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고상함이 밥 먹여주나?
"아주 개지랄을 하고 다니셨더라고? 내 이름을 사칭하면서 말이야. 새끼......덕분에 공공의 적이 다 됐어, 인마."
로드 오르헬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하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런 그를 보며, 로드 드레트노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주둥이 신사답지 않게, 되먹지 못한 건 여전하군."
"우리 브라더가 처신을 똑바로 해줬으면, 요놈의 주둥이도 가만히 있었을 텐데 말이지."
"조금만 더 귀족답게 굴 순 없나? 우리가, 이 밤을 지배하는 존재들인데."
"귀족? 하. 누가 우리더러 귀족이래? 그냥 자기네들끼리 정해놓은 거면서. 어이가 없네."
"......"
오르헬의 혀가 날뛰니, 드레트노어도 화가 났는지 욱 할 뻔하다가......한 템포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후우......나는 그대의 능력을 인정해. 우리가 손을 잡으면, 세상 한 번 뒤집어 보는 것도 가능할 텐데?"
"염병. 입만 열면 구라야, 구라. 아직도 내가 만만해 보이지? 응? 시바, 한 번 속으니까 계속 호구로 보이나 보네? 손잡을 생각한 놈이 내 봉인구는 왜 찾아다니셨대? 그리고 환영은 왜 또 내 얼굴로 쳐 걸어?"
그 말을 들은 나는, 3 왕자를 구할 때 당시 나타났던 오르헬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보니......그때 그 오르헬의 말투는, 드레트노어랑 더 비슷한데?'
그런 거였나?
드레트노어가 환영 속에서 오르헬의 얼굴로 나타난 것이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둘의 대화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오르헬이 짜증을 내는 이유도 이해가 되었고.
드레트노어는 오르헬을 손가락질하며 대꾸하였다.
"네놈의 그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정신머리를 고치려면, 그 정도 하지 않으면 네가 내 말을 들을 생각이나 했을까? 아니, 꼭꼭 숨어서 나타나지도 않았겠지! 비겁하게."
"그래, 그거야. 그게 네 본모습이지. 모든 게 지 발아래에 있어야지, 어? 맞지? 말이 동맹이지. 그냥 꼭두각시 하나 필요한 거 아니냐고? 좀 센 꼭두각시."
"그렇다면 어쩔 텐가? 이건 이미 내 손에 들어와 있는데."
"아, 그러네. 고걸 몰랐네."
그러더니 느닷없이 나를 쳐다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어이, 인간."
생긴 거랑 안 맞게 쓸데없이 귀여운 캐릭터였다.
"내가 요 우리 브라더랑 사생결단을 좀 해야 쓰겠는데. 그쪽이 먼저 왔으니, 양보해 달라고 하긴 그렇고. 먼저 한바탕 하다가, 안 될 거 같으면 내가 나서는 건 어때?"
"하다가 안 될 것 같으면?"
"자. 이거부터 받으셔."
휙!
오르헬은 손에 들고 있던 드레트노어의 심장 감옥검을 내게 던졌다.
터업!
"이게 있으면......하다가 안돼서 네가 나설 일은 없을 텐데?"
"그래? 이 새끼 면상에 주먹 박아 넣지 못하는 건 좀 아쉽긴 할 거 같은데......그래도 늦게 도착한 내 잘못이지, 뭐."
내 손아귀에, 드레트노어의 심장 감옥검이 들어오자.
드레트노어의 눈동자가, 분노로 들끓었다.
그는 오르헬을 노려보며, 늑대처럼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옛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네놈의 그 저렴하기 그지없는 태도가!"
그에 오르헬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응, 나도 그랬어. 네놈의 그 고귀한 척 지랄 염병은 혼자 다 떠는 그 태도가."
그리고는 마무리로 손가락을 후, 부는 동작까지.
이건 오르헬의 완승이라 할 수 있었다.
'열 받는 놈이 진 거지. 음.'
끄덕.
* * *
"기어코 뱀파이어의 긍지를 버리고, 인간과의 공생을 꾸리려 하는가?"
"왜 안된대?"
"몰라서 묻나."
"모르니까 묻지. 돌대가리인가?"
