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당신.....인간 아니지?
"아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요.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까맣게......읍읍?"
투덜대던 앤드류의 입이 갑자기 멈추었다.
딱 봐도 그렌델의 염력 같았기에,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렌델은 살짝 미간이 찌푸려진 얼굴로,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너무 시끄러웠습니다. 혀를 꼬아버릴까 하다가 참았습니다."
"훗. 잘했다."
덕분에 원정길이 조금은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하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입 열기를 포기한 앤드류가 반항을 멈추자, 그렌델도 그만 염력을 풀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앤드류는 다시 입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근데 저 술주정뱅이는 뭔데요?"
그래도 찡얼거리는 건 멈추긴 한 모양이었다.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앤드류가 누굴 가리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이 원정대에서 술주정뱅이 소리 들을 놈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아, 저거?"
"예."
"저거, 뱀파이어 로드다."
"아......뱀파이, 에잉? 뭐라고요? 뱀파이어 로드?"
순간 반응하지 못했다가, 얼른 다시 정신을 차리며 깜짝 놀란 앤드류.
"뱀파이어 로드가 왜 저기서 술 퍼마시고 뻗어 있는 건데요? 아니, 왜 여기 원정대에 같이 끼어 있는데요?"
"......그러게나 말이지."
길잡이만 아니었다면.
나도 중간에 떨어뜨려 버리고 가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햇빛도 쨍쨍한데, 용케도 대자로 뻗어 있네."
얼핏 보면 거의 일광욕을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술에 취해 뻗어 가지고, 대낮에 일광욕하는 뱀파이어 로드라......
가관은 가관이었다.
* * *
"으음?......"
로드 오르헬은 해가 저물 무렵 즈음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물론 깰 시간이 되어 깬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저 수풀 너머를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으니.
오르헬이 깨어나기 거의 직전에, 나 역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 눈동자를 고정한 채였다.
"브라더도 느꼈나 본데?"
"도적이라도 있는 건가?"
"글쎄. 도적이라기엔......"
"묘한 녀석이 하나 섞여 있군."
"그래."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앤드류와 디아즈, 그렌델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조금 더 거리가 가까워지자.
가장 먼저 앤드류가 눈치를 챘다.
그리고 디아즈가.
직접적인 전투에는 약한 그렌델이 마지막으로 반응을 했다.
"오. 들린다, 들려."
"민간인이 습격을 당하는 중이라면, 가서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같은 생각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한다."
물론 단순한 도적 떼라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쪽에는 일곱 기사단도 둘이나 있었고, 이미 꽤나 성장한 디아즈도 끼어 있었으니까.
그와중에 술이 덜 깬 오르헬은.
"먼저 가. 난 좀 천천히 갈게. 어우......토 할 거 같거든."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신경 쓰이는 부분은......오르헬이 아니었다.
저 멀리서 일어나는 전투.
그 와중에 느껴지는,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기운 하나 때문이었지.
'어딘가 묘하게 익숙한 기운이다......'
그걸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까닭에, 나는 걸음을 좀 더 보채었다.
타탓, 타다닷!
우리를 빠르게 거리를 좁혀나갔고.
슬슬 전투의 소음까지도 확연하게 들리기 시작할 때 즈음.
스르릉, 스릉.
각자 무기를 뽑아들어 무장을 한 채.
수풀 너머의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들어온 모습은......
"자, 잠깐만......! 사, 살려......!"
푸욱!
마지막 남은 도적의 심장이 꿰뚫리는 장면이었다.
* * *
'일말의 자비도 없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뒤로 물러서는 도적놈을 향해.
일직선으로 쭈욱 내리꽂히는 검격.
그것은 일체의 흔들림도 없이 정확하게 심장에 박혔다.
그 곧은 공격이, 검을 뻗는 자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다고.
물론 나 역시도 악의를 품고 달려드는 도적들에게 자비를 베풀 만큼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었다.
솔직히 이제 이 세상에 적응도 어느 정도 한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따위 자비는 오만이 될 수도 있는 멍청한 행동이었으니까.
괜히 살려두었다가 뒤통수라도 치면 피곤하니 말이다.
해서 도적을 죽인 자를 탓할 생각은 일절 없었다.
다만, 그가......우리에게까지 적의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였다.
"그쪽도 이 자들과 한패인가? 그럼 죽어줘야겠군."
'뭐......?'
파앗!
미처 무슨 얘기를 하는지 파악도 하기 전에 몸을 날리는 의문의 사내.
엄청난 속도였다.
'크윽?......'
거의 로드 드레트노어에 필적하는 정도의 스피드였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방어를 위해 검을 위로 휘둘렀다.
그런데.
그 찰나를 또 간파하고는 검로를 비트는 게 아닌가.
'전투 센스가 무슨......!'
드레트노어는 차라리 자신의 힘을 믿고 전투를 하는 타입이었다.
그 스스로가 뱀파이어 로드라는 자리에 앉아있는 만큼, 약간의 방심도 있긴 했다.
그런데 이쪽은 달랐다.
속도도 거의 드레트노어 급인데,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전력을 기울이는 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단 한 순간도 대충대충 한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흡!"
나는 상체를 비틀며 놈의 공격을 피했고.
샤악!
왼팔에 힘을 가득 실어.
꾸우우욱......!
흐트러진 자세 그대로 팔을 쳐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놈은 그 공격에도 반응을 해내었다.
오른쪽 어깨너머로 왼팔을 집어넣고 손바닥을 펼쳐.
퍼어억!
내 주먹을 받아내었다.
'......!'
