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해리슨 백작은, 눈앞의 사내를 향해 외쳤다.
"약속은 지켰다. 이제 네놈이 지킬 차례다."
사내는 중년 즈음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깔끔하게 정돈된 수염과, 뒤로 말끔히 넘겨 정리된 머리가 그를 귀족처럼 보이게 하였다.
옷차림 역시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어, 이 낡아 빠진 대저택과는 이상하리만치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해리슨 백작보다도 더 귀족처럼 보이고 있었으니.
하나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든 금방 알아채리라.
핏방울처럼 빨간 눈동자에, 창백한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날카롭게 드러나 있는 송곳니가 그의 정체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뱀파이어의 귀족.
로드였다.
"이 몸은 밤의 귀족. 귀족 놀음하는 네놈과는 결이 다른 진짜 귀족이다."
해리슨 백작은 피식 웃었다.
"귀족이건 아니건 나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말만 하는 놈도 믿지 않지. 말만큼 바꾸기 쉬운 것도 없으니."
"꼭 네놈 자아비판을 하는 것 같군. 후후후."
"나는 네놈과 농담 따먹기나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거래를 하러 온 것이지. 잡담은 그만하고 그만 이 지긋지긋한 거래의 종지부를 찍고 싶은데."
"그리하지. 나도 이제 할 일이 많아질 것 같으니, 유흥을 즐기는 것도 다음으로 미뤄야겠어."
그 말을 기점으로, 둘의 눈빛이 싸악 변했다.
해리슨 백작은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었다.
그것은 로한이 구해 온, 진짜 오르헬의 혈사검이었다.
"로드 오르헬의 봉인구다. 이게 있으면 네놈이 원하는 대로 로드 오르헬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테지."
"그래. 그렇겠지. 그리고 네놈은 꿈에도 그리던 영원불멸을 손에 넣을 것이고."
"다시 한번 말하지. 내 조건은, 너의 통제를 받지 않는 뱀파이어가 되는 것이다."
"물론이지. 나도 네놈 같이 눈에 불을 켜고 뒤통수를 치려는 사람이 내 곁에 있는 건 혐오스럽거든."
이것이 그들의 거래였다.
불사의 몸을 가진, 동시에 로드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고위 뱀파이어가 되고자 하는 해리슨 백작.
그리고 로드 오르헬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새로운 판을 짜려는 드레트노어.
둘은 이해관계가 겹쳤기에, 이렇게 아슬아슬한 동맹 관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마침내 그 거래의 끝자락이었다.
해리슨 백작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었고.
휘익.
그것을 로드 드레트노어에게 던졌다.
드레트노어는 그것을 받아내었다.
척.
그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단검을 뽑아.
스르릉.
코에 가져다 대고는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스으읍! 하아......"
그리고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진품이.....맞군."
* * *
해리슨 백작은 후드를 젖히며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마스트로프 숲에서 겨우 구해온 것이다."
"후후후......네놈이 찾아낸 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무슨 상관이지? 어쨌든 내가 가져왔음이야."
"그래, 그래. 그렇지.....자, 그럼 나도 보상을 주어야겠군."
드레트노어는 미소를 머금은 채.
손톱에 날을 세우더니.
차랑!
그 진녹색의 손톱을 뽐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해리슨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 기세에, 해리슨 백작은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나 아직 그는 인정하기 싫었다.
당했다는 걸.
"뭐, 뭐하는 짓이냐? 배, 뱀파이어로 만드는 데 그게 필요한 것인가?"
"순진하기는. 아직도 내가 널 고위 뱀파이어로 만들어 줄 거라 생각하나? 그거 생각보다 힘이 꽤 든다고. 게다가 얼마 전에 내 귀한 수하 하나도 생포 당했다가 죽은 탓에, 피를 수급해 줄 놈도 없고. 해서, 계획이 조금 바뀌었다."
"야, 약속이 다르지 이건!"
"말했잖나. 네놈 같이 눈에 불을 켜고 뒤통수 치려는 사람은, 혐오스러워한다고. 게다가 너 같은 놈이 큰 힘을 가지면......쓰읍, 나중에 귀찮아질 것 같단 말이지."