계속해서 비아냥대는 오르헬에, 드레트노어가 결국 터졌다.
"그! 그 입 좀! 제발 고상하게 말 좀 할 수 없나?"
"뭐. 내 대가리에 달린 내 주둥인데, 뭐? 싫으면 떼가서 니 대가리에 달던가."
오르헬의 끝도 없는 개드립에.
"푸훕."
"크흡흐."
내 뒤에 서 있던 디아즈와 크뢰이튼이 피식 터졌다.
나도 어이가 없어 웃고 있었고.
그 모습에 드레트노어가 이를 갈았다.
"네놈 때문에 나까지 저급해지는 기분이로군. 흥! 대화는 여기까지다!"
그리고는 내게 날아들었다.
아무래도 오르헬보다는 아직 내가 더 만만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내가 심장 감옥검까지 들고 있는데......
'조금 자존심 상하네.'
물론 짐작은 되는 바였다.
놈의 속도는 나를 상회하는 수준이었으니까.
첫 격돌에서 바로 느꼈었다.
그리고 놈도 느꼈겠지.
내가 제 놈보다 느리다는 걸.
하지만 내겐 제3의 눈이 아직 건재하게 버티고 있었다.
'공격하기 직전, 미세한 눈동자의 움직임. 그리고 근육의 반응들에 집중을 하면......!'
반 박자 정도는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다.
쐐애애액!
이전의 공격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날아드는 드레트노어.
독만으로는 안된다는 걸 알고 있는 까닭에, 아주 목을 날려버리겠다는 얼굴이었다.
'왼쪽이다.'
오른팔의 페이크에 나는 속지 않고.
왼쪽 옆구리를 향해 파고든 후.
갈비뼈를 향해 힘껏 대각선으로 주먹을 쳐올렸다.
그러나 로드 드레트노어도 보통은 아니었다.
터억!
그걸 어느새 손바닥을 뻗어, 막아낸 것이다.
그리고는 도망치지 못하게 꽈악 주먹을 붙잡았다.
그에 나는.......
씨익!
입꼬리를 비틀었다.
드레트노어의 눈동자에 의구심이 든 순간.
파지지지직!
"으그그극!"
갑작스러운 전기가 놈의 몸을 휘감았다.
'물리 타격은 힘들어도, 전기는 그나마 먹히네!'
그 틈을 타 나는 오른손에 말아 쥔 드레트노어의 심장 감옥검을 휘둘렀다.
촤악!
지금까지와는 다른,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크으으윽!"
"눈을 노렸는데......아깝네."
"......"
비록 아슬아슬하게 뺨을 스치는 데에 그쳤으나.
확실히 이번 공격은 달랐다.
이전까지는 물을 베는 느낌이었는데......
'손에 감각이 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드레트노어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드레트노어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아직......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 * *
"애송아. 잡기술 조금, 그리고 뺨에 옅은 상처. 그걸로 네가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한 방 맞더니 갑자기 왜 혓바닥이 길어져?"
"그 단검만 쥐었다고 개나 소나 나를 이긴다면......내가 로드 드레트노어가 아니지."
"어. 그럼 오늘부터 로드 하지 마, 때려 쳐. 말릴 생각 없으니까."
내 말에 오르헬이 빵 터졌다.
"푸하하하하! 그거 좋네. 너 그냥 로드 하지 마라, 새끼야."
드레트노어의 이마에 핏줄이 빡 하고 섰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말하는 태도하고는!"
그는 그 말을 외침과 동시에, 온몸에서 독 기운을 내뿜었다.
뭉게뭉게 퍼져 나가 온 공간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그 독무는.
벌써 나를 완전히 집어삼켰고.
다급히 그렌델은 장막을 펼쳐 더 이상 그것이 다가오는 걸 겨우 막았다.
"로한 경!"
"로한 니이임!"
그렌델과 디아즈가 깜짝 놀라며 외치는 게 들렸다.
나는 그들에게 소리로 알렸다.
"괜찮으니까! 물러서!"
"하, 하지만......!"
"어떻게 그냥 두고 갑니까!"
그녀들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 오르헬이 나섰다.
