸우셨던......!"
디아즈는 작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다른 분들은......"
로제스타와 아펠리아는 떨리는 눈으로, 그렌델을 쳐다보았다.
"나는 특별한 직위는 없고. 그냥 마법사 크뢰이튼의 제자다."
그 대답에 이번에는 아펠리아가 기겁을 했다.
"크, 크뢰이튼 경이라면! 헤세테 왕국의 왕실 마법사......! 광열의 크뢰이튼?"
"뭐, 그렇게 불린다고도 하던데."
다음은 앤드류에게 고개가 돌아가고.
"아, 나는 심판. 이 아니라, 같은 일곱 기사단의 일원. 앤드류!"
"......!"
"......!"
일곱 기사단이 여기 끼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그녀들이었다.
둘은 입을 쩍 벌렸다.
그쯤 되니 이제 로제스타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저 멀리 사라져가는 술주정뱅이를 쳐다보고 조심스럽게 디아즈에게 물었다.
"그, 그럼 저분은......?"
"뱀파이어 로드 중 한 분이십니다. 아, 그래도 채식주의자시니 크게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디아즈는 친절히 부연 설명까지 보태주었다.
우리에게야 이젠 친근한 오르헬이지.
보통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악마나 뱀파이어 로드나 오크나 무서운 존재 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도 뭐, 그냥 악마만 아니면 큰 상관은 없었으니 별 신경을 안 쓴 거지.
사실은 흔치는 않은 광경이긴 했다.
"하, 하하......"
이제는 어이가 없는지 웃음만 흘리는 로제스타.
마지막은 당연히 내 차례였는데......
앞에 워낙 거물들이 연타로 나와서 그런지.
로제스타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는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내 입으로 직접 대답해주었다.
"나는 교단의 이단 심문관이다."
내 대답에, 아펠리아가 화색을 띠며 다가왔다.
"이단 심문관이셨군요! 어떤 분의 계보를 이으신 건가요?"
"하인트 주교."
"하, 하, 하, 하인트 주, 주교님이시라면......!"
아펠리아가 채 숨을 고르기도 전에.
나는 말을 이었다.
로제스타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일곱 기사단의 일곱 번째 기사, 로한이다."
"......?"
로제스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방금......이단 심문관이시라고......"
"그래. 동시에 일곱 기사단이기도 하고."
"......?"
아직도 뇌가 로딩 중인가?
몇 초가 좀 더 흐른 뒤에야.
"어, 어어어억!"
로제스타는 기겁을 하였다.
물론 아펠리아 역시.
별반 다르진 않았다.
"허허허허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