"제, 젠장......!"
그렇게 실실 웃으며 다가오던 로드 드레트노어는.
갑자기 눈에 살기를 띄며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흠. 역시 약삭빠르군. 이걸 예상하고 잔챙이들을 더 데려온 건가?......"
"......?"
해리슨 백작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있다고? 난 분명 혼자 왔는데? 대체......'
그때.
드레트노어가 한쪽 팔을 들어 올리며.
콰아아아!
거친 바람을 일으켜, 문을 날려버렸다.
쿠당탕탕......!
잠시 일어난 먼지가, 천천히 걷히고.
로한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어이쿠......들켰네?"
* * *
나쁜 놈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여주면, 그만큼 편한 게 없었다.
그래서 좀 편하게 가보려고 했는데......
'그래도 뱀파이어 로드라 이건가? 감이 나쁘지는 않네.'
나름 기척을 잘 숨겼다 생각했는데.
이걸 알아채다니.
로드 드레트노어가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 쓰레기를 구하겠다고 온 건가? 후후후."
"아니? 둘 다 죽일 생각이다만. 원래는 네놈이 해리슨 백작을 죽이고 나면 천천히 등장하려고 했거든."
그 말을 들은 해리슨 백작은 사색이 되었다.
하나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연기를 시작했다.
정말 징글징글한 놈이었다..
"로한 경! 뭐,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일단 이, 이 뱀파이어를 처리하면 내 소상히 말씀드리오리다! 모두 다 왕국을 위한 것이었소!"
끝까지 거짓말을 하려고 드네.
이쯤되니, 나도 로드 드레트노어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려 하고 있었다.
'역겹네, 진짜로.'
그에 본의 아니게 속에 있던 말이 튀어나왔다.
"네놈이 씨부린 말, 문 뒤에서 다 들었어. 새끼야."
절대로 고의로 한 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나온 거였지.
뭐, 어차피 다 죽일 거니까.
듣던 말던 큰 상관은 없겠지.
"이 자리에, 우리 셋 사이에 아군은 없다. 다 적이야."
나는 둘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한편, 최약자의 위치에 선 해리슨 백작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뻔히 보였다.
대가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으니까.
"로한 경. 내 설명할 기회를 한 번만 주시오. 그럼 진짜 진실을......"
"내가 왜 네놈에게 그 단검을 주었을까?"
"......?"
"여기까지 안내하라고 준 것이다. 모를 줄 알았나? 나도, 국왕도. 다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제서야 해리슨 백작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개, 개자식들......! 둘이서 아주 나를 가지고 놀았구나......!"
"말은 바로 해야지. 먼저 개수작 부린 건 네놈이었으니까."
해리슨 백작은 이를 갈았다.
"이, 이이익! 드, 드레트노어! 잠시만 동맹을 하자! 내 대신 놈을 죽여라!"
"내가? 왜?"
"내가 죽으면 네놈은 무사할 성 싶은가? 내가 죽으면, 국왕의 사람들이 내 저택을 살필 거고, 그럼 드레트노어 네놈을 봉인시킬 봉인구가 발견될 것이다! 넌 그걸로 끝을 맞이할 것이다!"
"오호라. 그런 계략이......"
"내가 그 정도 보험도 준비하지 않았을 것 같았나? 일단 로한 저놈부터 죽이면, 그 봉인구를 네게 넘기겠다!"
"음, 그래?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것도 가품일세."
"뭐, 뭣이?......"
해리슨 백작은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었다.
국왕에게 가품을 만들어 올렸으면서......자신이 당할 거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던 것일까?
넋이 반쯤 나간 그 모습을 보며, 드레트노어가 광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 네놈은 처음부터 놀아난 적밖에 없다. 네가 네 힘으로 내 봉인구를 찾았다고 생각하나? 천만에. 그것도 다 내가 뿌린 계획에 일부였다. 그걸 찾아야, 네놈이 내게 거래하러 올 것이라 생각했거든."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내 손아귀 안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진품을 썼을 리도 없지. 하하하하하!"