점점 짙어지는 독무 사이로, 그와 나의 눈동자가 잠시 마주쳤다.
나는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끄덕.
용케도 알아들은 오르헬은, 둘의 목덜미를 잡고 내달렸다.
독무의 바깥으로.
"납득이 안되는 일이긴 하지만......녀석은 괜찮으니까, 일단 벗어나도록 하지!"
타탓.
그렇게 다른 이들의 안전이 확보된 걸 확인한 나는.
번뜩!
다시 로드 드레트노어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 말도 안 되는......! 내 독혈에 정면으로 당했는데......어째서 멀쩡할 수 있는 거지? 왜 피를 토하지 않는 거냐고!"
"글쎄. 저승에 가서 천천히 생각해 봐!"
* * *
나는 머리를 크게 뒤로 젖혔다가.
"흐읍!"
콰아앙!
머리로 힘껏 놈의 이마에 갖다 박아버렸다.
"으헉!"
비틀.
나도 순간 정신이 멍해졌지만.
놈도 꽤나 아픈 모양이었다.
내 주먹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친 걸 보면 말이다.
덕분에 나는 자유를 되찾았고.
근접전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깨닳은 드레트노어는, 아예 뒤로 몸을 날려 독무 안으로 몸을 숨겼다.
"정말이지 고상하지 못한 공격이로다!"
"고상함이 밥 먹여주나? 목숨 걸고 싸우는데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그러니 내가 너희들과 격이 다른 것이다!"
드레트노어는 시커먼 독무 속으로 몸을 숨겼다.
"부끄러움이라도 알았다면, 나 역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고통 없이 죽여줬겠지만......매너 따위는 네놈이 먼저 버렸으니, 편하게 죽을 생각일랑 버려라!"
놈은 엄청난 속도로 주변을 휘감으며 움직였다.
게다가 독무에 앞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통은 그 전에 이 독에 죽었겠지만.
이런 방법으로 수도 없이 많은 적들을 사냥했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거, 익숙한데?'
문제는, 나는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일단 독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럼 남은 건 그냥 앞이 안 보이는 안갯속에서 싸운다는 것인데......
일전에 시포레오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경험이라는 게 이리도 무서웠다.
오히려 긴장감이 풀리며, 온몸이 가벼워졌으니.
눈을 감아버리고.
시각 외의 모든 감각에 집중을 했다.
청각, 촉각, 후각......
내가 힘을 푸는 걸 느꼈는지.
로드 드레트노어가 좌측 후면에서 독 손톱을 세우며 날아들었다.
'지금이다!'
나는 급히 몸을 낮추며, 뻗은 놈의 손목을 어깨너머로 붙잡고.
꽈악!
그대로 놈을 엎어 쳐 버렸다.
붙잡은 팔을 전력으로 끌어내리며 엎어치기를 하니.
콰아아아아앙!
살벌한 굉음과 함께 바람이 일며 독무가 흩어졌고.
울컥!
놈의 팔을 타고, 내장이 진탕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벨 때마다 핏물로 변해 피하던데.
이런 직접적인 충격에는 액체로 변해도 별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대로 오른손의 단검을 세워 들어.
바닥에 누워 있는 놈의 심장을 향해 내질렀다.
한데, 그 와중에도 드레트노어는 아직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하하! 네놈이 강한 건 알겠다만......혹여나 이런 일이 있을까, 드래곤의 뼈로 만든 흉갑을 입어 두었지! 그 단검이 비록 내게는 치명적일지언정, 드래곤의 뼈를 뚫을 수있지는 않을......"
응. 못 막아.
이게 드레트노어의 심장 감옥검이든, 식칼이든.
검은 검이었다.
그리고 내 손에 검이 들어오는 순간.
[공간 베기]
내 권능은 항상 유효했다.
그러니까, 드레트노어가 입고 있는 게 드래곤의 뼈로 만든 흉갑인지 아닌지는 내게 결단코 중요하지 않았다.
서걱.
이미 칼날은 놈의 흉갑을 공간째 가볍게 베어 버렸고.
"뭐, 뭐야, 이게! 부, 분명이 드래곤의 뼈로 만든 건데......!"
푸욱!
드레트노어의 심장에, 단검은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