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조치를 취할 것이다
카르나이 유적지를 떠나, 헤세테에서 완전히 벗어난 우리는.
어느새 고울룬 동굴이 있는 아라젠트 왕국으로 진입하였다.
아라젠트 왕국 내에서도 고울룬 마을은 최외곽에 위치한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당연히 보통은 그런 외곽의 작은 마을에 누군가가 일부러 찾아가는 일은 드물었다.
특히 외부인이라면 더욱이.
심지어는 아라젠트 왕국에서도 딱히 관리를 하지 않는 곳일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또 여기가 숨은 술 맛집이란 말이지. 알려져 있지 않아서 모를 뿐. 여기 소문나면 난리 난다니까? 게다가 사람들도 좋아서 이게 또 술맛이 두 배가 되고, 세 배가 되고......"
오르헬은 군침을 꿀꺽 삼키며 한창 술맛 예찬으로 가는 길 내내 우리의 귀를 괴롭혔었다.
그리고 겨우 도착을 하자.
다들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술타령 그만 하겠네......'
'더는 술타령 안 들어도 되겠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고울룬 마을의 분위기는 오르헬을 통해 들은 것과는 상당수 차이가 있었다.
고울룬 마을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거리감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모두가 우리를 회피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숙소를 찾기 위해 말을 거는 것은커녕.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는 게 보였던 것이다.
이 마을을 아예 처음 보는 디아즈, 그렌델, 앤드류는 황당해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기만 한 것뿐인데도 무슨 벌레라도 본 듯 피하니 말이다.
"몇 마디 걸지도 않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목례만 했을 뿐입니다."
나 또한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원작에서 이곳은 이미 황폐화가 되어, 사람이 살지는 않는 그저 사냥터에 불과했으니까.
이곳의 위치만 알고 있었을 뿐.
즉, 실제로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 것은 오르헬 밖에 없다는 것인데......
"여기 사람들 왜 이래? 왜 이렇게 변했어? 분위기가."
그 오르헬마저도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이니.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실로 마을의 분위기는 꽤나 우중충했다.
날씨가 어두운 까닭도 있어서인지 더더욱 그렇게 보였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와중에.
사람들은 뭔가 하나같이 퀭한 눈빛으로 터덜터덜 길을 걸어 다녔다.
가끔 우리가 다가가면 흠칫 놀라며 크게 눈을 뜨는 게 전부였다.
"허, 허억! 까, 깜짝이야. 저리 가시오."
제 할 말만 하고는 다들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그 광경을 보며 오르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십 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흐음......"
그는 상황을 살피고는, 시선을 한쪽으로 돌렸다.
"저기, 저쪽에 이 마을에 올 때마다 내가 들르는 양조장이 있는데. 거기 한 번 가보자고. 주인 녀석 아직 살아있을 테니까."
오르헬의 말에 나는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친구가 양조장 주인들밖에 없나?"
"그럴 리가. 양조장 주인 말고도, 술집 주인. 또......그, 그......아, 몰라. 있어. 여하튼 저기부터 가 보자고."
오르헬은 말을 돌리더니 먼저 출발을 했다.
아무래도, 진짜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데. 술집 주인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양조장 주인이랑 왜 친해지는 거야?......"
해결하지 못한 의문과 함께.
우리도 오르헬을 따라 움직였다.
무언가 자그마한 힌트라도 얻기 위해서.
* * *
[블랑코 양조장]
꽤나 오래된 것 같은 이름이 우리를 반겼다.
오르헬은 그 간판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야. 그대로네, 그대로야. 어디 보자."
그리고는 문을 두드렸다.
"어이! 주인장! 좀 나와 봐! 나 오르헬이야, 오르헬!"
쿵쿵쿵.
그러나 양조장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여전히 굳게 문이 닫혀 있을 뿐.
그 모습을 본 앤드류가 슬쩍 물었다.
"친분 있는 거 맞아요?"
"아, 맞다니까? 사람 말을 못 믿어? 속고만 살았나......어이! 주인장!"
오르헬은 앤드류를 한 번 노려보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답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너무 조용한데? 이건 안 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이 아예 없는 거 같은데......"
오르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나도 같은 의견이었다.
감각을 세워 소리에 집중을 해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군.'
그에 디아즈가 의견을 내었다.
"로한 님. 저와 그렌델은 함께 일단 숙소부터 잡아 보겠습니다. 마을에 왔을 때까지 야영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피로 회복 면에서 좋지 않을듯싶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우리는 계속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지."
"예."
그렇게 우리는 일단 두 그룹으로 나뉘어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어차피 당장에 전투가 일어날 것도 아니고.
굳이 한 곳에 다 몰려 있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디아즈와 그렌델이 먼저 빠지고.
남은 나와 앤드류 그리고 오르헬.
우리 셋은 다른 방책을 찾아보기 위해.
블랑코 양조장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구부정한 허리에 뒷짐을 진 한 노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뉘시오들."
오르헬은 그 노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 여기 주인장이랑 친우인데.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데. 노인장은 알고 있소?"
오르헬은 말투를 싹 바꾸며 뱀파이어 로드라는 걸 자연스럽게 숨겼다.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이었다.
"블랑코? 그 친구 얼마 전에 죽었어. 돌아들 가시구려."