촤악!
드레트노어의 녹색 손톱이, 가차 없이 해리슨 백작의 목을 가로 그었다.
툭, 데구르르......
원통한 얼굴로 잘린 목.
그것이 해리슨 백작의 마지막이었다.
* * *
그들의 대화를 들은 나는,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주 가관이네.'
자기네들끼리 속고, 속이고.
뒤통수 치고, 맞고.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었다.
타짜도 아니고 무슨.
하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거......나도 한 방 먹었는데?'
내 품에 있는 게 가품이라니.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져 나조차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로드가 직접 만들다 보니, 확실히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칫.'
그러나 이미 발을 들인 이상 도망칠 수도 없었다.
드레트노어의 시선은, 벌써 우리를 사냥할 생각으로 번뜩이고 있었으니까.
다음 순간.
놈의 신형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핏!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돌진을 해왔다.
질질 끌 생각 없이 바로 끝낼 심산인듯했다.
'쉽게 당해줄 수는 없지!'
나는 제3의 눈을 포함해, 온 신경을 집중시켜 놈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몸을 비틀었다.
샤악!
꽤나 전력을 다한 움직임이었는데도, 워낙 기습적으로 날아든 탓에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고.
주륵......
목덜미에 얕은 생체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나도 그냥 당하진 않았다.
검으로 놈의 목을 함께 그었으니.
하나 뱀파이어 로드를 벤 감촉은, 물을 베는 것 같았다.
검날이 닿는 순간, 몸을 핏물로 변화시킨 까닭이었다.
"호오. 이걸 피할 줄이야. 게다가 반격까지? 생각외로군."
가소롭다는 듯 내려다보는 드레트노어에, 나는 비아냥대며 대꾸를 했다.
"칭찬 고맙네."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까?"
그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살살 흔들었다.
"인간들은 잘 모르지만, 뱀파이어 로드들은 또 다른 이명들이 하나씩 더 있다. 각자 가진 피의 특성에 따라서 말이지. 나의 경우는......"
"독혈의 드레트노어?"
"......"
내가 단박에 맞추자, 놈의 얼굴이 조금은 동하였다.
"예사 놈은 아니로고."
하나 그것도 잠시.
드레트노어의 표정은 곧 가라앉았고.
금새 다시 옅은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럼 잘 알겠군. 내 피에는 치명적인 독이 담겨 있다. 치명상은 피했다고 하지만......과연 그게 진짜 피한 것일까? 후후후."
"그래?"
"이제 잠시 후면 네놈은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게 될 것이다."
"......"
"지금쯤......곧......"
"아직 인가?"
"이제......"
"별거 없는데?"
만티코어의 내단이, 놈의 독을 모조리 중화시켜 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의 독이 먹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드레트노어의 눈빛이 변했다.
"네놈......인간이 맞긴 하는가?"
"글쎄. 과연 어떨까?"
나는 슬쩍 웃어 보이며 대답을 했다.
기세를 꺾기 위해 잘난 척하기는 했다만......나도 이다음이 없는 게 문제였다.
'이대로 끝까지 가면, 체력적으로 내가 불리하다......'
결국 원작에서도 마지막 일격은 드레트노어의 심장 감옥검이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때.
제3의 눈이, 우리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잠시 후.
로드 드레트노어 역시도 그걸 느꼈는지, 시선을 움직였고.
'또 누가......'
뚜벅, 뚜벅.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나 이외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하나 더 나타났다.
단정한 모습에, 완전히 정장을 깔끔하게 입은 드레트노어와는 정반대의.
거지꼴 바로 직전의 후줄근한 코트에 막 기른 수염과 머리를 휘날리며 나타난......
"어이, 드레트노어 이 씨바 브라더. 오랜만이지, 응? 면상이 좋네."
언행은 조금 싼데......익은 얼굴.
그는 다름 아닌, 로드 오르헬이었다.
오르헬은 코웃음을 치며.
"요거, 요거. 잘 숨겨 놨더라고. 찾는 데 고생 좀 했어?"
드레트노어의 심장 감옥검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