이번 건 나도 살짝 놀랐다.
설마 내 주먹을 받아내는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아니, 나타날 수야 있겠지, 라고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당황스럽긴 하였다.
그래도 완전히 피하지도 못하기도 했고, 막고 나서는 저쪽의 표정도 꽤나 당혹스럽게 변했었다.
'손에 묵직한 감각은 있었다.'
그리고 아예 데미지가 없는 것도 아닐 것이었다.
놈 역시 눈을 부릅뜨며 더 이상 연격을 하지는 않고 거리를 벌렸으니까.
거리를 벌린 다음에도, 내 주먹을 막은 그의 왼팔은 어색하게 축 처져 있었다.
더불어.
타이밍 좋게 오르헬도 어슬렁어슬렁 합류를 해주었다.
"어우. 메슥거려......기분도 안 좋은데. 뭐야, 이건 또?"
비록 저런 몰골이긴 하지만......
'든든하긴 하네.'
이 정도 수준의 상대라면, 앤드류와 디아즈는 버거울 터였다.
첫 선공을 내가 아니라 앤드류나 디아즈가 받았더라면, 진짜 목이 날아갔을 지도 모를 경지였으니까.
상대도 오르헬의 능력을 대강이나마 느낀 것인지, 반 보 더 물러섰다.
그때.
"아이고, 성기사 님! 그쪽 분들은 도적이 아닌 듯싶습니다요!"
녀석의 뒤에서 행상인으로 보이는 자가 후다닥 달려오는 게 보였다.
'뭐지? 악인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행상인은 우리 쪽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하필 도적 떼가 습격하는 순간에 같이 나타나서는, 우리 성기사 님께서 조금 오해가 있으셨던 거 같소."
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까."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그 말에, 그 성기사라는 놈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게 영 당혹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나와 성기사 사이의 기 싸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행상인은, 우리의 모습을 살피더니 넌지시 물어왔다.
"한데, 보통 여행자는 아닌 거 같고......"
그의 물음에 디아즈가 대신 대답을 하였다.
"우리는 교단의 사람들입니다. 여기 이 분은 이단 심문관. 그리고 저기 뒤에 계신 분은 일곱 기사단이십니다."
"아, 아이고! 이, 이거 알아 뵙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무슨 귀족도 아니고......그냥 성직자일 뿐입니다."
"그, 그래도 말이지요. 이단 심문관 님에 일곱 기사단의 일원까지. 영광입니다!"
둘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해서 그 의문의 성기사를 살폈다.
'희한하군. 교단의 성기사가......이단 심문관과 일곱 기사단이라는 이름에도 전혀 반응이 없다?......'
여지껏 만나본 성직자들과는......무언가가 달랐다.
* * *
"희한하네......어디서 본 것 같은데......"
행상인 일행과 우리는 방향이 겹친 탓에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선두에 서고, 우리가 후미에 선 채로.
그런데, 성기사를 보고 난 이후부터 오르헬은 계속 저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 좀 그만하고, 그냥 기억나면 말하면 안 돼요?"
듣다 듣다 지친 앤드류가,한 마디 쏘아붙이자.
"어허. 어린놈이."
"어린 데 보태 준 거 있어요?"
"하여간 요즘 어린 것들은 말이지, 한 마디를 안 져요."
"술이나 그만 먹으면서 말하시죠. 지금도 꼴깍꼴깍 거리는데, 기억이 날 리가 있나."
"야 이놈아. 이건 생명수야, 생명수."
"생명수도 그만큼 퍼마시면 뒤지겠네."
생각보다 둘의 수준이 비슷한 것 같았다.
나는 둘의 대화는 그냥 무시한 채.
성기사 놈의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었다.
"로한 님."
그에, 디아즈가 옆으로 붙으며.
"신경 쓰이십니까?"
"아무래도."
"성기사 중에도 특출난 자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렇겠지. 꼭 실력이 없어서 일곱 기사단이나 이단 심문관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니까."
그것은 본인들이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 거부할 수도 있는 직책들이었다.
해서 저런 숨은 실력자가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으나......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그럼?......"
"인간이.....아닌 거 같은......"
그 말을 하는 순간.
성기사 놈이 뒤를 싹 돌아보는 게 아닌가.
나와 놈의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몇 초간의 눈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저쪽이었다.
'......알겠다. 저 비슷한 눈빛. 기억났어......'
그러나 그 몇 초 사이.
나는 놈의 정체를 알아내었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그날 밤.
우리 두 팀은, 함께 적당한 평지에 자리를 잡고 야영을 준비하였다.
우리 쪽에서는 오르헬만 제외하고는 전부 함께 움직이고 있었는데.
저쪽에서는 행상인 그룹만이 보일 뿐이었다.
성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해서 나는 놈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 걸어가 보았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나는 놈을 발견하였다.
놈 역시 내가 왔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를 쫓아 온 건가?"
"전혀 아니라고는 못하겠군."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이상하더라고. 성기사가 말이야. 이단 심문관과 일곱 기사단을 보고도 너무 반응이 없어서."
"......"
놈이 입을 다물자.
나는 바로 본론으로 넘겨 버렸다.
이렇게 질질 끄는 건 별로 재미도 없었으니까.
"당신.....인간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천사를 만나는 게 처음은 아니거든."
나의 그 말에.
놈이 작게 웃는 것 같았다.
내가 보이는 건 놈의 뒤통수이지만,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날개를 펼치며.
나를 돌아다 보았다.
"놀랍군. 그대 같은 인간은 처음이야."
그 모습은 명백한......천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