"엥? 왜? 아니, 그 친구 술맛이 가물가물해서 간만에 먼 길 온 건데 말이오."
"나도 그 집 술 참 좋아했는데......뭐 어쩔 수 있나. 이미 죽은 놈 살릴 수도 없고."
"거, 왜 죽었는지 들어 볼 수 있소?"
그 물음에.
노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
그는 억지로 허리를 펴며, 주변을 살피고.
그걸로도 모자라 한참을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공포감을.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공포감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어도 말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노인은 결심을 굳힌 얼굴로 입을 떼었다.
"블랑코와 친분이 있던 사이라면 알고 있겠구만. 그 친구에게 딸이 둘 있었다는 걸."
"알다마다. 그 녀석. 매번 취해가지고 딸내미들 볼이 빨개질 때까지 수염으로 비비던 꼴 본 게 아직 엊그제 같은데 말이오."
"그 두 딸내미들, 다 잃고 그 친구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
"......뭐? 어쩌다가?"
꿀꺽.
노인은 긴장을 잔뜩 했는지 침을 삼키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들 미쳤소. 몇 년 전부터 이상한 괴물에게 인신공양을 하고 있는데......대체 어찌 된 일인지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블랑코 녀석을 딸들도 다 그렇게......"
"인신공양? 뭐한테?"
나는 그 대화를 듣다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아라크네."
나의 그 한 마디에.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미 아라크네가 이곳에 똬리를 텄다는 걸 알고 있던 오르헬은.
"아......!"
하고 깨달음의 탄식을.
그리고 우리를 처음 보는 노인은.
"어, 어떻게 그걸......"
깜짝 놀랐다.
외부인이 내부 사정을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럴만도 하지.
다들 저렇게나 쉬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고 싶군."
* * *
그날 밤.
우여곡절 끝에 디아즈와 그렌델은 겨우 방 두 개를 구했다.
덕분에 마을에 도착해서까지 야영을 하는 불상사는 피할 수가 있었다.
하나 딱 거기까지였다.
디아즈는 낮 동안 겪은 일을 되뇌이며 한숨을 지었다.
"장비 손질이나 장기 보관이 가능한 식료품까지. 돈을 준다고 하더라도 뭐 하나 제대로 구해지는 게 없었습니다."
그렌델도 거기에 말을 보태었다.
"후우......식사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숙박은 돼도, 아침밥은 안 나온답니다."
그에 오르헬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심각하네. 어떻게 생각해 브라더? 결국, 그 아라크네 놈 때문이겠지?"
"그렇겠지. 독을 이용해 사람들을 홀린 모양이다. 핵심 계층 어느 정도만 홀려 놓아도, 불안감과 공포감은 알아서 퍼지니까."
"그래......아라크네 그놈. 원래 그런 놈이었지. 잊고 있었어."
나는 노인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둘에게 공유해주었다.
"마을 주민인 노인의 말에 따르면, 아라크네는 어느 정도 텀을 두고 계속해서 마을을 습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맞서 싸웠으나, 결국 마을 자경단으로서는 상대할 수가 없었고. 촌장이 직접 나서서 아라크네와 협상을 했다고 하더군."
"협상......이라니요?"
"3개월에 한 번. 인신공양을 하는 대가로 다른 괴물을 막아주고, 인간 사냥도 멈춘다는 조건이었다고 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국, 굴복한 것이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들이 회의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이런 시골구석까지 왕국의 병력이나 교단의 성기사가 올 리 없다는 판단이었다고. 일리가 없진 않지."
"그래도 그건......그래서 찾은 해답이 인신공양이라니......"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 그러나 아라크네의 독에 이미 정신이 넘어간, 일종의 프락치들이 회의에 끼어 있었을 테니까."
"마을 사람들끼리 회의를 했다고 한들......종국에는 아라크네의 뜻대로 흘러갔겠군요."
"그렇지."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디아즈가, 의견을 내었다.
"속전속결이 필요할듯싶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 마을에서는 물자를 보급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시간이 끌린다면, 오히려 우리 측 전력이 약화될 것입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를 하였다.
"당장 내일 바로 움직이도록 해보지. 고울룬 동굴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움직이는 걸 상정하고 준비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예."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있던 그 순간.
쿵! 쿵! 쿵!
느닷없이 방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리는 게 아닌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의 시선이 전부 그리로 향했다.
디아즈가 먼저 일어서 나섰고.
나머지 인원들은 각자 무기로 손을 뻗거나, 긴장을 잔뜩 세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마을에 들어오고 나서.
우리는 단 한 번도 누군가의 호의적인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디아즈는 문고리를 잡고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주었다.
그에.
철커덕, 끼이이익.
잠겼던 문이 열리고.
눌러 쓴 후드 아래로 두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꽤나 날카로운 눈매로 입을 열었다.
"귀하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다짜고짜 도움이라니?
나는 그녀들에게 되물었다.
"누구지?"
이어 들어온 대답은.
조금 의외의 것이었다.
"나는 일곱 기사단의 로제스타. 그리고 이쪽은 이단 심문관 아펠리아이다."
그러면서 일곱 기사단의 신분을 증명하는 인장을 내비치는 게 아닌가.
"불응한다면......조금 험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가벼운 협박과 함께.
본의 아니게 내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